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시즌 진출이 유력해 보이던 락스 타이거즈가 진에어 그린윙스에게 패배해 포시 진출이 좌절되었습니다. 그 이유로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것이 좋지 못했던 밴픽입니다. 구체적으로 짚자면 가혹한 너프로 프로씬에선 꺼내선 안 될 카드로 추락한 칼리스타의 기용, 그리고 정규 시즌이 끝난 시점에서 돌아보았을 때 명백한 ‘함정 픽’이었던 스카너의 기용, 그것도 위풍당당한 1픽 기용이었습니다.

이번 시즌 동안 LCK에서 스카너라는 픽의 성적은 좋지 못함이 명백했고, 그럼에도 많은 프로팀들이 계속해서 스카너를 기용했습니다. 간혹 가다 몇 선수가 강한 인상을 남기며 활약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스카너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팀의 패배에 기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선수들의 평은 갈렸지만, 스카너는 높은 밴픽률만큼의 성능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말 그대로 ‘거품 픽’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오래 롤을 해 오며 스카너라는 챔피언에 많은 관심을 갖고 모스트였던 시즌도 있었던 입장에서, 현재 스카너라는 픽이 좋지 못한 이유와 그럼에도 왜 이토록 높은 밴픽률을 기록했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적어 보려고 합니다. 이런 글을 써 보는 것도 처음이고, 결코 티어가 높은 유저도 아닌지라 다소 어처구니없이 보일 문장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 낡아빠진 스킬셋

지금은 리메이크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타릭이라는 챔피언이 정말 단순함의 극치를 달리는 챔피언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타겟팅 힐, 주변 아군 버프&적방어력 디버프, 타겟팅 스턴, 주변 아군 버프. 정직하다 못해 유저의 손이 개입할 여지 자체가 없다시피 한 스킬셋 덕에 타릭은 누가 잡더라도 안정적인 플레이가 가능한 픽, 동시에 매드라이프 선수의 말마따나 ‘고수가 잡으나 초보가 잡으나 성능에 차이가 없는 픽’으로 취급받았습니다.

피지컬을 타지 않으며 스킬이 직관적이라는 건 장점도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상황에서 스킬샷을 실수할 여지가 적고, 소위 1인분을 하기 위해 요구되는 숙련도가 적기에 적은 연습량으로도 실전에 쓸 수 있으며, 롤이라는 게임에서 사실상 유저 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저티어 유저’들도 충분히 사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좀 더 높은 수준의 게임을 추구할수록 이런 챔피언들은 외면받기 마련입니다. 유저의 손이 아무리 빠르고 정확하더라도, 판단력이 아무리 날카롭더라도 스킬셋이 단순하면 그런 이점을 전혀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카너라는 챔피언은 결코 프로씬에서 기용되기 적합한 챔피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스카너의 스킬셋은 정말 단순합니다. 주변 데미지, 자기 보호막, 슬로우 겸 스턴 투사체, 타겟팅 제압. 리턴이 큰 논타겟 스킬도 없고, 이동기도 없고, 독특한 유틸기도 없고, 치밀한 계산을 요하는 스택형 스킬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로우리스크의 전형에 가까운 스킬셋입니다. 이런 스카너로 어떤 화려한 플레이가 가능할까요? 자르반의 절묘한 2, 3인 깃창도, 리 신의 신묘한 인섹킥도, 자크의 초장거리에서의 이니시 및 배달 플레이도 불가능합니다. 위에 언급한 챔피언들이 피지컬로 변수를 만들어낼 때 스카너는 주도적인 플레이라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벽을 넘을 이동기 하나 없으니 자연스레 갱킹 루트도 한정됩니다. 벽 못 넘는 정글러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디메리트를 고스란히 감수한 결과, 스카너는 초반 단계에선 나름대로 강력하다 할 만한 CC를 보유했음에도 라인 개입력이 강하지 못한 챔피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팀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누군가의 슈퍼플레이를 기대하는 상황에서 스카너가 무기력하게 휩쓸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 기대할 수 없는 딜링

