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읽어 보는 붓다의 랩 강의 내용 공유

(조금 긴 글이지만 괜찮은 내용이에요)


스스로 괴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내용을 전합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이중표 교수님의 강의를 가장 많이 참고한 내용입니다. 법륜스님 강의, 법정스님 책, 동국역경원 불교성전에서도 참고한 내용이 있습니다)




괴로움. 부처가 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는 2500년 전의 사람이지만, 말하신 내용을 보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놀라움을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괴로움은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괴로움의 원인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몰라서 괴롭다는 이야기는 알면 괴롭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부분이 다소 놀랍게 생각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나이도 어느 정도 있고 뉴스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었는데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어서 괴롭다고? 
그 이야기는 책을 더 많이 읽고 백과사전을 많이 외우라는 뜻인가?
그러나 부처님은 지식이 부족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몰라서 괴로운 것인가.

우리는 '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나'에 대해서 생각도 많이 합니다. 자아라는 말도 많이 사용하고 자기정체성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만 '나'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첫째로 우리가 잘 모르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컵, 옷, 비, 꽃 등 우리가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의 진면목도 잘 알지 못합니다.

사실은 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야 부처님이 전하고자 했던 내용을 잘 나타낼 수 있지만 불교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최대한 쉬운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말은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듣는 사람들을 어렵게 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 누구나 주의깊게 잘 들으면 깨우칠 수 있게 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나', '세상' 이 두가지를 정확하게 밝히고 부처님이 왜 자비(love power)롭게 살라고 하신 것인지. 그리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의 문제도 정리하겠습니다.





'나'의 문제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부처라는 사람이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는지, 왜 진리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간 것인지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부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는 요즘 말로 하면 금수저입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부족한 것 없이 자랐습니다. 맛있는 것,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살았습니다. 미녀도 주변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가 되기 전(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고타마(부처의 본명. 한문으로는 구담이라고도 부릅니다)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고타마의 모친은 고타마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셨습니다. 다른 원인들도 있지만 모친의 죽음이 고타마가 죽음에 대해 생각을 깊게 하게 된 주 원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타마가 보기에 사람은 어차피 죽습니다. 그런데 그 사는 과정이 순탄한 것도 아니고 저마다 살기 위해 고생을 많이 하고 서로 죽여가는 일을 하면서까지 괴롭게 살다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타마는 삶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문제는 거의 모든 사람이 한번 정도는 깊게 생각해보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고타마는 그것을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진리를 밝혀내어 진리를 알아낸다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결국에는 집을 나가 진리탐구의 길을 나서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이 영원히 산다는 의미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타마는 부처가 된 이후 자신은 죽음을 극복했고 그 길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뒷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고타마가 쾌락주의를 벗어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궁전에 있던 시기의 고타마는 쾌락과 욕망에 빠져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쾌락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쾌락이 차이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맛있는 음식을 거의 먹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조금만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크게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음식에 익숙해지면 이제 더 맛있고 비싼 음식을 먹지 않으면 이전만큼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즉 점점 강한 자극이 주어져야 처음 느낀 것만큼의 즐거움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비용도 많이 나가게 되며 즐거움도 얻기 어려울 뿐 아니라, 몸을 상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술 담배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공허감도 고타마를 괴롭혔습니다. 쾌락을 누린 뒤 찾아오는 크나큰 공허감과 죽음이라는 해결이 안되는 고민은 결국 고타마가 쾌락주의를 떠날 결심을 하게 합니다.




집을 나간 후 진리 탐구를 위해 스승들을 찾아다니던 고타마는 다양한 스승들을 만나서 배운 후, 고행주의자들을 찾아가 심한 고행을 합니다. 고행주의는 쾌락주의의 정반대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몸을 괴롭혀야 진리를 알 수 있고 영혼에 다가갈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극심한 고행을 한 고타마는 고행주의는 의미없이 몸만 상하게 할 뿐 진리를 알고행복해지는 길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쾌락주의와 고행주의가 모두 답이 아님을 알게 된 고타마는 고행주의자들을 떠나 마지막으로 답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고 결국 진실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평생을 스스로 깨달은 내용을 전파하는 데 힘썼고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이어가 불교가 형성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게 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부처님에 대한 오해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부처를 초능력자처럼 생각합니다. 지옥도 훤히 볼 수 있고, 전생 미래까지 볼 수 있는 그런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초능력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옥이나 천당, 이승과 저승을 있다고 말하는 분도 아닙니다.
분명히 해야만 하는 것이 부처님은 영혼이나 천국 지옥 이승 저승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승이나 저승을 부처님이 인정하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했다면 우리는 이제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초능력을 기르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기가 하는 이야기는 누구나 정확히 알고 보면 끝나는 내용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결코 환상적인 세계를 우리에게 말하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자꾸 하니까 삶이 괴로워진다. 즉 우리는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것을 실제로 있다고 믿어서 괴로움을 당한다고 하신 분이 부처라는 분입니다.

