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나는 죽게 될 것이다. 좋은 성적, 좋은 직장, 좋은 결혼, 많은 돈, 명예 등을 위해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이 바보 같아 보였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건 17살 때였다. 학교에 있었는데, 선생님이 교무실로 날 불러 엄마의 전화를 바꿔 주셨다.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셔서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하시더라. 가족들과 함께 병원으로 급히 갔다.

이모, 외삼촌, 모든 할아버지의 가족이 병원에 계셨다. 할아버지는 병원의 침대에 누워계셨다. 분명 뵐 때마다 몸에 튜브가 여러 개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날은 산소 호흡기만 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버지, 좋은 인생 사셨어요."

"천국 가서 푹 쉬세요."

"너무 고생하셨어요."

 

할아버지의 가족 모두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듯한 인사를 하더라. 응? 나는 그저 위독하시다는 말만 듣고 왔었는데? 다들 왜 이러시지? 그때 직감했다. 아, 돌아가시는구나. 아쉬웠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죽음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본 경험이 없던 나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은 단순히 '앞으로 명절에 만날 수 없는 것' 뿐이었다. 할아버지 옆에 서 있던 의사가 말했다.

 

"그럼 이제 산소 호흡기를 떼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입원 기간 약 1년 동안, 실눈을 뜨고 누워계신 모습 말고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많이 편찮으셔서 말씀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가끔 병문안을 가면 그저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기만 하셨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의사가 산소호흡기를 제거하자 갑자기 할아버지가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을 흘리셨다.

처음 보는 어른의 눈물이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엄마가 '아버지'를 연신 부르며 흐느끼셨다.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밖에서 턱을 크게 다쳐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있을 때도 "괜찮아"라고 하셨던 부모님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호되게 혼나고 돌아와도 "괜찮아"라고 하셨던 부모님이, 집에서 300원을 훔쳐 오락을 했던 때에도 혼을 낸 뒤에는 "괜찮아"라고 하셨던 부모님이, 이렇게 무엇이든지 괜찮게 만들 수 있는 세계 제일의 능력자인 줄 알았던 부모님마저도 그저 울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죽음'이란 것을. 그래서, 너무 싫지만, 알게 되었다.

 

그날 울고 계셨던 부모님의 모습은 언젠가 나의 모습이 될 것이고, 누워계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언젠가 부모님의 모습이 될 것이고,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던, 고개만 숙이고 슬픈척하던 가식적인 내 모습이 언젠가는, 내 부모님과의 영원한 이별을 슬퍼하지 않을 내 자식의 미운 모습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 후에는 내 모습이 결국 그날 할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을. 죽음은 나의 사랑하는 부모님도, 형도, 나마저도 피해 갈 수 없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필연 이란 것을.


그렇지만, 나에게는 '나는 다를 것이다'라는 무조건적 믿음이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나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었다.

이 믿음을 깨고 싶지 않았다. 이 믿음이 깨지면, 소중한 존재들과의 최후의 순간을 상상할 때마다 무섭고 슬퍼서 울 테니까. 그런데 역시 현실은 잔혹했다. 아빠는 2년 전부터 가끔씩 장기 속의 문제 때문에 병원에 다니셨다.

뭐, 사람이 가끔 아플 수도 있지 생각했다. 어느 날 아빠와 밖을 걷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그런데 아버지 양복바지가 참 많이도 펄럭였다. 집에 간 후 아빠 다리를 봤는데, 언제 그렇게 얇아졌는지, 서 계시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예전엔 매일 꾸준히 뛰셨던 우리 아빠가, 요즘은 걷기만 해도 힘들다고 하시던 장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모든 정황이 나에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말해 주었다.

아빠는 약해져가고 계시다. 엄마는 요즘 들어 설거지만 하셔도 땀을 흘리시고, 무언가를 자주 잊어먹으신다. 건강 상 특별한 문제는 없으셨지만, 엄마에게도 세월의 영향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엄마도 약해져가고 계셨다.

엄마 아빠는 계속 약해져 가고 계셨지만, 아들이라는 녀석은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익숙함에 속아 당연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믿음은 깨졌다. 한국인 평균수명을 검색해 보니 약 80세라고 하더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부모님과 볼 수 있는 날이 20~3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나는 그냥 살다 보니 벌써 스무 번이 넘는 해를 넘겼으니, 이삼십 년 또한 살다 보면 어느새 흘러가 있겠지. 결국에는 끝이 오겠지.

 

하지만, 나는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모든 생물은 죽으면 인간으로든 동물로든 식물로든 어떤 생물로든 환생할 것이다'라고 믿어보았다. 그러나 이 믿음 역시 무의미했다.