스카너는 탱커로 분류되는 정글러이고, 그런 챔피언에게 딜링까지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가혹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스카너가 탱커 정글러 중에서도 유독 심각한 수준으로 딜이 안 나온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데, LCK에서의 경쟁 상대라고 할 수 있는 세주아니, 자크, 자르반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우선 세주아니는 결코 딜을 못 하는 챔피언이 아닙니다. 얼린 상대에게 상당한 최대체력 퍼뎀을 꽂을 수 있고, W엔 최대체력 퍼뎀이 달려 있어 탱템을 살수록 어느 정도의 딜이 확보됩니다. 자크 역시 딜링 자체를 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Q와 W에 체력 퍼뎀이 붙어 있어 딜템 없이도 최소한의 딜량 확보가 가능합니다. 자르반이야 애초에 공템을 사는 선택지가 있거니와, 만약 잿불거인을 위시한 탱커 트리를 타더라도 패시브의 체력 퍼뎀과 Q의 방깎이 있어 그런대로 딜이 나옵니다.

이 점에서 위 챔피언들과 스카너의 차이점이 명백해집니다. 스카너에게 딜링기라곤 좁디좁은 범위의 Q뿐인데, 이 Q에는 탱템만 올리더라도 최소한의 딜을 보장해줄만한 퍼뎀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마스터를 해도 데미지가 0.9 AD에 불과한지라 평타 한 대 치는 것보다 약합니다. 물론 평타를 치면 쿨타임이 감소되는 옵션이 있어 계속해서 쓸 수 있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다 해도 도저히 딜템 하나 없이 딜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초반에야 기본 스펙이 좋고 첨탑 위에서의 깡버프가 워낙 커 싸움에서 밀리지는 않지만, 중후반에 접어들면 스카너의 딜링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차라리 빠듯하게라도 트포를 올린다면 나름대로 위협적인 딜링이 가능하겠지만, LCK에서 등장한 스카너가 딜템을 올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음을 보아 프로팀들 역시 스카너에게 딜을 기대하는 것은 아예 포기했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때문에 스카너는 이기는 게임에서도 딜량은 압도적인 꼴찌인 경우가 많고, 지는 게임에선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지경입니다. 15년도 롤드컵에서 카카오가 스카너로 기록했던 딜량 888이 사실상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궁극기에 압도적으로 쏠린 존재감

꿰뚫기는 두말할 필요 없이 매우 좋은 스킬입니다. 수은 외엔 대항할 방법이 전무한 제압을 1.75초 동안 걸고, 심지어 상대를 끌고 다닐 수도 있는 스킬이 위협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스카너가 안 좋을까요? 간단합니다. 궁극기 외에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스킬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Q는 위에서 언급했듯 정글링과 초반 호신용 이상의 가치가 없습니다. W는 이속이 달린 보호막으로, 장기전에서 생존력을 더해줄 수는 있으나 마찬가지로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습니다. E는 판정이 그렇게 후한 것도 아닌 논타겟 투사체 주제에 추가로 평타까지 쳐 줘야 1.25초의 스턴을 거는 번거롭기 짝이 없는 스킬로, 이동기가 있는 상대라면 사실상 효과를 보는 게 불가능합니다. 하나같이 단독으로는 볼품없기 짝이 없는 스킬들입니다. 때문에 스카너는 좋은 성능의 궁극기 단 하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챔피언이 아니라 슈퍼 미니언이라고 해도 좋을 수준이니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이 궁극기가 써먹기 편한 물건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사거리가 평타보다 살짝 긴 수준이라 바짝 붙어서 써야 하는데, 스카너는 이동기 하나 없는 하드 뚜벅이 챔피언입니다. W에 이속이 붙었다고는 하나 이거 하나로 붙을 만큼 상대 딜러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멸이나 포식자, 정당한 영광 등이 있어야 비로소 좀 써먹을 수 있게 되는데, 스펠이나 아이템 없이 단독으로는 거의 제 값을 못 한다는 시점에서 스카너 궁의 강력함은 이미 반쯤 유명무실해지고 맙니다.

