스타는 예상대로 악기에 꽤나 해박했다. 다시 방문한 VIP의 모습에 백화점에선 어제보다 더 좋은 대접을 해주었다. 비올라를 설명해주며, 스타가 자꾸 시선을 주는 오보에가 있어 안구사는 그것을 눈여겨보았다.

"저것도 포장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스타가 알아듣지도 못할 전문적인 설명을 하는동안 옆의 직원에게 귓속말을 하자 곧바로 눈치 빠르게 스타 몰래 사라졌다. 이윽고 값을 치르고 제 손에 쥐어진 오보에 케이스에 스타는 어리둥절해했다.

"이, 이거 저 안샀는데요."

꽤 값나가서 살 엄두도 못냈던 스타의 심장이 철렁했다. 안구사가 귀티나게 생겨서 돈도 많다는 건 알겠는데, 그거랑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다.

"계산하신 겁니다."

"네?"

직원이 웃으며 하는 답변에 스타는 안구사를 돌아보았고, 여전한 무표정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아니, 이런 거 안 사줘도 되는데....... 애당초 이거 비싸서 엄두도 못내고 있던 거고......."

"친구끼리 주는 선물인데 부담갖지 마라. 비싸지도 않다."

"너네는 공무원이라 페이는 어쩐지 모르겠는데, 우리같은 PMC는 저런 거 살려면 몇 달을 모아야 해."

잠깐 스타에게 재수없는 돈지랄이라 여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안구사는 말을 고쳤다.

"선물은 값이 중요한 게 아니지.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더 중요한 거다. 내게 부담되는 가격도 아니고, 네가 눈여겨보던 것이니까 받아라."

"...고마워. 잘 쓸게."

다행히 순진한 스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친구가 좋아하니 안구사의 입꼬리도 부드럽게 올라갔다. 살 건 샀으니 근처의 공원으로 나가자마자 스타는 케이스에서 오보에를 꺼냈다. 눈을 반짝이며 안구사를 돌아보는 게 여기서 불어도 괜찮냐는 눈치였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안구사에게 환하게 웃어보인 스타는 독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악에 대해선 수집한 정보도 없고, 곡명도 음악회에서 연주하기 위해 배웠던 한 곡 외에는 무지한 안구사의 귀에도 그것은 썩 기분좋게 들렸다.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게 조성된 벤치에 스타의 케이스와 비올라를 들고 앉아 조금 떨어져서 스타의 연주를 듣고 있자니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해지고 Elid 때문에 살기 어려워졌다 해도 클래식을 사랑한다는 러시아인의 자존심은 남아있었는지, 곡을 부드럽게 연주해나가던 스타가 인기척에 슬며시 눈을 떴을 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다가, 길을 가다가 멈춰서서 듣고 있었다. 부끄러움에 볼을 붉힌 스타는 도로 눈을 감고 연주를 마저 했다.

"짜잔, 여러분 안녕! 미도리티비야! 지금 공원에 나왔는데 연주가 들리지 뭐야? 그래서 들렀지! 사람이 꽤 있네?"

낯익은 목소리에 안구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셀카봉이라고 하나, 기다란 봉 끝에 휴대폰을 매달고 혼잣말을 하고있는 은발의 인형. 자주 보던 전술조끼와 슈트를 입은 모습이 아니라, 가벼운 차림에 머리를 올려묶은 모습이 산뜻해 보였다. MDR. 가끔 그리폰 불만 게시판이라고 했나. 그런 사이트의 관리자라고 AK12가 불평을 하던 게 떠올랐다. 너무 야짤탄압이 심하다고. 야짤이 뭔지는 모르지만 AK12의 불평에 일단 고개를 끄덕이던 기억이 났다.

"오, 쟤 스타 아냐? 응? 나랑 같이 일하던 친구인데, 나도 쟤가 피리를 저렇게 잘 불진 몰랐네. 이쁘다고? 그야 당연하지! 아, 가슴은......."

