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사는 게 지겨웠다.

작은 마을에서 화목한 가족들속에 섞여 그들과 소박하게 정을 나누고 웃고 떠드는 순간에도 그녀는 혼자였다.

마치 '미리' 알고있었던 걸 잠시 잊었다가 떠올리듯 큰 공을 들이지않고도 남들보다 빨리, 더 깊게 깨우치는 통찰력.

남들은 부럽다고 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만큼은 길지 않은 삶에도 권태롭게 만드는 일종의 패널티였다.

겨우 그까짓 것을 통찰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디까지나 숨바꼭질에서 매번 지던 동생의 관점일뿐이지만 그녀 스스로에게는 대수롭지않은 능력이었다.

만약 소설속 인물이라면 쓸데없이 주절주절 길게 쓸 정도로 특별한 인생사도 아니고 그녀는 그저 사춘기가 오래가는 평범한 소녀일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친 도적들을 피해 들어간 창고속에서 아버지가 유독 자신에게만 숨기던 기묘한 무기에 손을 대기 전까지는.

온몸을 휘감는 거대한 힘으로 습격한 도적들을 물리치고 마을을 구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어째서인지 기뻐해주기는 커녕 슬픈 얼굴로 그녀를 안고 놔주기 싫다는 듯 한참동안 흐느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무기를 쓰는 순간부터 자신은 인간이 아닌 용이고 친부모인줄 알고 살았던 그들은 대를 이어 용을 숭배하는 신도들이라는 걸.

그들이 가보처럼 보관하던 알을 몇백년만에 깨고 나온 새끼용이 카피하듯 양부모의 모습을 본따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 자신이라는 걸.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양부모님들은 마치 돌아올 수 없는 전장터에 아들을 보내듯 슬픈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지만 그녀는 소중한 '그것'만 되찾으면 반드시 다시 마을로 돌아올 것이다.

동생과 약속했으니까.

모처럼의 여행이지만 '그것'만 되찾으면 다시 지루한 삶으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런 지겨운 일상이라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니 소중하다.

적어도 눈앞의 수상쩍은 무리들이 바라는 끔찍한 세상보다는.

"...그래서 내게 무슨 볼일이죠?"

" '그분'의 부활이 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모른척하실 겁니까?"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죠?"

"응당 마중가셔야죠. 겸사겸사 방해되는 무리들도 제거하면서..."

"싫다면?"

그녀의 바뀐 말투에 회색 후드를 쓴 무리들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일족을 배신하겠다는 겁니까 용이시여?"

무리의 대표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중압감을 떨쳐내고 호기롭게 다그치자 그녀는 동공이 일자로 갈라져 마치 맹수의 눈을 연상케하는 눈으로 서둘러 무기를 고쳐잡는 그들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배신? 같은 편인 적도 없는데 무슨 헛소리?"

그녀의 살기어린 목소리에 후드의 무리가 조용히 고개를 들자 곧 드러나는 비늘에 뒤덮인 피부와 기다란 주둥이,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

리저드맨의 무리중 가장 앞에 있는자가 길죽한 혀로 주둥이를 핥고 입을 열었다.

"워워. 진정하고 다시 재고해보시죠. 어차피 지금 즐기고 있는 놀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 당신말대로라면 미쳐날뛸 '내 집안 어른'의 기상시간에 맞춰서 말이죠? 그저 힘에 취해 날뛰는 미치광이일뿐. 그 마룡에게 동족으로서의 동질감따위 없습니다. 어서 돌아가세요."

다시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평정심을 어느정도 되찾은 그녀의 비아냥에 후드속 리저드맨이 어깨를 으쓱거리고 눈을 빛냈다.

"더이상 말로는 안되겠군요."

"어라? 힘으로는 된다는 건가요?"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고작 인간 소녀의 맨몸으로 우리를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미리는 태연한 척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그의 말처럼 현재 그녀는 그저 나약한 인간소녀에 지나지않았다. '그게' 없이는.

예의 리저드맨은 미리의 침묵에 입꼬리를 올리고 마저 말을 이었다.