설사 상대를 물 조건이 갖춰져도 끝난 게 아닙니다. 탐 켄치, 갱플랭크, 올라프, 모르가나는 LCK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픽인 동시에 스카너 궁을 완벽하게 카운터칠 수 있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피오라나 자크 같은 챔피언도 피지컬에 따라 궁 흡수가 가능하고(실제로 최근 LCK 경기에서 자크가 스카너 궁을 맞궁으로 흡수하는 장면이 두어 번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류 픽은 아니지만 칼리스타, 시비르, 녹턴 같은 챔피언들도 스카너를 엿먹일 수 있습니다. 이런 챔피언들이 얼마나 포진되어 있냐에 따라 궁을 활용할 여지가 아예 사라지는 셈이니, 궁이 챔피언의 전부인 스카너로서는 사실상 카운터 한 명마다 기여도가 0.2인분씩 깎여나간다고 봐도 무리가 아닙니다.

궁 못 쓰는 스카너의 무력함은 정말 처참한 수준인데, 다시 한 번 경쟁자들과 비교해보자면, 세주아니는 궁이 없어도 일단 교전을 붙으면 시간차 스택형 스턴 & 에어본 돌진 & 짠딜과 함께 들어가는 슬로우로 충분히 기여가 가능합니다. 자크 역시 궁극기가 없더라도 Q와 E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변수는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그럼 궁 없는 스카너는 대체 뭘 할까요? 대치하면서 처량하게 E나 쏘다가 CC기 맞고 점사당해 죽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현자타임이 극심한데, 하물며 거의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점멸이나 포식자 등의 쿨타임까지 생각하면 체감되는 시간은 훨씬 길게 느껴집니다.


4. 너무나 짧은 강한 타이밍

상당히 뭉뚱그린 분류지만, 롤에는 초반에 강한 챔피언, 중반에 강한 챔피언, 후반에 강한 챔피언이 있습니다. 게임 초중반에 모두 무난한 챔피언은 대세 픽이라고 불리고, 초중반에 모두 강한 챔피언은 OP라고 불립니다. 그럼 스카너는 언제 강한 픽일까요? 굳이 꼽자면 스카너는 중반에 강한 챔피언입니다.

초반엔 궁극기가 없으니 딱히 할 게 없습니다. 돌진기도 없고 CC도 조건부 스턴뿐인 스카너로서는 슬슬 정글이나 돌면서 6레벨을 노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물론 라이너 상성에 따라 갱을 갈 수도 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만큼 궁 타이밍이 늦어지므로 위험부담이 큽니다.
궁을 찍고 중반으로 넘어가면 비로소 챔피언의 가치가 살아납니다. 갱각이 나오는 라인을 잘 찌르면 보통은 필킬이 나고, 점멸 궁으로 기습 이니시를 걸어 타워나 오브젝트를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스카너는 이 타이밍에 최대한 많은 이득을 보면서 스노우볼을 굴려야만 하는 픽입니다. 궁극기가 상대 팀에게 언제 끌려가서 죽을지 모른다는 심대한 위협을 줄 수 있는 이 타이밍에 말이죠.
만약 그 중반을 흐지부지 넘겼다면, 그 땐 사실상 가망이 사라집니다. 상대 딜러들이 수은을 사기 시작합니다. 스카너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소식입니다.