휴대폰을 향해 우는 시늉을 한 MDR은 휴대폰을 조작해서 스타의 모습만이 촬영되게 했다. 조금 떨어진 거리였지만, 안구사의 눈엔 그게 녹화중이라는 것이 보였다. 혹은 촬영, 송출 중이거나. 아 그래. 실시간 방송을 한다거나 그런 거겠지. 스트리밍이라고 하던가. RFB라는 인형이 당직을 서다가 게임 방송을 하겠다며 프로그램을 만지던 것도 생각이 났다. 밤새 그렇게 게임을 하더니 출근한 지휘관에게 머리를 쥐어박혔지. 다 추억이다.

"곡 이름은 모르겠는데. 되게 좋다. 낭만적이고. 어? 뒤에?"

작게 혼잣말을 하며 방송을 하던 MDR은 시청자의 채팅을 확인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지런히 앉아 MDR을 희한하게 계속 쳐다보고 있던 안구사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순간 바짝 얼어붙더니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하, 하하, 방송은 이따 마저 할게. 뿅!"

휴대폰 화면을 끈 그녀는 쭈뼛쭈뼛 무표정한 안구사에게 다가오더니 푹 허리를 접으며 인사했다.

"미, 미안......."

"무엇이?"

안구사는 자신의 눈높이보다 낮게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비는 MDR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송이란 것은 지금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하는 게 아닌가? 스타의 음악이 좋으니 다른 이들도 볼 수 있게 공유한다는 취지는 썩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뜬금없이 사과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MDR은 이 살벌한 인형 앞에서 혀를 잘못 놀릴까 싶어 미리 할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글 한 번 잘못 썼다가 밤새 엠포와 AK12에게 시달렸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리폰 공식 -찐- 스타라면 모를까, 리벨리온 소대의 무표정한 살인마한테 찍히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

당연히 그 말은 안구사에게 여전히 횡설수설하는 것으로만 들렸다. 뭐라 대꾸해봐야 대화가 평행선을 달릴 것 같으니 안구사는 스타가 스피드웨건이 되었을 때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MDR은 연신 허리를 숙이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느덧 연주가 막바지에 이르렀고, 긴 호흡의 음이 끝나자 모였던 사람들은 박수를 쳐주고 제 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길거리 연주자라면 모자나 케이스로 돈을 받곤 하는데, 스타는 그런 게 없었으니 박수로 값을 대신한 것. 잔뜩 상기된 얼굴로 스타가 안구사에게 걸어왔다.

"와, 봤어? 사람이 이렇게 모였어!"

수줍어하면서도 좋아하는 기색에 안구사도 웃음이 나왔다.

"네 연주가 좋았던 모양이지. 무지한 내 귀에도 좋게 들렸다. 한 곡 더 할 건가?"

"이번엔 같이 해볼래? 너도 비올라 있잖아."

"이건 내 것이 아니라서."

"아, 넌 피아노였지. 그럼 그건....... 미안."

스타가 심각한 표정으로 바로 사과했다. 오늘따라 사과를 잦게 듣는다 생각하며 안구사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아니다. 이제 괜찮다. 합주곡은....... 나도 연습을 해볼 테니, 나중에 해보자."

"좋아. 오보에랑 피아노 합주곡은 슈만 곡이 좋은 거가 많거든. 추천해줄게."

"기대하겠다."

"그럼 점심 먹을래? 선물받은 것도 있으니, 내가 살게."

"좋다."

점심시간에 장사하는 식당은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근처에 공장이나 회사건물들이 들어있지 않는 한, 보통 간편하게 만들고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많고. 딱히 끌리는 게 없이 공원을 돌아다니던 둘은 샌드위치를 하나씩 포장해서 벤치에서 먹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네 연주를 MDR이 촬영하고 있었는데."

"으응?"

한 입 크게 베어물던 스타에게 안구사의 그런 일이 있더라, 하는 투의 말이 담담히 들려왔다.