내게는 전생의 기억이 없다. 생물의 역사가 약 30억 년이라면 나는 분명 환생을 여러 번 했을 텐데, 내게는 전생의 기억이 없다. '아, 모든 기억을 잃는 것이 환생의 조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모든 기억을 잃으면 다시 태어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기억을 다 잃는다면, 내 아버지의 아들, 내 어머니의 아들, 내 형의 동생, 내 친구의 친구, 내 반려동물의 삶의 동반자로서의, 즉 '나', 내 이름 'XXX'로서의 삶은 죽는 순간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내가 죽은 뒤 만약에 환생한다 하더라도, 그 환생의 혜택을 받는 존재가 이번 생의 '나'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분명히 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나는 절망에 빠졌다. 슬펐다. 눈물이 많아졌다.

 

죽음을 상상하며 혼자 바보처럼 집에서 울던 어느 날, '어차피 죽을 것이면 생물은 왜 태어나고 왜 사는 걸까?'라는 고민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이내 곧 무의미한 고민이란 걸 깨달았다. 개미의 입장에서 인간은 사신(死神)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63빌딩이 수십, 수백, 수천, 수만 개 합쳐진 크기 앞의 인간처럼, 인간은 개미보다 수천만배 더 큰 위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고, 자신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인간이란 사신은 개미가 살거나 죽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개미는 신경 쓰기에는 너무 작고 하찮은 존재니까. 개미는 그냥 태어났으니까 살고, 태어났으니까 죽는 게 당연한 생물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넓디넓은 우주에, 감히 그 범위를 예측할 수 없는 우주에서는 태양마저도 그 크기가 개미만도 못할 것이다. 하물며 태양보다 작은 지구에, 그 지구보다도 훨씬 작은 인간에게, 만약 우주의 사신이 존재한다면, 그 사신이 과연 인간에게 관심을 가져 줄까? 우리가 살거나 죽거나 사신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사신의 입장에서 인간은, 신경 쓰기에는 너무 작고 하찮은 존재니까. 인간은 태어났으니까 살고, 태어났으니까 죽는 게 당연한 생물이니까.

결국, 인간이든 개미든 모든 생물은 똑같이 어쩌다 태어났기에 사는 것이다. 그래, 우린 모두 어쩌다 태어난 별거 아닌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물은 모두 어쩌다 태어나지만,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다 태어나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에, 태어난 모든 생물은 축복받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단 한번 만이지만, 그래도 살아볼 수 있으니까.

생각해보고 느껴볼 수 있는 지능이 있으니까. 자신이 아닌 다른 생물들과 인연(因緣)을 만들 수 있고, 그 인연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특권이 있으니까. 137억 우주의 나이, 46억 지구의 나이에 비하면, 모든 생물은 짧게는 하루, 많아봤자 100년을 살다 영원히 소멸할 너무나도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동안만큼은 살아 숨 쉬며 삶을 살아볼 수 있는 특권이 있으니까.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자신을 위해서 '행복'이란 것을 느껴볼 수 있는 특권이 있으니까.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아름답고 소중하며, 그러므로 모든 생물의 삶은 한 편의 영화이며, 모든 생물은 '자신의 삶' 이란 영화의 주인공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태어나고 부모님에게 사랑받고 성장했던 것처럼, 나의 부모님도 옛날에 나처럼 태어나 나처럼 매일매일 사랑받았을 것이고, 꺄르르 웃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가끔은 혼도 났을 것이고, 나처럼 성장해 성인이 되었을 것이며 그 후로는 더욱 성장해 결혼도 하고 부모님이 되고 시간이 흘러 지금을 살아가시며, 한번 보면 되돌릴 수 없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신의 삶'이란 영화를 감상하고 계시고, 나는 물론 내 친구들 또한 그렇다.

 

그리고, 어린 시절 항상 삐약 거리며 날 따라다니던, 인간에 의해 강제로 교문 앞의 3000원짜리 상품으로 나와서 나와 만났던 노란 새끼 오리 노랑이도 원래는 나와 다를 것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자신의 가족들과 자연 속에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던 주인공이었다. 철없던 나 때문에 밟혀 죽었을 여러 개미 또한 주인공이었고, 나의 수족관 관리 소홀로 인해 죽었던 여러 물고기들도 주인공이었고, 미끄럼틀을 타다가 스트레스로 죽은 병아리도 주인공이었다.

요즘, 수많은 생명을 가족과 이별시키고 세상과 이별시킨 생명 기만의 죄인인 내가, 정작 나의 부모님과의 이별은 두려워하고, 정작 나의 사랑하는 존재들과의 이별은 두려워하고, 정작 내 죽음은 두려워할 자격은 있기나 한 건가 싶기도 하다.