즉 부처라는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내가 체험할 수 있는 것만 있는 그대로 말하자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이 '나'라는 문제에 접근했을 때 먼저 영혼은 배제됩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몸 속에 영혼이라는 것이 들어 있고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해부하는 의학 교수님들은 몸 속에는피, 뼈, 내장, 근육, 지방, 장기 등이 있고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스스로의 몸 내부를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구글 이미지 검색을 통해 몸속이 어떤 모습인지 찾아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실제로 사람 몸 속에 영혼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영혼이 있지만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에요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상상의 존재를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이 괴로움으로 우리를 이끄는 원인이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부처님은 철저하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것을 진리의 근거로 삼자고 한 분입니다.
눈 앞에 수박이 있다고 합시다. 그 수박을 보고 잘라서 먹고, 그 후 수박이 없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 것은 의견이 갈리지도 않습니다.
수박이 있다 하고 끝이 납니다.
부처님이 찾고자 하는 진리도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부처가 보기에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자아가 내 안에 들어있고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 속에는 자아라는 것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뇌를 해부해 보아도 그 안에서 자아라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가끔은 이름을 나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의 이름을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름은 개명할 수도 있습니다. 개명을 한다고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내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제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에서 '나'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언어를 살펴보았더니 '나'가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가지나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번째는 몸입니다.
"내가 오늘 열이 좀 있어." "나는 오늘 선생님에게 매를 맞았어."
여기서의 '나'는 몸을 말합니다.

두번째의 나는 감정을 느끼는 나입니다. 
"나는 오늘 기분이 좋아.", "신문기사를 읽고 나니 나는 슬픈 기분이 들어."
이는 감정을 느끼는 나입니다.

세번째는 생각을 하는 나입니다. 
이사를 하려고 합니다. 방들 여러개를 둘러보고 방의 가격과 위치 그 방에서 받은 느낀점 등을 바탕으로 어느 곳으로 갈지를 정하는 것이 생각하는 나입니다.

네번째는 의지와 의욕을 지니는 나입니다.
"나는 꼭 살을 뺄거야." "나는 오늘 꼭 이 드라마를 다 보겠어" "나는 게임방을 가고 싶다"라고 의지와 의욕을 드러내는 나입니다.

다섯번째는 사물을 의식해서 인식하는 나입니다. "이것은 꽃이야." "이것은 나의 몸이야." "이것은 옷이야." 하고 대상을 인식하는 나의 의식. 이것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감정(느낌)
생각
의지
의식(무엇은 무엇이다.라고 구분지어서 알아
차리는 일)

이렇게 다섯 개의 '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몸이다. 혹은, '나'는 영혼 혹은 정신으로서 몸 안에 들어 있고, 그 정신이 감정,생각,의지,의식을 한다.

먼저 몸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착각은 나의 몸이 주변 환경과는 관계없이 따로 튼튼하게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헬스를 좋아하는 분들은 거울 속에 비치는 스스로의 근육을 보며 내 몸이 이렇게 튼튼하고 듬직하구나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의 실상은 주변 환경과 조건에 크게 의지하고 있으며, 한순간도 쉬지 않고 흘러가 고 있습니다(계속해서 흘러서 사라지고 있음을 '무상'이라고 합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처음에는 살이 빠지고, 몸무게가 줄고, 나중에는 죽게 되어 몸은 흩어지게 됩니다. 내 몸은 섭취한 음식물들이 잠시 모여있는 것일 뿐입니다.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물이나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더욱 빠르게 몸은 죽어 흩어져 버립니다.
즉, 몸은 몸 밖에 있는 공기, 물, 음식물들이 꾸준히 들어와야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한번 들어온 물이나 공기 음식물은 나가줘야 합니다.
기온, 바람, 땅의 상태, 공기압 또한 사람 몸에 크게 영향을 줍니다. 밥을 먹을 수 있더라도 너무 덥거나, 바람이 너무 세게 불거나, 땅이 흐물거리는 땅이거나, 공기압이 너무 높거나 하면 몸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먹는 음식물은 식물이나 육류입니다. 식물은 땅에서 햇빛과 물을 통해 자라나고, 육류를 제공하는 동물들 또한 식물을 먹고 자랍니다. 즉 우리가 몸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완전하게 바깥 세상과 하나인 것입니다. 흙, 햇빛, 물, 공기 등이 내 몸을 만들고 있습니다. 만약 몸이 세상과 구분되고 단절된다면 몸은 금방 죽어서 흩어지게 됩니다. 몸이 나라고 생각한다면 몸은 눈에 보이는 햇빛 공기(느낄수있는) 물 흙과 같고,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햇빛 공기 물 흙이므로 세상 모든 것이 내가 됩니다. 나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말은 구분을 위한 단어입니다. 나와 너, 나와 세상, 나와 나의 강아지, 나와 나무 이런 식으로 구분짓기 위해 '나'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나'가 몸이라면 몸과 세상은 하나이므로, 사실 하나인 것을 구분짓고 있는 셈이 됩니다.