"정말 칠칠맞지 못한 분이시군요. 본신의 힘을 담은 소중한 '물건'을 고작 인간들 따위에게 도둑맞다니. 휘하 부하들에게는 입단속 시켰습니다만 일족의 위신이 걱정입니다."

태연한 척 웃는 얼굴 그대로 올린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창피함에 빨개진 미리의 어색한 미소를 흘깃 본 후  리저드맨은 고개를 숙이며 마저 말을 이었다.

"당신도 이곳까지 온 목적이 그것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힘을 쓰지 못하면 우리도 곤란하니. 기꺼이 도와드리죠."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입꼬리를 부들거리며 웃기만 하는 그녀의 얼굴이 눈썹까지 일그러졌다.

리저드맨은 그런 그녀에게서 뒤돌아서서 걸으며 고개를 돌려 후드밖으로 입꼬리가 올라간 흉측한 주둥이를 보여주었다.

"...정중히 모셔라."

또다른 리저드맨 둘이 그녀의 양옆에서 구속하듯 팔짱을 끼어 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한 무리의 불한당들중 한눈에 보기에도 비열해보이는 남자가 부하들에 둘러쌓인 가운데서 앙탈을 부리는 접대부의 풍만한 몸을 주무르며 자신에게 드리우는 그림자의 주인에게 입을 열었다.

"여어. 자넨가? 이거 듣던 것보다 덩치가 크군."

"물건은?"

대답한 이는 자이언트족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큰 체구의 잘생긴 사내. 그의 당당한 모습에 첫눈에 반한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는 접대부가 못마땅했는지 그 자리에서 거칠게 밀쳐낸 불한당들의 두목은 테이블에 두다리를 올려꼬고는 손을 뻗어 맞은편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일단 앉아봐."

큰 체구의 사내는 아랑곳 않고 두목이 앉으라는 의자를 걷어차 치운 뒤 탁자 위 두목의 발 앞에다 던지듯 돈다발을 올려놓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놈들과 한가하게 병나발 불 생각 없으니 빨리 물건이나 가져와."

"붙임성 없는 친구네 이거. 어이 가서 그거 가져와."

잠시 뒤 두목의 명에 부하 여럿이 낑낑거리며 어지간한 성인 남자보다 훨씬 큰 물건을 가져와 덩치 큰 사내의 앞에 섰다.

물건은 일종의 병장기였다.

검도 아니고 창도 아닌, 도전히 인간이 다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거대한 크기의 칼날이 끝에서 끝까지 대칭으로 이루어져 손잡이 가드부분까지 덮고있는 해괴한 모양의 무기.

사내가 물건을 만져보지도 않고 얼굴을 찌푸리자 두목이 서둘러 흥정을 시작했다.

"이봐. 왜 그래? 역시 아무리 댁이라고 해도 들고 다니긴 너무 큰가?"

"...약속했던 것과 다르군. 이건 검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용병의 감이 이건 '위험한 물건'이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봐 이봐? 이쪽 사정도 좀 봐줘. 우리도 이걸 손에 넣는데 고생했다고. 일단 한번 잡아봐. 혹시 알아? 먼저 쓰던 물건보다 손에 착 감길지?"

"사양하지. 거래는 끝이다."

사내가 다시 돈다발을 주워 뒤돌아 걷자 불한당 무리들이 순식간에 문을 막고 에워쌌다.

굳은 얼굴로 좌우로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핀 큰 체구의 사내는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두목을 쳐다보았다.

"볼 일은 끝났을 텐데?"

"아이고 참내. 고객님께서 멋대로 굴면 곤란하다고. 물건이 마음에 안들면 돈이라도 두고가. 살려는 드릴게."

일당의 두목이 능글맞게 웃으며 협박하자 부하 하나가 사내에게 다가와 돈 주머니쪽으로 손을 대었다.



순식간에 뻗은 사내의 주먹질에 그 부하는 비명한번 못질러보고 날아가 두목의 테이블을 흔들었다.

"내가 아무리 애검을 잃어서 이빨 빠진 호랑이 꼴이라도 너희같은 애송이들이 비벼볼 상대는 아닌데 말이지."