 어차피 앞으로도 내 욕구를 위해 동물의 알과 고기를 망설임 없이 먹을 내가 이런 죄의식을 갖는 것도 웃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전 세계의 생물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해도, '적어도 내 주변에 있었던 생명들 만큼은 좀 더 여유 있게 살게 해 주었어야 했다.', '좀 더 행복하게 살게 해 줬어야 했다.'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돈다.

 

최근 역지사지를 많이 해 보게 되더라. 우연히 유튜브에서 철구와 지혜라는 부부의 가족생활이 담긴 동영상을 몇 편 보게 되었는데, 그 딸이 참 귀엽고 이쁘더라. 동영상을 보고 있으면, 그 부부가 만들어준 음식을 그 아이가 맛없다고 하면 어쩌나,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 싶고, 장난을 치면 재미있다고 깔깔 웃어줬으면 좋겠고, 사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원하는 만큼 사주어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나중에 커서 돈을 만만히 보는 버릇이 생길까 봐 그렇게 해 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이 보이고, 얕은 물에도 다칠까 봐 놀이기구 하나 마음대로 태워주지 못하는 마음도 보이더라.

 

마치 내가 부모라도 된 듯. 그러다 문득 나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나도 부모님 눈에는 그렇게 예뻤겠지. 그래서 먹는 것 하나도 함부로 먹일 수 없으셨겠지.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지만 몸에 나쁘니 사줄 수 없으셨겠지. 나쁜 버릇이 들까 봐 내가 원하는 물건을 마음대로 사줄 수는 없으셨겠지.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내가 즐거워했으면 좋으셨겠지. 한번 자빠지기라도 하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셨겠지.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에게 나는 뭘 해드렸지? 나는 그동안 불평만 했고, 화만 냈고, 고작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드린 게 전부인,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던 이기적인 놈이었는데. 부모님에게 죄송했다. 이 생각을 한 뒤로는, 부모님과 같이 지낼 때 가끔 청소, 빨래, 설거지 등을 했고, 부모님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에 적극적으로 대했고, 가끔 먼저 안부 전화도 드렸는데, 부모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더라.

 

정말 별것 아닌 것만으로도 부모님은 행복해하시더라. 깨달았다. 부모님이 진정 나에게 원하시던 것은 좋은 성적을 보여주는 것도, 돈을 많이 벌어 받은 것 그대로 돌려 드리는 것도 아니라, 그저 '나에게도 부모님이 내 삶의 일부분임을 직접 보여주는 것'을.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내가 조금만 신경 써서 배려하면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가 될 수 있고, 큰 행복이 될 수 있었다.

이제야 깨달았지만,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다. 나중에 소주 한 병 들고 무덤 앞에 찾아가 내 맘 편하기 위해 눈물 뚝뚝 흘린 후 자식 도리를 다 했다고 자기합리화하는 불효는 행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몇달 전, 평소처럼 새벽에 나와 대학교 캠퍼스 안을 뛰며 운동을 하는데, 말라서 흙이 갈라진 왼쪽의 화단으로부터 습기가 꽤 있는 오른쪽 풀숲으로 향하던 길 위의 꿈틀거리던 지렁이가 보였다.

 

'아, 지렁이네'. 그냥 지나치고 뛰었다. 그러다 멈칫하고 돌아왔다. 길 위에서 말라죽은 지렁이들이 떠올랐다.

풀숲까지는 지렁이에게는 꽤 멀었다. 가는 둥 마는 둥 한 지렁이의 속도로 가면 하루가 걸려도 모자를 것 같았다.

 가만히 두면 풀숲에 이르기 전에 뜨거운 해가 떠 말라죽을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서서 지렁이를 쳐다보았다.

풀숲으로 옮겨줄까, 그냥 지나칠까. 그러다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 지렁이였다면 생사의 갈림길에 선 나를 구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겠지. 죽어가는 나에게 누군가 살 기회를 준다면 너무 고맙겠지. 그 지렁이와 마주한 순간, 나는 몇 초만 소비하면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위대한 존재가 될 기회를 가진 사람이었다. 옮겨 주기로 했다.

솔직히 좀 징그럽긴 해서, 손으로 만지지는 못했고, 주변의 얇은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려 젓가락으로 만든 뒤 살짝 집어서 풀숲에 놔 주었다. 그리고 마침 생수통에 물이 남아 있어 지렁이와 땅 위에 뿌려주었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그 지렁이가 살 기회를 얻었는지 아닌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적어도 며칠, 몇 달은 더 살겠지 생각했다. 뿌듯했다. 내 1분 남짓한 시간의 행동이 그 지렁이의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의 생명을 지켜주었다는 생각에. 지렁이도 '기억'이라는 행동을 할 수 있다면, 그날의 나를 평생 잊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 덕분에 어떤 생명이 큰 힘을 얻는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뒤로는, 나에게 시간의 여유가 있는 한, 사소한 노력으로 돕거나 구할 수 있는 일거리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존재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뿌듯함을 느낌으로써 내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나 자신을 위함이기도 했다.