몸이 '나'라고 하면 이상한 점이 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병이 나기 전까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몸이 '나'인데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자신의 몸의 내부가 어떤 모습인지 잘 모릅니다. 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평생 모르고 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심장은 몸의 일부로서 열심히 몸 전체로 피를 펌프질 해서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내가 그것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팔 다리 몸통 목은 움직일 수 있지만, 내장을 움직이거나 혈관을 움직이거나 할 수 없습니다. 밥을 먹고 소화하다가 "위야 소화 그만해라"한다고 위가 소화를 멈추지 않습니다. 심장에게 "이제 그만 멈춰라"한다고 심장이 멈추지 않습니다. 음식을 잘못 먹고 배탈이 났는데 "이제 그만 뚝 그쳐라"한다고 괜찮아지지 않습니다.
몸을 '나'라고 한다면 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이 없어도 나는 있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나'는 몸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몸이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감정, 생각, 의지, 의식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분이 좋은 나, 생각을 골똘히 하는 나, 빨리 집에 가서 게임하고 싶은 나, 참새를 보고 참새구나 하고 아는 의식을 지닌 나. 이러한
'나'를 사람들은 정신, 영혼, 자아 등으로 부르면서 그것이 몸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 안에는 장기와 뼈 피 등이 들어있을 뿐입니다. 몸 안에 들어는 있지만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생각을 할 때는 생각을 하는 '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의욕을 품을 때는 의욕을 품는 '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인식할 때 다른 것과 구분지어서 대상을 아는 '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그런 기분을 느끼는 '나'가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안 할 때는 생각하는 나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의욕을 품지 않고 있으면 그런 나는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저것은 누가 놓고 내린 핸드폰이구나 하지 않는다면 그런 인식을 하는 나는 없습니다. 기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몸 속에 정신이라는 것이 숨어 있다가, 생각을 하거나 감정을 느낄 때만 잠시 나오고 그후 다시 숨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숨어있는 정신이 몸 속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 정신이 '나'라면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에도 몸 어딘가에 얌전히 있다는 것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런 느낌은 없습니다. 아니면 그 정신이 몸 내부를 느끼고 있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 느낌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할 때는 나타나고, 아닐 때는 사라지는 '나'. 어떻게 된 것일까요?
'나'를 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장소에서 도둑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도둑이 됩니다. 도둑질을 하기 전까지는 도둑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건을 계산 안 하고 주머니에 넣고 가면 그 순간 나는 도둑이 됩니다.
엘레베이터 안에 사람들과 함께 탑니다. 그리고 안에서 점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무슨 짓이냐며 뜯어말릴 겁니다. 그때 나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점프를 하는 (정신이 이상한)사람이 됩니다.(절대로 엘레베이터 안에서 점프하면 안됩니다. 추락사 하게 됩니다)
차도에 서 있어 봅니다. 그러면 차를 탄 운전자들이 욕을 할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쳐다봅니다. 나는 차도에 서 있는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실제로 하지 마세요. 크게 다치거나 죽습니다)
길거리에 노상방뇨를 하는 경우, 그 짓을 하기 전까지는 아니지만, 하면 그 순간 길거리 노상방뇨자가 됩니다.

누군가에게 기부를 합니다. 그러면 나는 기부자입니다.
사람들에게 환경 보호에 대해 홍보를 합니다. 그러면 나는 홍보자가 됩니다.

걸으면 걷는 자이고, 생각을 하면 생각을 하는 자, 농구를 하면 농구하는 자가 됩니다. 졸면 조는 놈, 떠들면 떠드는 놈.

