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스케일링이 이뤄진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스케일링 패치 당일 '오리지널 감성 그대로 레벨업의 기쁨을 느끼게 하겠다.' 란 개발자가 밝힌 이 취지가 부스팅을 팔아먹기 위한 꼼수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만...., 엄밀히 말해 이러한 불만은 새로 부캐를 키우는 고인물들의 입장이지, 와우에 갓 입문하여 조금씩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뉴비에게 큰 문제는 아니였다.



"이 좆망겜은 세시간을 기다려도 탱이 안잡히네.."



문제는 다른곳에 있었다. 애초에 와우의 인구풀 자체가 처참하다 보니 저렙 유저들은 던전을 가려해도 최소 30분. 심하면 몇 시간동안 기약없는 동렙 유저를 기다려야 했다. 사람이 다 빠져버린 초기 컨텐츠를 후발주자가 온전히 즐기기 어려운 건 여느 게임이 다 그렇겠다만, 출시된지 13년이 지난 장수(틀딱)게임 WOW는 그 정도가 심각했다. 레벨별 인구절벽이 극심하게 가파른 현 와우에서 과거 컨텐츠를 즐기는 유저는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과거 경험치 패치가 되기 전에는 뉴비들이 지역 퀘스트 절반을 마치기도 전에 사냥터를 옮겨야 할 정도로 레벨링 곡선이 가파렀었다. 어느 지역이나 스토리의 절반밖에 맛보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지역 메인스트림의 종착지 격인 인스턴스 던전을 건너 뛰어도 큰 영향이 없었다. 레벨업이 쉬웠을 뿐만 아니라, '와우는 만렙부터 시작' 이라는 인식 역시 퀘스트가 경시되는 이유기도 했다.


사실 초기 인던이라 하믄.. 와석들이야 수년, 아니 십여년전에 경험했던 구시대적 컨텐츠로 기억속에서 희석됐을지 모르겠다만, 어디까지나 희석되었을 뿐. 지역 퀘스트의 최종장이자 초반 퀘스트 라인의 대장정을 맺는다는 면에서 큰 비중을 지닌게 사실이였다.


예를 들어 얼라이언스 초반 퀘스트지역인 서부 몰락지대 같은 경우, '감시의 언덕' 민병대장에게 임무를 받아 지역 민가와 농장을 쑤시고 다니는 데피아즈단들의 뚝배기를 순차적으로 부시는 식의 퀘스트 라인을 가지고 있다. 이 흐름을 따라가면 마침내 그들의 본거지 죽음의 폐광 에 닿게되는데, 데피아즈단을 소탕하고 이들의 우두머리 에드윈 벤클리프의 최후를 목격하는것으로 이야기가 끝이나는 것이다.


이렇듯 인스턴스 던전은 스토리의 끝을 맺으면서, 이후 새롭게 맞이할 지역의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위치에, 그동안 묵혀왔던 퀘스트들과 떡밥들을 던전을 마무리하며 싹 비우고, 새로운 지역으로 출발하게끔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퀘스트에서는 보지 못한 퍼렇고 보랏빛을 띄는 전리품은 덤이고 말이다.


지역 스케일링 패치는 중도 끊김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잇게 하여금 뉴비들을 스토리에 몰입시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고질적인 던전 대기시간으로 인해 마치 흥미진진하게 보던 영화의 마지막 10분을 잘라놓은 격의 패턴이 계속되었고,  결국 뉴비들은 스토리텔링의 기대보단 허탈감과 지루함을 느끼고 급속도로 게임을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취지는 좋았다만 실정에 맞지 않은 패치가 오히려 독이 되버린 격이었다.


블리자드에겐 뉴비를 위한, 게임의 완성도를 위한, (그리고 부스팅팔이를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얼마 후 패치노트에 저레벨 유저들을 위한 [던전도우미 시스템]이 추가 될 것이라는 노트 한줄이 추가되었다.


축약되어 소개된 이 시스템은 혁신적이거나 거창한 것이 아닌, 여느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간단한 Ai 시스템이였다. 블리자드의 다른게임 히오스 같은 경우도 일정 대기시간이 지나면 인공지능을 팀원으로 붙여주곤 하는데, 추가될 던전도우미도 이와 비슷한 식이였다. 던전에 부족한 파티원을 인공지능으로 대체하여 넣는 것. 간단했다.


이에 유저들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론, 와우는 만렙부터 시작이라는 통념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이드와 쐐기에만 집중한 데다가 2회차 캐릭터 육성은 지겨운 컨텐츠란걸 알기에 그저 본인과 상관없는 시스템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과거 '수련의 방' 이나 시나리오 같은 아군 NPC에 익숙했던 유저들은 고질적인 던전 대기열을 완화시키는 좋은 패치 정도로만 인식하였다.


인스턴스 던전 자체가 월드맵과는 분리되어 별도로 생성된 필드기에 일정한 패턴을 수행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적용하는데 기술적인 문제는 없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 작은 시스템의 추가가 이후 와우의 판도를 바꿔놓는 시발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고,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공포의 던전도우미가 온다






패치는 성공적이였다.