"실시간 방송이었던 모양이다. 시청자들과 네 오보에 소리가 좋다고 칭찬하더군."

"아니 뭐 칭찬까지....... "

"그러다 나랑 눈이 마주치고 사과를 하던데."

"왜? 걔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모르겠다."

"음. 왜 그랬을까."

둘은 다시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아삭한 야채와 익힌 고기가 꽤 잘 어울렸다. 빵이 조금 질겼지만 그정도야 뭐. 별 불평없이 그것을 씹어삼키고 레몬에이드로 입가심을 한 스타가 중얼거렸다.

"방송이라. 음악방송 같은 것 한 번 해볼까?"

"내가 그런 방송은 본 적이 없지만, 클래식 음악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느낌은 아니라는 건 안다."

"그거야 다른 곡을 연습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하고 싶다면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캠이랑 컴퓨터부터 사야겠네."

컴퓨터 견적을 짜며 인상을 쓰기 시작하는 스타. 안구사는 물끄러미 그녀를 돌아보다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다."

"뭔데."

"우리는 인형이지 않은가. 연습을 하지 않아도 곡을 연주하고 싶다면 다운받아서 재생시키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직접 연습하고, 연주하는 의미가 있는가?"

"...그거 좀 어려운데."

스타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키는 대로, 만들어진 대로 살아왔잖아."

"그랬지. 처음 악기를 잡은 것도 명령에 의해서였고."

"싸우는 것도 프로그래밍된 대로 훈련하고, 그걸 실전에 대입하는 거였고. 근데 이건 아니더라. 네 말대로 연주모듈을 달거나 어디서 다운받아서 실행하면 그만이긴 한데, 직접 연습해서 손에 익히고 곡을 완주했을 때는 정말 즐겁더라고."

"그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인가?"

"응. 계기가 어찌됐든, 지금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맞아."

빵 부스러기를 비둘기들에게 던져주고 쓰레기통에 포장지를 버렸다. 둘은 그렇게 가만히 벤치에 앉아 있다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다 먹었지? 그럼 갈까?"

"...그러지."

"그러고보니 너 폰 없냐?"

"안젤리아에게 받긴 했다."

"친구끼리 전화번호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번호 알려줘."

휴대폰을 꺼내든 스타에게 안구사는 숫자를 불렀다. 빠르게 자판 위를 움직이는 스타의 손가락을 보다보니 그 사이로 열쇠고리가 보였다. 엠포를 캐리커쳐한 2등신 인형이 귀엽게 흔들렸다. 안구사의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저장해놔. 전화 걸어놨어."

"알았다."

"다음엔 막 아침부터 쳐들어오지 말고....... 다 퍼질러서 자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냐."

"유의하겠다."

"그럼....... 재밌었어. 또 보자."

"그래."

선물받은 오보에 케이스를 끌어안고 집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는 스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안구사는 자신의 집으로 몸을 돌렸다. 서툰 손놀림으로 휴대폰을 조작해 스타의 번호를 저장했다. 어디 컴퓨터라도 구해, 혹은 안젤리아에게 부탁해 이런 일상생활에 편리한 기능들을 다운받으면 익숙하게 할 수 있겠지만.

스타의 말대로 직접 연습하는 과정이란 것이 궁금했다. 불편함을 감수할 정도로 그것들이 소중한 것인가. 연습에 따라오는 결과에 대한 성취감? 지령이 떨어지면 목적을 완수하기까지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던 리벨리온 소대였기에, 그런 개념은 생소했다.

집으로 가는동안 휴대폰의 기능을 이것저것 조작해보고, 기능성 어플도 몇 개 깔아보았다. 아예 기계치는 아니었는지 그새 그래도 조금 익숙해진 손놀림이었다.

걸어서 도착한 집. 다시 혼자라는 생각에 안구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바깥보다 분명 실내였기에 따뜻해야 하건만, 차갑게 느껴지는 저택 안 공기에 안구사는 온풍기부터 틀었다. 이전의 집주인이 중세에 대한 환상이라도 있었는지 벽난로가 있긴 했지만, 땔감도 없을 뿐더러 그것을 때울 생각도 없다. 가격대비 효율도,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좋지 않았다.