큰 체구의 사내가 주먹을 털다가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자신을 내려다 보자 얼굴을 두목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소리쳤다.

"죽여!"

그의 명대로 부하들이 사내를 덮치려던 순간 또다른 부하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윗층계단에서 굴러넘어지며 두목을 향해 닿지않는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두, 두목! 괴, 괴물들이!"

그 부하는 그 말을 끝으로 괴물의 발에 등을 밟혀 정신을 잃었다.

"...리저드맨? 지하수로의 괴물들이 여기는 왜?!"

괴물들의 무리중 하나가 대표로 나와 좌중을 둘러보고는 이내 덩치 큰 사내가 거부한 해괴한 모양의 무기에 시선을 멈추었다.

[물건을 회수해라. 목격자는 전부 죽여.]

그의 명령에 뒤에 있던 리저드맨들이 순신간에 앞으로 튀어나와 불한당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술집안이 비명과 신음으로 아수라장이 되어도 방관하던 덩치 큰 사내는 리저드맨 하나가 자신을 발견하여 덤벼들고 나서야 한숨을 깊게 쉰 뒤 칼을 뽑았다.

머리가 분리된 리저드맨이 몇발자국 더 걷다가 덩치 큰 사내의 뒤켠에 쓰러지자 아수라장이 된 술집안이 언제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아아. 무슨 숟가락도 아니고 정말 휘두를 맛 더럽게 안나는 칼이야. 차라리 덩어리처럼 기둥이나 잡아볼 걸 그랬나."

그의 혼잣말이 고요를 깨자 리저드맨 둘이 그에게 달려들었고 사내가 앞서 들이닥치는 리저드맨의 가슴팍에 기다란 롱블레이드를 그대로 박아 넣자 잠시 움찔거리던 리자드맨은 결심을 굳힌 비장한 얼굴로 자신의 몸에 박힌 사내의 칼날을 움켜쥐어 사내가 칼을 뽑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대로 또다른 리저드맨이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리저드맨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멀리 나가 떨어지자 술집안은 종족 구분 없이 사내의 다른 손에 쥐어진 커다란 총의 시커먼 연기를 입김 뿜듯 흩날리는 총구에 시선이 모였다.

"아, 이거? 남는 손이 허전해서."

자신에게 박힌 칼날을 움켜쥐던 리저드맨이 그 모습에 자신의 희생이 물거품이 되자 분노하여 칼날을 더 깊숙히 박으며 칼자루를 쥔 사내를 향해 다가가려 했지만 엄청난 악력으로 박은 칼날을 반 바퀴 돌려 그대로 위로 베어 머리를 반쪽내어버린 사내로 인해 동료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주점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사내는 강도로 돌변하여 위협을 끼치던 거래처의 두목에게 다가가 총구를 겨누었다.

"에헤이! 움직이지마. 총알 아까우니까."

사내는 총구로 두목의 가슴팍을 콕콕찌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너말이야... 저 물건 마족을 토벌하고 얻은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을 믿었나?"

"아니. 그럴리가. ...과연 알만하군. 그래서 저 물건의 정체는 뭐지? 어디서 얻었고? 왜 저놈들이 나타난 거야?"

"그건 제가 설명하죠!"

주점안을 울려퍼지는 낭랑한 목소리에 일동이 모두 고개를 돌려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후드를 눌러 쓴 리저드맨의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흑발 여자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도둑맞은 제 분신이랍니다. 저기요 도적 아저씨~? 반갑네요. 우리 구면이죠?"

총구를 겨눈 덩치 큰 사내가 그 얘기에 다시 고개를 돌려 두목을 빤히 쳐다보자 두목은 얼굴을 구기고 시선을 피했다.

"자,자. 정의의 용사님? 눈앞의 정의구현보다는 괴물들에게 붙잡힌 인질구출이 먼저 아닐까요?"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토해내는 소녀의 목소리에 사내는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인질치고는 태평하군."

"용사님이 꼭 구해주실 거라고 믿고있거든요!"