이렇듯 '나'라는 것은 나의 행동(업)을 통해 나타날 뿐입니다. 내가 만약에 가만히 있으면 죽어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는 누구도 나에게 너는 무엇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나의 삶(살아감)이 '나'인 것입니다(살아가려면 행동을 해야 하므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몸이 있다 해도 곧 죽어서 사라집니다. 다리가 있어도 계속 앉아만 있으면 나중에는 걷지 못하게 됩니다. 눈을 감고 
몇 달을 버티면 눈이 멀게 됩니다. 계속 눈을
뜨고 봐야 시력이 유지됩니다. 근육도 전혀 사용 안 하고 계속 누워만 있으면 결국 다 사라져서 가죽만 남아 버립니다.
살아감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나의 업(행동)이 나입니다.





지금까지 '나'에 대해 길게 적었습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세상과 사물들을 알아보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할 것을 추천드립니다.

눈을 뜨면 물건들이 보입니다. 사람들, 길거리, 자동차, 나무, 땅, 건물, 조형물, 하늘, 구름 등이 눈을 뜨면 보이는 것들입니다.
만약 눈을 감고 있어도,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 소리,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만약에 귀를 꽉 막으면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다.
라면 끓이는 냄새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코를 꽉 막고 입으로 숨쉬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맛있는 떡볶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먹지 않으면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떡볶이를 보고만 있으면 아무리 오래 봐도 맛이 나지 않습니다.
털복숭이 강아지를 쓰다듬는 느낌을 알고 싶으면 실제로 만져봐야 알 수 있습니다. 강아지를 보고만 있으면 부드러운 느낌을 알 수 없습니다.

눈을 뜨거나, 귀를 막지 않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만지거나 접촉하거나, 맛을 봐야 우리는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봐야 보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면 보이는 것들이 눈을 감아도
그대로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눈을 감는다고 방금까지 보이던 것들이 실제로 없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감는다고 이제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눈도 감고, 귀도 막고, 코도 막고, 맛도 안보고, 촉감도 다 없앴다고 이제 세상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물론 그 사람은 아무런 대상도 느끼지 못하겠지요).

다만 눈을 감은 채로는, 눈을 떠야 보이는 모습들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방에 음악이 틀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은 소리가 밖으로 전혀 새어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음악을 듣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곤충 하나도 안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게 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가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무도 그 가수의 노래를 듣지 않는다. 단 한명도. 그러면 그 사람은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가수가 될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 모든 사람이 귀머거리인 세상에서는 가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음악은, 누군가가 귀로 들어줘야만 음악이 됩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소리라 하여도 아무도 안 듣고 있었다면 그것은 소리가 아니게 됩니다.

맛은 어떨까요? 천하제일의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아무도 먹지 않지 않고 보고만 있다면, 그 요리의 맛은 없는 것입니다.
아주 맛있는 짜장면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먹지 않습니다. 그러면 짜장면의 맛은 없는 것이 됩니다. 눈으로 보고만 있어도 맛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강아지가 부드러운지는 만져봐야 압니다.

'김치찌개 냄새'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평생 축농증에 걸린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에는 냄새라는 말이 사용되지도 않고, 아무도 냄새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음악은, 그것을 듣는 귀가 있어줘야 음악이 됩니다. 소리도 마찬가지로 누군가 들어야 겨우 소리가 됩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어떨까요. 사람은 시각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눈을 뜨면 보이는 모습들이 너무 강렬해서, 그것들이 눈을 감아도 나와는 상관없이 그모습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실은, 떡볶이는 누군가 맛을 봐야 떡볶이의 맛이 나타나는 것처럼 눈을 뜨면 나타나는 것들도 눈을 뜨고 보니까, 보일 뿐입니다. 

음악은, 누군가 듣지 않으면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듣는 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눈을 뜨면 보이는 모습들도 마찬가지로 눈을 뜨고 보는 사람이나 동물 혹은 곤충 등이 있어야만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보는 이가 너무나 필요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눈을 뜨면 나타나는 모습들은 우리가 눈을 뜨니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근원을 찾으려 해서 빅뱅이론이 나왔지만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우주는 하나가 아니라 수도 없이 많다는 평행우주 이야기까지 나온 것이 현 상황입니다. 게다가 확실하게, 의문의 여지가 없이 증명된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의 시작점이 어디인가 하면, "너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만지고, 맛보는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사람들이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점은 본다, 듣는다, 피부로 느낀다, 냄새 맡는다, 맛을 본다라는 '행위'입니다. 

내가 안 봐도 세상이 있다고 하면 안됩니다. 물론 눈을 감으면 다 없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만 내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눈을 뜨면 나타나는데, 그것은 내가 눈을 뜨면 나타나고 눈을 감으면 모습을 감춘다라고 하면 됩니다.