기본적으로 점멸은 물론이고 생존기가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다 수은까지 구매한 딜러들을 스카너가 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결국 남는 건 굳이 수은을 안사도 되는 몸 튼튼한 탱커나 서포터뿐입니다. 만약 대치 중 운 좋게 적 탱커를 물어왔을 때 단숨에 녹이거나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 정도로 팀이 성장하지 못했다면 그 시점에서 스카너의 존재가치는 급격히 추락합니다. 대회에서 중반 타이밍 이후 많은 스카너들이 무리하게라도 적 세주나 오른 따위를 끌어오는 것은 선수들이 바보라서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탱커 전장이탈이라도 노려보자, 그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초반에도 존재감이 없고, 후반에는 아예 미니언이 되어 버리는 데 반해 강한 타이밍은 너무나도 짧습니다. 궁을 배운 이후부터 상대 딜러가 수은을 사기 전까지. 그 구간이 스카너가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구간입니다. 물론 수은을 강제하는 건 골드 면에서의 이득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챔피언 하나를 반 불구로 만들어놓는 데 1300원이면 그렇게까지 비싼 가격이 아니기도 합니다. 수은 구매 강제라는 효과가 가져오는 이득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그 판의 챔피언 구성이나 우/열세 구도에 따라 다르겠으나 저로선 크게 유리한 상황이 아닌 이상 스카너 쪽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5. 격심한 아군 의존도

스카너는 제 값을 하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합니다. 궁을 배우기 전까지 라인이 터지지 않을 것. 상대를 끌어왔을 때 누킹으로 삭제가 가능한 조합, 또는 그럴 수 있는 성장세를 갖출 것. 딜 기여가 불가능한 정글러를 대신해 그만큼 딜을 넣어줄 챔피언들이 포진해 있을 것.

우선 라인이 터지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가장 큽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초반에 스카너의 라인 개입 능력은 그렇게 좋은 축이 아니고, 강한 호응이 가능한 라이너와 시야 허점을 정확히 잡은 갱각을 필요로 합니다. 더군다나 궁이 찍히는 6레벨을 달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챔피언이기에 자연스레 성장에 집중하게 되는데, 만약 상대 정글러가 초반에 강한 픽이라면 라이너의 부담이 상당히 커지게 됩니다. 상대 정글의 동선을 읽을 수 있어 제때 커버가 가능하다면 2:2 전투력 자체는 괜찮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가정입니다.

만약 초반 정글 싸움에서 밀려 주도권을 내주게 되면 그 때부터 게임이 급격히 힘들어집니다. 용과 바론 근처의 첨탑을 먹기 어려워지니 기동력이 크게 죽게 되고, 전적으로 아군의 딜에 의존하다보니 성장 격차가 벌어진 라인에 궁을 배워 갱을 가더라도 역관광이 날 확률이 높아집니다. 갱킹 루트도 정직하게밖에 갈 수 없어 주도권을 잡은 상대에게 읽히기 쉽습니다. 자연스레 게임의 판도가 불리해지고, 점점 성장차가 벌어지는 와중에 최악의 경우 상대 딜러를 운 좋게 물어도 순삭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사실상 스카너의 수명이 끝나는 순간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정글링이 빠르고 안정적인 축이며, 첨탑이 활성화만 되어 있다면 기동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유저의 역량에 따라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챔피언 자체의 한계가 뚜렷한 탓에 일단 밀리기 시작하면 극복이 매우 어렵다는 점 역시 사실입니다. 또한 노딜 조합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아군에게 어느 정도 픽 범위를 강제하는 경향이 있어 힘든 라인전 구도가 형성되는 데 은근히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6. 그럼에도 쓰는 이유

여기부터는 순전히 제 추측이기에 적당히 흘려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선수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한 정글러 선수가 인터뷰에서 스카너 기용 이유에 대해 ‘첨탑 이속 버프 덕분에 전투 합류가 빠르기 때문’이라고 밝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첨탑을 부담 없이 점령할 수 있는 구도에서라면, 아군 정글과 용, 바론 앞 지역을 빠르게 가로지를 수 있는 스카너는 분명 맵을 횡단하는 능력에서는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용이나 전령 등을 시도할 때도 첨탑 버프에 힘입어 상당히 안정적으로 해낼 수 있으며, 정글링 역시 빠르고 안정적인데다 마나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본 스탯 역시 좋은 편이기 때문에, LCK 해설에서 자주 언급하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정글을 도는 데에는 확실히 일가견이 있는 픽입니다.