후드속 리저드맨이 뒤로 빠지라는듯 신경질적으로 밀치자 두팔이 등뒤로 결박되어 있던 소녀는 속절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야!"

후드속 리저드맨은 그러거나 말거나 얼마 남지 않은 부하들에게 불러모아 손가락을 덩치 큰 사내를 향해 가리켰다.

[죽여라!]

'칫. 총알 챙기는 거 깜빡했는데.'

사내는 가까스로 리저드맨의 칼날을 피하며 적의 다리를 베었다.

다친 리저드맨이 절뚝이며 뒤로 빠지자 그를 지키듯 다른 리저드맨이 앞을 가로막았고 이내 언제 다쳤냐는듯 뒤로 빠져있던 리저드맨이 금새 회복하여 성큼성큼 다시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젠장. 역시 이런 과일이나 깎을 칼은 '그녀석들'에게나 어울려.'

"이봐 너희들!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거야!?"

막 리저드맨을 발로 차서 그 복부에 찔러넣은 검을 뽑아 다른 리저드맨의 공격을 막은 사내의 신경질적인 물음에 화들짝 놀란 도적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결심을 굳히고는 움직였다.

"튀어!"

혼자 괴물들과 싸우는 사내를 내버려 둔 채 두목을 필두로 주점 출입구를 향해 뛰어나가자 사내는 그만 칼자루를 쥔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며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목은 뭔가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 이건!"

숙이고 들어오기도 비좁았는지 문을 확장시키듯 부수며 들어오는 거대한 리저드맨의 등장에 사색이 된 두목은 눈물 콧물을 쏟으며 기어서 몸을 피하기 급급했지만 이내 거대 리저드맨의 발에 밟혀 목숨이 끊어지고 덩치 큰 사내는 암담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소녀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이봐! 일단 우리끼리 나간다!"

소녀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후드속 리저드맨은 그 외침에 남아있는 부하들을 불러모아 소녀를 둘러싸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아차! 인간말을 알아듣다니!?'

"바보!"

소녀의 원망 섞인 비아냥이 가슴을 쑤시자 사내는 아직 다루는데 미숙한 칼과 총을 갈무리하고 그나마 다룰 수 있는 무기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다가 죽은 리저드맨이 쓰던 칼을 쥐었으나 조잡한 금속이라 집어던진 채 급한대로 자신이 구매를 거부했던 소녀의 거병을 쥐었다.

[부탁이야...나를 그 아이에게...]

순식간에 머리속을 스쳐지나간 흑발 여인의 환영과 목소리

"어서 그걸 제게 던져줘요!"

"...뭐?"

"설명할 시간 없으니 빨리!"

사내는 정체모를 거병이 일으키는 환각과 소녀의 다그침에 깊게 생각할 겨를 없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얼떨결에 힘껏 그녀를 향해 거병을 던졌다.

아차싶었으나 이미 거병은 가로막는 리저드맨들을 차례로 토막내며 맹렬한 기세로 소녀를 향해 날아갔다.

"위험해!"

이미 후드의 리저드맨은 자리를 피하고 거병의 흉측한 칼날이 소녀에게 닿을 찰나,

"뭐가요?"

거병은 날아가던 맹렬한 기세가 어디갔는지 거짓말처럼 멈추고 허공에서 부드럽게 움직여 어느새 칼날로 소녀의 손을 속박하던 줄을 끊고 싱긋웃는 그녀의 주위를 돌다가 뻗어온 사슬이 소녀와 연결되고 나서야 바닥에 꽂히며 멈추었다.

황당한 표정을 감출 수 없던 사내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했다.

"대, 대체 정체가...?"

"나요?"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검지로 자신의 하얀 얼굴을 가리키며 되묻다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용이요!"

사내는 못들을 걸 들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문을 막고 있는 거대한 리저드맨을 보며 칼과 총을 뽑았다.

"이봐 싸울 줄은 알아?"

"음...아마도?"

"한가하게 농담하고 있을때가 아니야. 이놈들은 내가 최대한 붙잡고 있을테니 기회가 되면 바로 도망치라고!"

"왜요? 같이 나가요!"

"그게 가능하..."

