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게는 규슈 탄광의 합숙소 벽에 쓰여진 절규입니다.

 

 

머리에는 이가 득실거리고, 등의 상처는 썩어서 심해지고 있었다.
여기서는 조선말을 쓰면 한 끼의 밥을 줄여 버렸다.
밥이라고 해도 콩을 쪄서 안남미와 섞은 것이었다.
국은 소금국으로, 건더기가 없는 것이었다.
목이 말라 갱 내의 붉은 물을 마시면 설사를 심하게 하였다.
그래도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시켰다....(중략)....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라다 조 에서는 서울에서 온 교양있는 집안의 아들이 도망치다가 붙들려 너무 심하게 매를 맞아 미쳐버렸다
-교과서에 실린 징용노동자 체험담
 
 
39년부터 45년까지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113만 혹은 146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탄광·금속광산·토건공사·군수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조건 밑에 혹사당했다.
또한 <근로동원>이란 명목으로 국민학생까지 군사시설공사에 동원했으며,
44년에는 <여자정신대근무령>을 발표,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 수십만 명을 강제징집,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하거나
군대 위안부로 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강제징용된 조선인은 공사 후 기밀유지를 이유로 집단 학살당한 경우도 있었는데,
평양 미림(美林)비행장 노동자 8백여 명, 지시마열도(千島列島) 노동자 5천여 명이 집단학살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남양 지방의 섬에 끌려간 경우에는 일본군의 후퇴와 함께 동굴 속에 가두어져 무참히 학살당한 예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90년 6월 강제징용 한국인 총수를 66만 7천 6백 48명으로 공식 발표했을 뿐,
이들에 대한 어떤 보상도 외면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제징용 [强制徵用]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9.10,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