눈을 뜨면 보이고, 감으면 모습을 감춘다.
들으면 소리가 되지만, 듣지 않으면 소리가 아니다.

눈으로 안 보고, 귀로 듣지 않고, 코로 냄새맡지도 않고, 맛도 안 보고, 만지지도 않으면 세상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세상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 보고 듣고 하는 행위 즉, 업입니다. 

세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나'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나'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나',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 행위를 통해서, 나의 살아감을 통해서 동시에,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진실입니다.

"나와 상관 없이 세상은 세상대로 있는 거야"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내가 있어야
세상이라고 불리는 것이 나타나고 세상이 있으니까 내가 있는, 이 둘은 뗄 수 없습니다. 나와 세상을 둘로 갈라서 나만 잘되면 괜찮다는 생각은 나와 세상이 둘로 갈라지지 않는다는 진실을 몰라서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살아가면, 나와 세상이 나타날 뿐입니다.


여기서,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마음은 우리가 행동(업)을 할 때 작용합니다. 물을 마시고, 눈을 뜨고 길을 걸어가고, 오늘은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는 등 모든 업에서 마음은 작동합니다. 살아가면, 마음이 그곳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만지고, 맛볼 때에도 마음은 작용합니다. 

행동, 살아감(업)을 통해서 나와 세상이 함께 나타나고 마음은 내가 업을 지을 때 작용합니다. 
또 내가 하는 행동이 내 마음을 만들기도 합니다. 
마음은 오래된 습관이 만듭니다. 계속 운동을 하면 운동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책 읽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계속 하면 그것을 하는 마음이 만들어져서 더욱 그것을 쉽게 자주 하게 됩니다.

업을 지을 때(행동을 할 때)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에, 마음을 통해 세상과 나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싶은 마음이 있으면 돈과 관련된 것들이 눈에 계속 들어옵니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면 맛있어 보이는 가게들이 자꾸 보이고 들어가서 먹어 보고 싶어집니다.
여행을 좋아하면 관련 자료들을 계속 보게 됩니다.
마음에 증오를 품고 있으면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자비심을 품으면 세상이 따뜻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통해 나의 행동이 나타나므로 세상도 나를 보고 어떤 마음을 품은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눈을 뜨면 나타나는 모습들인데, 그것은 나와 상관없이 있지 않고 나의 마음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은 같은 세상에 있는 것 같아도 저마다 다른 세상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내가 봐서 나타났고, 내가 볼 때는 내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궁금하시면, 화가 많이 나실 때 밖에서 사람들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소한 것도 거슬리게 보일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편안하고 좋을 때 밖에 나가 길거리를 보면 내가 좋은 곳에 와있는 것 같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문제가 없게 보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른 행동(업)을 쌓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행동이 습관이 되고 그것이 마음이 되어 결국 내가 사는 세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른 업이 정확히 어떠한 행동을 말하는지는 뒷부분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눈을 뜨면 보이는 물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물체들을 살펴보면서 마지막 부분이 시작되기 때문에, 잠시 휴식을 취하시고 머리를 식히는 것을 추천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죽음의 문제와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피자 냄새를 맡으면 피자 냄새가 납니다. 
아주머니들이 이야기하시는 소리를 들으면 이야기 소리가 들립니다.
라면을 먹으면 라면 맛이 납니다.
털복숭이를 개를 만지면 부드러운 느낌이 듭니다.
눈을 뜨면 눈 앞에 있는 의자가 보입니다.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의자가 있어", "가방이 있어" 이렇게 말합니다. '있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냄새를 맡으면 냄새가 '있어'라고 안 하고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소리를 들을 때 소리가 있다고 하지 않고 "소리가 들려, 소리가 나"라고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단맛이 나, 쓴맛이야, 조금 짠데"라고 하고 "쓴맛이 있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맛있다라는 표현은 맛이 괜찮다는 뜻입니다). 부드러운 털을 만질 때도 부드럽다고 하지, 부드러움이 있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눈으로 의자를 보면 "의자가 보이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게 말한 것이고, "의자가 있다"고
하면 다소 부정확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봐서 나타난 것을 있다고 하는 이유는
시각이 주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있다고 말해야 서로 이해하기가 편한 경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을 떠서 보이는 것들을 '있다'고 자꾸 말하고, 그런 말에 익숙해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하고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서로가 조건들이 되면서 쉬지 않고 변화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있다'는 생각에 익숙해져버리면 의자, 책상, 신발, 간판 같은 것들을 존재라고 부르면서, 세상은 존재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그 무엇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아주 정적으로, 움직임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10년 전에 쓰던 물건들 중 지금도 지니고 있는 물건은 많지 않을 겁니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더 심해집니다.
10년 전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20년 전의 사람들, 지금과 비교하면 달라졌을 겁니다.
10년 전 길거리에 나왔을 때 보이던 것, 20년 전 거리에 나왔을 때 보이던 것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3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더 많이 변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닌 것 같아도 사실은 쉼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상이라고 부릅니다. 
흘러가지 않으려고 해도 조건이 바뀌면 흘러가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고층건물이 들어섰습니다. 그 자리는 장사도 잘 되는 곳이라 번창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작은 이유로 그 옆 동네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하고 그쪽에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면 원래 있던 고층건물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게 됩니다. 한풀 꺾이고, 시간이 지나면 쇠락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조건이 되어 영향을 주면서 같이 흐르고 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면, 의자라는 말은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의자를 만들고 그 다음 "이거는 의자라고 부르자"해서 의자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의자는 왜 만들었을까요? 답은 '앉아 있고 싶어서'. 