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를 용이라고 칭한 소녀는 칼날이 아슬하게 사내의 곁을 스칠만큼 빠르게 쇄도했다.

사내를 향해 손을 뻗어 무슨 짓을 하려던 후드의 리저드맨은 가까스로 거병의 칼날을 피하고 인상을 구겼다.

"정녕 우리와 적이 될 생각입니까 용이시여...?"

"댁들한테서 자랐다면 모를까 인간들 틈에서 인간처럼 살아서 엄연히 정체성은 인간에 가깝다구요. ...그러니까 인간의 편에서 당신들을 반드시 이 손으로 막겠어요!"

"...더이상은 못봐주겠군. 그럼 죽어라."

분노한 후드의 리저드맨은 출입문쪽에서 남은 도적단을 처리하던 거대한 동족에게 손을 뻗어 주문을 건 뒤 암흑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후드의 리저드맨이 걸어준 주문 덕인지 문 앞에서 길을 막고 있던 거대한 리저드맨이 흉폭하게 날뛰며 어깨를 맞대고 있는 소녀와 사내, 서로 무기를 바꿔서 들고있는 듯 어색한 두사람에게 다가왔다.

"...이봐. 방금보니 전투 걱정은 안해도 되겠더군."

"이힛. 괜찮았나요? 아직 많이 휘둘러보진 않아서."

"...가자."

"네!"

거대한 리저드맨이 흉측한 아가리를 벌려 침을 길게 늘어트리며 달려들자 소녀는 거병을 앞으로 꺼내어 좌우 균형있게 횡으로 쥐고 과감하게 마주달렸고 거대 리저드맨이 생각보다 빠른 그녀의 움직임에 공격을 헛치자 소녀는 거병을 들고 달리던 그 상태로 거대 리저드맨의 두 다리를 베며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갔지만 아직 경험 부족탓인지 휘둘러진 거대 리저드맨의 눈먼 꼬리를 가까스로 거병을 들어 막고 멀리 나가 떨어졌다.

사내는 거대 리저드맨이 비명을 길게 내지르며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 리저드맨의 미간에 아껴두었던 마지막 총알을 갈기며 마무리를 지었다.

"훌륭하군."

"크아아!"

그의 칭찬이 채 끝나기도 전에 쓰러진 줄 알았던 거대 리저드맨의 큼직한 손톱이 그에게 들이닥쳤고 푸른 빛을 길게 남기며 날아온 거병이 거대 리저드맨의 정수리에 박혔다.

"그쪽이야말로요."

전설상의 용처럼 눈동자가 일자로 찢어진 소녀가 맞칭찬을 하며 눈을 마주치자 사내는 체구에 비해 가느다란 검으로 간신히 막은 거대 리저드맨의 날카로운 손톱이 가득한 손을 치우며 얼굴에 놀라움을 띄우고 입을 열었다.

"...진짜였군."

저 멀리서 뒤늦게 경비대가 달려오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듯 고개를 끄덕이고 같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와 그 사내만큼 거대한 거병을 들고다니는 소녀. 이상한 일행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왜 맞지도 않는 무기를 억지로 쓰는 거죠?"

"그럴 사정이 좀 있어."

"원래 쓰던 무기는요?"

사내는 품속에서 날이 없는 커다란 칼자루를 꺼내어 보였다.

"전투중에 형편없이 망가져 버렸지. 소중한 물건이었는데 콜헨의 어느 빌어먹을 대장장이 탓에."

"그게 대장장이 탓인지 어떻게 알아요?"

"이래 봬도 대장장이였으니까. 견습이었지만."

"그건 좀 이상하네~? 대장장이라면서 왜 자기 무기는 못고쳐쓰죠?"

"그건..."

사내는 쥐었다폈다하는 자신의 큼지막한 손을 내려다보며 말 없이 쓴웃음만 지었다.

소녀는 굳이 더 묻지 않고 자신의 애병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흘깃 본 사내가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그렇게 강하면서 무기는 왜 뺏긴 거야?"

"운이 나빴어요. 고향에서 동생...정확히 말하면 양부모님의 아들이 인질로 잡혀있었거든요. 쉽게 말해 인질교환이죠."