패치 전 몇몇 의견으로, 복잡하고 길이 난해한 구 컨텐츠(ex 통곡의동굴)에서 Ai가 제대로 작동을 할 것인가? 정도의 우려가 있었지만, 던전도우미는 주어진 롤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인공지능 딜, 힐러는 파티원을 졸졸 따라다니며 기대 평균치의 딜을 보였고, 인공지능 힐러의 마나를 삭제해서인지 불필요한 마나탐이 없기에 진행에 저해 되지도 않았다.


가장 우려 했던 포지션은 구하기 가장 어렵고 할 일이 제일 많은 탱커였는데, 그런 걱정은 기우였을 정도로 인공지능 탱커들은 일정하게 정해진 루트를 순차적으로 진행하며 안정적인 리딩을 하였다. 파티원의 체력과 마나를 자동으로 체크하여 적절히 리딩을 하는 시스템. 파티원이 다 미숙할 경우 맵에 핑까지 찍어주는 등 어설픈 탱커보다 더 나을 정도로 거의 완벽하다시피 한 매커니즘을 보여주었다.


던전도우미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칼차단', '칼도발' 같은 기계같은 역할 수행을 하였으며. 메인서버에선 포지션 별 대기 인구수를 실시간으로 체크하여 취약시간대에 2명 이상의 Ai를 투입해 큐(queue)시간을 극단적으로 단축시켰다. 성능 자체가 뛰어나다보니 플레이어를 제외한 나머지가 Ai더라도 진행에 문제가 없을정도였고, 오히려 더 빨랐다. 


기껏해야 대기시간 정도만 완화될 거란 예상과는 달리, 실제 Ai는 기대 이상의 성능을 보여주자 유저들은 던전도우미에게 딥마인드 슈퍼컴퓨터인 알파고(Alphago)를 빗댄 '와파고' 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와파고는 고질적인 저레벨 컨텐츠의 문제점을 완벽히 해소해주는 마치 가물었던 논의 반가운 단비와도 같았다.


반면 유저들에게 던전도우미 시스템이 호평을 받는 것과는 반대로 소수의 피해자 또한 생겼다. 바로 탱커라는 미명하에 파티내 권력을 자유자재로 휘둘렀던 권력형 탱커들이였다. 기피되는 탱커 포지션의 적은 인구로 흔히 '귀족탱' 이라 불리던 그들이였지만, 뛰어난 대체인력이 생기자 포지션 특유의 희소성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사라진 것은 희소성 뿐만이 아니었다. 과거 던전에서 다툼이 일어날 때 탱커라는 이유로, 혹은 힐러라는 이유로 잘잘못을 따질때 알게모르게 약간의 어드밴티지가 있었지만 사람보다 뛰어난 와파고의 등장은 기존의 권력체계를 허물어뜨렸으며, 그와 동시에 탱, 힐러의 위상또한 심각하게 하락시켰다.


대표적인 일례로 사건사고 게시판에서 일어난 '거위펜듈럼 사태' 를 예로 들 수 있었다. 이는 무작위 던전에서 첫 무리를 풀링하기도 전에 탱커가 강퇴당한  사건으로, 탱커 '거위펜듈럼' 은 스크린샷을 첨부한 게시글을 올리며 억울함을 호소했고, 이내 당시의 파티원들이 댓글로 소환되었다.


황당하게도 투표 사유는 타우렌 탱커에다가 전경방패를 들고 있었다는 것. 참으로 허무맹랑한 이유로 '딱봐도 와파고가 더 잘할것 같았다.' 는게 파티원의 입장표명이였다. 슬프게도 이 댓글엔 비공감보다 공감 비율이 더 높았다. 근거는 없어도 사람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와우할맛 안난다..."



이와 별개로 와파고의 등장으로 선의의 피해자도 생겼다. 바로 뉴비들에게 던전 버스지원을 해주는 맘씨 좋은 유저들이였다. 길드에 한 두명쯤 보이는 이런 클린 유저들은 대체로 레이드나 아이템에 뜻을 두지 않고, 새로 게임에 입문하는 초심자들을 도와주며 '멘토' 역할을 자청하여 남을 도우면서 이로 인한 보람을 느끼는데 뜻을 두었다. 그들의 주된 활동은 역시 던전버스였는데,  와파고가 출현한 이후 더이상 버스를 돌아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물론 고렙 도우미 유저가 던전을 돌아주는게 속도면에서 빠르다해도, 대체로 고렙이나 계귀템 둘둘말은 부계정들의 일방적인 학살쇼로 진행되었기에 초심자들은 던전의 스토리나 분위기를 느끼기는 커녕 룻하며 따라가기에 바빴었다. 이런면에서 와파고는 기존에 어쩔수 없이 놓쳤던 부분을 완벽하게 보완해주는 격이였으니 '인간' 도우미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와파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진화하고 있었다. 



"배신자 고드프리 녀석이 [총알 포화]를 준비하고 있다네! 사선에서 어서 피하게!"