가위는 왜 만들었을까요? '자르고 싶어서'.

종이는 왜? '글씨나 숫자를 적고 그림을 그려서 보관하고 싶어서.

신발은 왜? '발을 보호하고 싶어서'.

안경은? '잘 보고 싶어서'.

젓가락은? '편하게 집어 먹고 싶어서'.

난간은? '떨어지지 말라고'.

집은? '안에 들어가서 잠자기 위해서'.

자동차는? '사람 많이 태우고 빠르게 이동하려고'.

간판은? '멀리서도 잘 보이라고'.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물건을 가리키는)이 생겨난 이유를 보니, 어떤 '욕구'와 '행동' 두 개가 발견됩니다.
이제 단어(물건을 가리키는)를 사용할 때 그것을 '존재'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 단어는 '욕구'와 '행동'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동사'입니다. 즉, 어떤 행동을 나타냅니다. 위에서 우리가 본 단어들은 사람이 만든 물건들이었습니가. 이번에는 다른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비는 사실 물방울들입니다. 그런데 물방울이라고 안 부르고 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내리고 농작물들을 자라게 해주니까 비라고 부릅니다. 
흐르고 있으면 시내, 강이라고 부릅니다.
떠다니고 있으면 구름이라고 합니다.
내려서 쌓이면 눈이라고 부릅니다.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으면 수증기라고 부릅니다.

뜨겁고 태울 수 있으면 불,
축축하고 흐르면 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식물,
날아다니면 새,
먹을 수 있으면 음식,

딱딱하고 움직일 수 없으면 땅 또는 바위,
피고 지면 꽃,

농사 짓기 편하면 들,
농사 짓기 어려워지면 산,

잘 보이게 하고 농작물 잘 자라게 하고 따뜻하게 해주면 태양,

이런 식으로 자연에 있는 존재들도 움직임과
사람들의 필요나 욕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형용사적인 면도 어느 정도 담겨 있군요.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눈을 뜨면 보이는 것들은 사실 움직임과 욕구를 의미함을 살펴보았습니다. 
'나'를 알아볼 때도 '나'는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눈을 떠서 보이는 존재들도 사실은 움직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정적이지 않고 동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컵은, 물을 담아 마실 수 있으니까 컵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컵에 물이나 차를 따라 마시지만, 아주 예전 사람들은 컵 없이 냇가에 가서 손으로 물을 마시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 사람들이 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마 못 보고 지나치거나, 보더라도 다르게 사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난감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컵 중에는 쇠로 된 컵도 있고, 종이, 플라스틱으로 된 종류도 있습니다. 재활용처리장에 놓인 그런 컵들은 이제 재활용의 대상입니다. 물을 담아 마시는 용도가 아닙니다.

가끔 높이가 안 맞아 받침이 필요할 때 컵이 모양만 맞다면, 받침대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무거운 컵이라면, 어떤 사람이 화가 날 때, 상대방 근처에 던지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자신이 화가 많이 났음을 알리는 용도입니다.

이사를 가려고 하는데 방에 안 쓰던 컵들이 많이 보이고 옮기기에 불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그것은 분리수거함에 넣을 때가 되었습니다. 

작은 식물을 키우려는데 화분이 없습니다. 컵 아래에 작은 구멍을 몇 개 뚫고 화분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돈이 부족한데 방을 보니 은으로 된 컵이 있습니다. 그 컵은 이제 돈이 될 것입니다.

방에 큰 벌레가 들어왔습니다. 우선 그 벌레가 못 움직이게 하고 싶습니다. 잘 안 쓰는 컵으로 덮어서 가두면 됩니다.