"...분신이라고 했나?"

"네! 제가 태어나기전부터 저를 지켜왔다고 해요."

"...그냥 내 기분이지만 너에게 있어서 그 물건은 분신이라기보다는 뭐랄까..."

'녀석. 사고치고 다니면 안된다. 언젠간 네가 이 대장간을 이어야 하니.'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그의 모습에 사내는 말을 잇지못했다.

"가족."

"...?"

"가족이라고 말하려고 했죠?"

"...그래."

별안간 소녀가 사내쪽으로 몸을 틀며 손을 내밀었다.

"새삼스럽지만 정식으로 소개하죠. 저는 용족의 후예. 미리랍니다."

"용족?"

"아, 무슨 말 하고싶은지 알지만 사실이에요. 믿든말든 이 아이와 내 피 한방울 한방울이 내가 용족이라고 알려주거든요."

덩치에 맞지않게 쭈뼛거리던 덩치 큰 사내가 소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난 허크다."

"대검의 허크. 들어본적 있어! 어쩐지. 근데... 그게 다에요?"

"뭐를?"

"제 정체요. 아직도 못믿는 눈치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 의외네요."

"서운한가?"

"후훗. 좀 그럴지도."

"용병일을 하다보면 별별 녀석들이 많거든. ...직접 확인 해보겠어?"

"네?"

"인간편에서 싸우는 오거나 나 못지않게 큰 검을 휘두르는 가녀린 공주, 거대괴수를 방패하나로 날려버리는 괴력의 여기사, 그리고 건물 기둥을 통채로 뽑아 휘두르는 거인등등. 그곳에는 나나 너만큼 특이하고 대단한 녀석들도 많아."

"...흐음 그래요? 그럼 '그 사람'도?"

"누구?"

"당신같이 그레이트소드를 쓰는 법황청의 그 기사단장말이에요. 건방지게 내 동족을 사칭하고다니는 날도마뱀을 타고다닌다면서요? 그 이름이 뭐더라? 에더..."

"카단..."

허크는 씁쓸히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을 마쳤다.

미리의 눈길을 피하며 하늘을 향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분명한 투지가 일렁거렸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던 미리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반달로 뜨며 정적을 깼다.

"나를 타도 좋아요."

"뭐,뭣?!"

모처럼 똥폼잡던 허크의 그 큰 덩치가 휘청거렸다.

그 모습을 본척만척 깍지를 끼고 하나로 만든 두손을 하늘로 뻗으며 기지개를 켠 미리가 마저 말을 이었다.

"남자들은 그런거 좋아하잖아요?"

"무, 무슨말을..."

"시치미떼긴."

미리는 허크를 향해 뒤돌아보며 깍지 낀 두손을 엉덩이 뒤로 숨기고 다안다는 듯이 장난스레 미소지었다.

"그 왜, 남자들은 살면서 한번쯤 용을 타고다니는 '드래곤 나이트'를 꿈꿔본다면서요? 내가 누군지 잊었나요? 이몸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면 통크게 인심써서 한번쯤은 태워줄 수도 있다고요. 진짜 드래곤을."

"아아. 그런뜻인가? 난 또 뭐라고 하하..."

그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하면서도 못내 뭔가 아쉬운듯 머쩍게 웃으면서 얼굴을 붉혔다.

"뭐지? 뭔가 다른 걸 생각한 건가요? 설마 실은 내가 용족이란 걸 아직도 안믿는 거예요?"

수상쩍다는 듯이 뾰루퉁해진 얼굴로 따져묻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고 서둘러 성큼성큼 앞서 걷는 허크를 뒤쫓으며

"뭔데요? 무슨 생각 한건데요? 아 같이가요!"

그녀의 모험이 시작됐다.



====미리 배경스토리랍시고 나온거 보고 하도 어이가 없고 내가 써도 저것보단 낫겠다싶어 써봤네요. 부족하지만 적어도 공식배경으로 나온 것보단 훨씬 낫다고 자부하니 공식배경하고 비교해서 누가 나은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