어느날 부터 기존 포지션별 역할 수행만을 하던 인공지능은 던전 배경과 상황에 맞추어 간단한 스크립트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입던시 간단한 인삿말부터 상황별로 던전도감을 곁들여 어색하지 않는 선의 대사로 초심자들에게 공략을 가르쳤고, 던전을 마치면 "수고하셨어요. 모험가님!", "다음에 만나세! 용맹한 주술사여!", "얼라이언스를 위하여!" 같은 작별인사까지 하였다. 물론 미리 짜여져 있는 스크립트를 읊을 뿐이였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인공지능이 설명하는 풍미있는 스토리와 대사로 초심자들은 마치 한편의 시나리오를 즐기듯, 점점 와우란 게임 자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와우의 스토리와 세계관이 탄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미 넘치는 인공지능의 모습에 입문자들이 녹아들어서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블리자드에선 이점을 캐치한듯, 군단에서 전역퀘 지역에 입장하면 NPC의 음성이 들리는 것처럼, 다채로운 상황별 더빙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와파고는 더욱더 매력적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마치 히오스처럼 말이다.










얼마 후 블리자드가 와파고의 성공에 탄력을 받았는지, 설상가상(?)으로 공격대 도우미 까지 추가되었다. 물론 던전과는 다르게 레이드는 공략이 복잡했기에 정교하게 작동하는건 아니였고, 단순히 한 두명 비는 인원을 보충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안토러스 네임드 이모나르로 예를 들자면, 와파고가 [강화 수류탄]이 걸린 경우 '파티원 주위 5m 반경에 접근하지 말 것.' 정도의 내재된 매커니즘을 수행하였고, 이로 인해 페이즈 변환시 다리 중앙에서 멀뚱멀뚱 서있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그 외 아그라마르의 [섬광] 같은 유도 패턴에도 취약하였다.


사실 공격대 도우미의 차별화된 강점은 던전도우미와는 달리  '공대분석도구' 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이였다. 실제 인간을 대체하여 레이드에 투입된 인공지능은 공격대가 어느 구간에서 막히는지, 첫번째 희생자(전문화)는 누구인지, 페이즈 변환까지의 적정 RDPS가 얼마인지 등의 공대분석도구로서의 역할을 겸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로 개발자들은 보스들의 수치를 단순조정 하기보단 대체로 유저들이 어려워하는 구간, 막히는 구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빅데이터를 토대로한 밸런스 조정을 하였다. 공격대 도우미의 투입은 파티의 회전률을 높이고, 개발자들이 현장의 생생한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받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였다.


등장 초기엔 이래저래 허술한 면이 많았고 플레이어 평균 40% 정도 수준을 보였던 와파고지만, 생존만큼은 발군이라 한 두명 비는 인원을 대체하기 위한 초기목적엔 충실하였고, 유저들은 부담없이 와파고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블리자드의 본래 의도와는 반대로 한국의 업손팟에서 의외로 인기를 끈 것은 나중의 얘기다.)




"Ai가 인간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가?"




경제신문 칼럼에서나 볼 듯한 이 뜬구름 잡는 주제는, 넌센스하게도 일개 게임게시판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다. 흔히 현 시대를 '4차 산업혁명' 이라 말하곤 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가설은 어디까지나 실현되지 않은 먼 훗날의 얘기였지만, 가상게임 WOW에서 만큼은 예외인것 처럼 보였다.


던전도우미의 추가로 권력형 탱커와 '인간' 도우미의 몰락은 기존의 가치체계를 붕괴시켰고 기다림의 미학과 흔히 정(情)이라 불렸던 과거 어찌보면 인간미라 부를 수 있는 오지랖들은 인공지능의 합리성이라는 미명 하에 점차 사라져만 갔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레이드 컨텐츠를 인공지능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천만이 넘는 와우유저 만큼 날마다 쌓여가는 수백만, 수천만의 데이터 표본으로 와파고는 날이갈수록 점점 더 정교하게, 더 완벽하게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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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특집] 와파고 딥마인딩 알고리즘 장착. 당신의 공대 TO가 위험하다?



특집 기사의 스크롤을 주욱 읽어 내리던 gayfish는 헛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 잠시 생각을 해봤지만 역시 아직은 시기상조인 얘기다. 기계는 어디까지나 기계. 현실에서 일어나는 미묘하고 애매한 상황들을 인공지능이 처리할 리 만무하고, 만일 그렇다고 해도 보이스도 못듣는 Ai 따위가 인간을 대체할리도 없다. 근래 인게임과 사사게에서 겜 못하는 틀딱들이 애꿎은 와파고를 욕하는 것을 비웃었던 그였다. 기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니 조회수를 늘리기 위한 특유의 과장과 호들갑이 심하게 느껴졌다.



"즈아아... 와우나 해보실까..."



굼벵이같이 움직이는 달라란의 로딩바를 기다리는 중,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진짜 나중엔 못하는새끼들 다 걸러지겠는데? 진자 나오기만 하면 공장한테 어제 불길 1억씩 쳐맞던 그새끼부터 짜르라고 해야겠다ㅋㅋ'


막상 상상하니 베시시 흘러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던 그였다. 그리고 몇초 후 로딩이 끝나고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달초와, 직후 공대장이 보낸 우편을 확인한 그는 이내 웃음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