유명한 스타가 사용하던 컵이 있는데 경매장에 나왔습니다. 이제 그 컵은 누군가 비싸게 사서 전시용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컵을 보며 그 스타를 떠올릴 것입니다. 

자전거가 달려가는데 앞에 컵이 하나 엎어져 있습니다. 이제 그 컵은 장애물입니다.

유리컵을 떨어트려서 깨졌습니다. 이제는 흉기입니다.


다이아몬드, 금, 은, 루비. 이러한 돌들은 값어치가 높습니다. 사람들은 비싼 돈을 주고 삽니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면, 다이아몬드는 그저 돌일 뿐입니다. 

담배는 흡연자에게는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있지만, 담배를 안 피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술도 비슷합니다.

키가 큰 사람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크게 보이는 키 183인 사람은, 네덜란드에 가면 중간 키인 사람이 됩니다. 키가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키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그 사회에서 키가 크더라도 사람들이 키에 대해 별로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키에 대해 아무도 언급을 안 하면 그 사람은 키가 큰 사람이 아닙니다.

남자, 여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배가 아주 고픈 호랑이에게는, 여자나 남자가 아니라 밥이 보입니다. 마치 사람이 호랑이를 보면서 암호랑이 숫호랑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자가 보인다"라고 위에서 언급한 것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자로 보인다"가 됩니다. 이유는 추운 지방에서 난로에 불을 지피는 사람에게 나무의자는 의자가 아니라 장작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난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는 의자가 놀이감이 되기도 합니다.

컵은 고정되고 정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움직임을 의미하고, 상황과 조건에 따라 용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보면서 컵이 있다, 책상이 있다, 가방이 있다, 옷이 있다, 안경이 있다 하는 식으로
막연하게 개념화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사람이 말을 배우면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컵은 쉽게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는데 말을 배우면 그것이 실제로 다른 것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막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필이 있다. 컵이 있다. 가방이 있다.)

부처님은 우리가, 말을 배우면서 가지게 된 개념으로 막연하게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직접 체험해서 지혜를 얻을 것을 권합니다.

개념화 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개념이 대표적입니다.

남자 하면 머리카락이 짧고, 바지를 입고, 어느 정도 운동을 한 체형을 이미지로 떠올리게 됩니다. 여자하면 머리카락이 길고, 치마를 입고, 근육은 없고, 키는 남자보다 다소 작은 이미지
를 떠올리게 됩니다.
막연히 그런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래야 한다고 개념화시켜서 바라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단지 만들어질 뿐입니다. 여자 머리카락이 길어야 할 이유는 없고, 남자 머리카락이 짧아야 하는 이유도 없습니다. 여자가 보디빌딩을 하면 안된다. 여자가 무술을 수련하면 안된다. 안 어울리고 잘 못할 것이다. 그런 건 특이한 여자들만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들이 막연한 이미지일까요. 아니면 사실일까요.
남자는 집안일을 잘 못하는 동물이다. 원래 그런거야 남자는. 이런 생각이 이미지일까요 사실일까요.

이미지를 만들어서 막연하게 존재라고 생각하는 일은 말을 배우면서 발생합니다. 사실을 알고 싶으면 실제로 보고 체험을 해야 합니다.


이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막연하게 개념을 통해서 죽음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겠습니다. 우리가 "죽는다"라고 하면 몸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 몸에 대해서 부처님은 연료로 인해 타오르고 있는 불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알코올 램프를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알코올이 들어있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불꽃이 나타납니다.

불꽃은 몸이고, 
연료는 음식, 공기, 물입니다.

알코올 램프의 불꽃은 알코올이 없으면 꺼집니다.
사람의 몸은 전혀 먹지 않으면, 수척해지고 결국 죽어 사라지게 됩니다.

몸은 영양분이 들어와서 모여있다가 빠져나가면서 만드는 모양이기 때문에, 영양분이 안 들어오면 사라집니다.

불꽃도 연료가 탈 때 나타나므로, 연료가 없으면 사라집니다.

불꽃이 꺼지고 난 후, 불꽃은 저승으로 갔습니까. 천국으로 갔나요. 지옥으로 갔나요.하고 묻는 것은 좋은 질문일까요 아닐까요.

불꽃은 그저 꺼졌을 뿐입니다. 어디로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어디로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못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영양분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모양입니다.

봄이 되면 새로운 식물들이 땅에서 자라납니다. 땅에는 영양분이 있고, 물도 있고 햇빛도 있지만 기온이 적절하지 않아서 겨울에는 식물이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봄이 되면, 적절한 조건이 되기 때문에 식물들이 자라납니다. 영양분이 이제 식물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면 식물들 중 스러져가는 것들이 다수입니다.