"너희는 총을 반납하지 않았군. UMP45."

안구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지도 않고 비올라를 정리했다. 그 말에 한쪽 벽에 기대어 서 있던 회갈색 머리의 소녀가 낮게 웃었다. 흉터가 난 왼쪽 눈은 감은 채로.

"감은 여전하네. 어떻게 알았어?"

"총구가 보였다. UMP9은 소음기를 쓰지 않았으니 너겠지."

"어머나. 내 위장실력이 녹슬었구나."

작정하고 숨었다면 보이게 있지도 않았겠지. 종종 안젤리아의 의뢰를 받고 같이 일하던 404소대의 리더, UMP45는 안구사가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모습과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의수로 대체했던 오른팔은 다시 인간과 외견상 다를 바가 없었고, 머리에 달고 있었던 전자전 모듈이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떼버린 건 아닐테지. 소체를 업그레이드하고 내장형으로, 혹은 향상된 마인드맵에 기능을 탑재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정보들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안구사는 무표정한 눈으로 비올라를 바라보며 덤덤히 말했다.

"누가 날 없애 입막음하라고 시키던가?"

"흐-음. 너희가 가진 극비가 있다고 해도, 굳이 인형을 제거하는 데 돈을 쓰는 멍청이가 있을까?"

"안젤리아를 흔들기 위한 수단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래야 한다면, 주변이 더러워지지 않게 깔끔하게 부탁한다. 어차피 난 복구할 마인드맵이 있으니, 그 행위도 시위에 불과하겠지."

안구사의 전혀 동요없는 모습에 UMP45는 찡그린 웃음을 지었다.

"너야 네 목숨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네 친구들도 그럴까? 가슴아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수복이 불가능한 전술인형의 마인드맵을 복원한다는 건 전장에 투입할 인원을 마련하는 것과 동시에 남겨진 자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 멈추기 마련이고, 나는 어떤 위치에서든 내 역할을 할 뿐이다."

UMP45는 결국 주춤하며 총을 잡지 않은채로 두 손을 들었다.

"하여간 너는 아직도 매사에 진지하구나. 내 의뢰인이 부탁한 건, 네가 잘 지내나 확인해달라는 것 정도였어."

"아. 그쪽인가. 지휘관이었군."

"하하, 알잖아. 의뢰인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못 한다는 거."

인간 용병대신 전술인형들로 차린 사립 군사기업, 그리폰. 안전한 도시를 제외한 그 바깥지역들은 아직도 몸에 영 좋지 않은 붕괴액에 감염된 생물체들 때문에 위험했고, 또 그 외에 테러의 위험들도 존재했기에 여러 PMC들 중 인형을 인간 대신 기용한 그리폰이 꽤 성장했었다. 한동안 불었던 전란의 바람에 안젤리아도 그곳의 한 지휘관과 긴밀히 합작을 했고, 리벨리온 소대도 그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고, 함께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안구사에게 있어서 그 지휘관과 같이 작전에 투입되었던 인형들은 모두 전우였다. 퇴역하고 어떻게 지내나 궁금할 수도 있다는 것도 이해했다.

"보다시피 잘 지낸다. 대접할 게 마땅하지가 않군. 안젤리아가 가져온 맥주가 있긴 한데, 그거라도 마실 텐가?"

"아....... 난 일하는 중에 술을 마시진 않아서."

안구사의 맞은편에 앉아 지긋이 눈을 맞추려드는 UMP45.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안구사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악기를 수집하는 거야?"

"취미를 가져보려고 하는 거다. 스타가 오보에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일어서."

"취-미 말이지. 긍정적인 일이네에."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눈을 길게 찢어 웃는 모양새가 꼭 여우를 보는 듯 했다. 여전한 무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안구사는 변함없는 태도로 물었다.