 

내 삶을 돌이켜 보니, 나는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거나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인연을 만드는 것이 가장 뿌듯하고 행복했던 것 같다.

그래. 나는 나를 좋아해 주는 생물, 혹은 내가 좋아하는 생물, 나와 인연이 있는 생물의 삶 속에서 가장 행복했던 장면이나 기억에 남는 장면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문제만 일으키고 거짓말이나 해 대는 밉상인 나를 약 7년 동안 스트레스받으시며 키워주셨던 부모님, 나에게 그렇게 집중해 주신 건, 아마 내가 부모님 삶의 큰 부분이라는 의미겠지,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에는 좋은 기억만 남게 해 드려야겠다. 오래전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친했던 친구, 순간의 화를 풀고 싶어서 말을 좀 심하게 했나 싶기도 하다.

 그 뒤로 서로 연락이 없지만, 그때 내가 조금 더 이해하려 했다면, 더 친해지고 함께 웃는 결말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서먹하더라도 이번 주 안에는 내가 먼저 용서하고 연락을 해 봐야겠다.

과거 내가 키웠던 모든 동물들, 나 때문에 불행했다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냐만, 사죄한다.

나와 다를 것 없는 소중한 생명인데, 내 호기심, 내 재미, 내 기분만으로 가볍게 대해서 너무 후회스럽고 진심으로 사죄한다. 앞으로 만약 어떤 생명을 책임지게 된다면, 함께하는 시간 동안 항상 기분 좋게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생물들이 죽기 직전 회상하기에 딱 좋은 아름다운 기억들만 남기기 위해 바보처럼 착하게 살 수만은 없겠지. 모든 생물들은 지금의 욕구를 위해 살거나, 훗날의 목표 성취감을 위해 살기 때문에, 서로의 욕구나 목표가 부딪쳐 싸워야 할 때는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싸움의 시간이 아름다울 수는 없겠지. 나 역시 과거에 누군가에겐 좋게 기억되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겐 나쁘게 기억되기도 했겠지. 하지만, 46억 년 존재했고 앞으로도 쭉 존재할 지구에서, 많아봤자 100년이라는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인연 하나하나를 가볍게 보지 않고 좀 더 진지하게 대한다면, 자신 주위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행복으로 물들 수 있을 것이고, 행복한 주위로 인해 자신 또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나는 죽게 될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모두 100년이라고 가정하면, 난 아마 약 70~80년 후에 죽게 되겠지. 그래, 내 시한부 인생 선고는 의사가 아니라 자연이 내린 것이다.

모든 살아 숨 쉬는 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시한부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결국엔 남들처럼 똑같이 죽게 될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남들보다 좋은 성적, 좋은 직장, 좋은 결혼, 많은 돈, 명예 등을 위해 아등바등 사는 모습이 바보 같아 보였다. 하지만 결국 내 모습도 다르지 않더라.

사람의 인생이 짧긴 하다만 죽는 날 하루만을 생각하며 살기에는 생각보다 긴 듯하였고, 살아있는 동안 인간 사회 속에서 더욱 큰 힘, 혹은 최소한의 힘을 가지는 지름길은 좋은 성적, 좋은 직장, 좋은 결혼, 많은 돈, 명예 등인 것이 현실이고, 힘을 가져야 내 주위의 사람들, 모든 생물들을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여유와 능력이 생길 테니까. 그리고 주위를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하게 만듦으로써 나 또한 웃을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만 보려고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이런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 같은, 필요한 것이 넘치지는 않지만 부족할 것은 하나도 없는 여유 있는 한량(閑良)이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생물들은 먹이사슬로부터의 생존, 질병으로부터의 생존, 전쟁으로부터의 생존, 테러로부터의 생존, 빈곤으로부터의 생존에 급급할 테니 말이다. 그저 부모님에게 감사할 뿐이다.

 나름 괜찮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게 해 주셨음을. 훗날 최후의 순간이 다가올 때 세상과의 이별은 슬프더라도 너무 억울해하진 말아야겠다. 나보다 덜 행복하게 살다가 사라졌을 생명들이 많을 테니.

 

저는 외국의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한국에 비슷한 나이대에 저와 비슷한 심각한 고민과 생각을 해 보신 분들이 계실까 봐 이 글을 썼고, 오랜 시간의 생각을 담은 글이니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는 욕심에 고려대학교 대나무숲에 제보해 보았습니다.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한 글이라 이해하기 힘들 것 같지만, 시간 내셔서 이 글을 끝까지 봐 주셨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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