그렇지만 식물은 죽는다는 생각도 안 하고, '나'라는 생각도 안합니다.
그래도, 봄이 되면 또 자라납니다. 조건만 갖추어지면 다시 또 나타납니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지금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몸은 겨울이 되면 사라졌다가, 봄이 되면 다시 나타나는 꽃이나 작은 나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몸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몸은 세상에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른 것 같은데.. 그렇지만 몸을 살펴볼 때 세상과 나의 몸이 다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성격이나 생김새가 다르니까 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무엇도 완전히 같게 생길 수는 없음을 몰라서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생김새가 달라도 마음이 맞을 수 있습니다. 나고 자란 환경과 조건이 달라도 마음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그냥 조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그 조건에서 자랐다면 나도 비슷했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은 또 다른 나다. 심지어 다른 동물들도. 
나는 단지 내가 나고 자란 환경과 조건에서 생각을 너무 오래하고,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서 생각을 못해봤기 때문에 다른 환경과 조건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나와 남이라는 말은 편의상 하는 말이지, 사실 그렇게 크게 서로 다르지 않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여 있는 모습을 다소 멀리서 봤을 때 서로 별로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
그저 몸들이기 때문에 마치 촛불들끼리 구분이 사실상 잘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몸이 죽어도 또 세상에는 몸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자라나면서 '나'라는 생각을 하고 '이름'을 부여받은 것일 뿐입니다. 식물들을 키우면서 식물들 각각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 몸이 자라서 시간이 지나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사람, 동물, 식물 이렇게 종류들로 나뉘는데, 어떻게 이번에는 하필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는,

"몸을 살펴볼 때 알아본 것처럼 몸은 완전하게 세상과 하나다. 형태가 다르면 다른 이름을 붙여서 구분을 하는 것이 말을 배운 사람들이 자주 하는 일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은 햇빛, 물, 공기(바람), 흙, 또는 그것들이 모인 것이다.
겉모습이 다르다고 너와 동물들을 구분하려고 하지만 사실 햇빛, 공기, 물, 흙들일 뿐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왜 하필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특별하게 즐거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즐거움이 최고다'라고 주장하는 쾌락주의는 강한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어떤 큰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없는 잔잔한 평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정리하면, 
"내가 태어난 게 아니다. 몸이 자라서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몸이 사라져도 몸은 계속 새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몸은 세상과 완전하게 하나이다.
이번에 죽으면 다음에는 사람일까요, 동물일까요, 식물일까요, 아니면 흙이려나요라는 질문에는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 동물, 식물 이렇게 구분을 하지만 사실 크게 우열이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와 남의 분별을 하므로 그런 것이 궁금한 것인데 나와 남에 대한 구분도 허망한 것이다. 불꽃끼리 구분하는 일이 허망한 것과 같다.
이번에는 왜 하필 사람인가요라는 생각은,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해서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사람이라고 특별히 더 큰 즐거움을 누리는 일은 어렵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에서 바른 업을 통해 마음이 만들어지고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라고 하였는데 바른 업이 무엇일까요.

바름 업이란 다름 아닌 나와 남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며 함께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 모든 망상과 괴로움이 '내'가 있다. '나'는 특별하다. '사람'은 특별하고 우월하다. 세상에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있다.고 하는 생각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도 특별한 즐거움 같은 것은 가능하지 않고 그저 큰 괴로움이 없는 잔잔한 평온만이 가능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말을 배워야 하는데, 말의 기본인 단어는 세상을 구분하고 서로 뚝뚝 끊어서 인식하게 합니다. 거기서부터 망상이 시작됩니다. 언어의 주박에서 벗어나려면 평등하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하고, 생각보다는 직접 체험을 통해
지혜를 얻으려 해야 합니다.

내가 즐겁기 위해 다른 존재들을 괴롭게 하는 일은 가급적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큰 즐거움 같은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저 다 같이 하나가 되어 잔잔히 살아가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욕심부릴 것도 없고 구분할 것도 없습니다. 햇빛, 흙, 물, 공기가 모여 있는 것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실체입니다. 흙이니 물, 공기, 햇빛이 특별하게 즐거워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나나 남이라는 구분 없이 서로 어우러져 도움을 주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아주 긴 글을 읽으셨습니다. 글은 길었고 내용은 어느 정도 복잡했지만 부처님의 결론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차별 없이 최대한 헤치거나 하지 말고 서로 도우면서 잔잔히 살아가라.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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