"목적없이 계속 지켜보는 것이라면 조금 껄끄럽다. 더 볼 일이 없다면 가줬으면 좋겠군."

"어머머, 축객령이라니. 사실 겸사겸사 부탁할 것도 있고 해서 온 건데 말이야."

"부탁? 난 이제 전술인형이 아니다. ASST도 제거하고, 총기도 반납했지. 작전을 도와달라는 거라면 민간인만큼이나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해두겠다."

"그런 게 아니라....... 보다시피 우리는 아직 은퇴하지 않았잖아? 블랙옵스는 어느 때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무슨 반응이라도 기대한건지 UMP45는 잠시 말을 끊었다. 하지만 긍정도, 별다른 이견도 없이 예의 그 무표정함을 유지하는 안구사의 모습에 살짝 질린 듯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너무하네. 이래서 내가 마일리의 언플을 믿을 수가 없단 거야. 이런 네 모습을 보고 누가 귀여운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속 여린 소녀라고 생각하겠어."

"용건을 얘기해라, UMP45."

"스타는 스타라고 불러줬으면서. 같이 지낸 밤만 몇 날인데 사오라고 불러주지 않을래?"

"너도 이름에 신경을 쓰는 쪽인가보군. 그렇게 불러주도록 하겠다. 그래서 용건은?"

여전히 딱딱했다. 하지만 그게 벽을 세우거나 적대감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항상 그래왔듯이 평상시의 태도란 것을 아는 사오는 긴밀히 몸을 안구사에게 기울이며 요청했다.

"방 두 개만 주라. 우리도 마음놓고 쉴 곳이 필요하거든. 위장 신분도 필요하고."

"내 명의의 집이긴 하지만, 혼자 지내는 것이 아니다. 안젤리아도 종종 올 것이고."

"안젤리아는 괜찮다 했어."

"그렇다면 상관없다."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안구사의 모습에 사오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기다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이 없자 조금 휘청하는 모습이었다.

"집세는?"

"안젤리아에게 물어봐라."

"...엄마랑 아빠한테 뭔갈 물어보는 느낌이란 게 이런 거구나. 엄마한테 물어보면 아빠한테 가라고 하고, 그래서 아빠한테 물어보면 엄마한테 가라고 하지."

"나한테 물어봐봐야....... 나도 이런 거래는 잘 모를 뿐더러, 애당초 내가 돈을 주고 산 집도 아니고, 안젤리아가 괜찮다 했으면 나에겐 그걸로 충분하다."

"절대 에누리는 없다는 거구나. 알겠어, 흥국이랑 시세 알아보고 제 값을 치루도록 할게."

제멋대로 곡해해서 비꼬는 사오의 모습에 안구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든지 말던지. 사오가 배배 꼬이고 뒤틀린 심성을 가졌다는 건 익히 알고있는 사실이었기에 안구사는 용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오에게 굳이 오해를 풀어주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럼 저녁에 돌아오겠어, 집주인님."

"난 네 상사가 아니니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다."

"한 마디도 안지지, 정말. 지휘관도 너처럼 차갑진 않을 거야."

비꼬면서도 음침한 미소를 잃지 않은 걸 보면 썩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닌 모양.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사오의 뒷모습을 보며 안구사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언제나 교묘하게 목을 물어뜯으려는 뉘앙스면서도 행동은 취하지 않는 사오의 모습은 여전했다. 그래도 자신의 역린을 들쑤시지 않는 걸 보면 딴에 배려는 했던 모양. 딸깍, 비올라의 케이스를 열며 사오와 나눴던 말을 생각했다. 마인드맵 복원. 그것은 그저 남은 자들이 위안받기 위해 잃은 인형의 데이터를 부르는 것이다. 원본에 대한 배신이나 마찬가지겠지.

피아노 의자로 케이스를 옮겨놓고 지긋이 안구사는 턱을 괴고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녀만이 알 일이었다.

분명히 히오스 생각일거임 제가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