위에서는 단점을 수두룩하게 언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기는 큰 변수를 만들어내는 스킬이기도 합니다. 게임 판도나 챔피언 조합에 따라서 상대가 수은을 사는 타이밍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고, ‘확실하게 물 수 있으며’ ‘물었을 때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조건이라면 스카너도 가치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스카너가 프로 게임에서 그토록 높은 밴픽률을 기록한 이유는 ‘압박감’ 때문이라고 봅니다. 스카너는 틈을 봐서 상대를 순식간에 납치해 삭제해 버리는 그 특유의 플레이 스타일 탓에 상대 팀에게 ‘빈틈을 보이면 안 된다, 삐끗하면 끌려가서 죽는다’는 부담을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항상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계산하며 플레이하는 선수들에게 ‘자칫하면 저항도 못 하고 죽을 수 있는’ 스카너가 갖는 변수는 확실한 부담으로서 작용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설령 그 변수가 실제 상황에서는 빡빡한 조건을 통과해야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살려 두면 뒷맛이 안 좋으니 일단 밴하자 / 가져오자’는 결정을 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실제로 원딜 캐리 조합을 구성하는 경우 상대 팀에 스카너가 있다면 원딜로서는 자기가 물리면 끝이라는 중압감 + 수은을 반드시 가야만 한다는 짜증스러움을 겪게 되는데, 그런 부담을 지우지 않을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스카너를 밴하거나 가져오는 것입니다.

상대 팀에게 수은을 강요한다는 점 역시 세세한 이득과 손해도 중요한 스노우볼이 될 수 있는 프로씬에서 더욱 주목받을 수 있는 강점인데, 1300골드인 수은 장식띠를 미드와 원딜 두 명이 구매한다고 하면 글로벌 골드에서 2600의 이득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까지 큰 수치는 아니나, 적어도 딜러진의 코어템 완성을 확실하게 늦출 수 있음은 명백합니다. 일단 픽을 가져오기만 하면 거의 무조건 골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점, 그에 더해 수은을 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상대 선수들의 멘탈 면에서의 거북함, 어쩌면 불쾌함까지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스카너라는 픽이 인기를 구가한 이유는 분명 존재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밖에 딱히 밴픽에 오를 정글러가 없었다는 점도 있었습니다. 이번 시즌에서는 기본적으로 세주아니, 자크가 탱정글로 투탑을 차지하고 올라프, 자르반, 카밀, 니달리 등이 팀 성향이나 조합에 따라 그때그때 기용되는 형태로 흘러갔다고 볼 수 있는데, 세주와 자크를 제외한 다른 픽들은 특정 선수 저격이 아닌 이상 굳이 밴 리스트에 올라갈 정도로 위협적이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밴 카드가 어느 정도 남는 상황에서 '귀찮은 변수'로 취급받았던 스카너를 일단 자르거나 가져오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특히 안정적인 게임 운영을 선호하는 팀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상대가 가져가면 껄끄러운 변수가 될 챔피언이고, 일단 우리가 잡으면 '실수해서 망할' 가능성은 적은 픽이 바로 스카너였으니까요.

하지만 스카너의 이런 장점들이 잘 먹혀들어 승리를 거둔 경기보다는 단점이 크게 부각되어 패배한 경기가 훨씬 많았던 것이 이번 시즌 LCK의 현실인 만큼, 적어도 거품 픽이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었던 스카너가 갖는 정확한 가치에 대해서는 재차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 시점에서 포스트 시즌, 나아가 섬머 시즌에까지 스카너가 계속해서 등장할지는 미지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