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맛점들 하셨나요? 저는 지금 햄버거를 손에 들고먹으며 작성 중입니다.
그렇다면 어제 말씀드렸듯이 바로 태풍 작전 시작하죠
(우클릭하면 연속재생이 가능해진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1승 1패였습니다. 독일군은 키예프 포위전을 위해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을 내려보냈고, 물론 이는 거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전력을 돌파해 가면서 수직갱을 뚫듯이 내려가는 상당히 까다로운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은, 비록 사령관이 격렬하게 반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하달된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키예프의 대포위전에 단단히 일조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측면을 치기 위해 브랸스크 전선군을 조직하여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병력은 패잔병이거나 장비가 부족해서 거의 서류상의 병력일 뿐이었고 그나마도 일점 돌파가 아닌 2점 돌파라는 치명적인 실책을 스타브카(Stavka)가 범하면서 반격은 시작하자마자 실패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예비 병력으로 있던 제4군이 후방에서 끌려나와야 했고, 제2기갑집단군처럼 강력한 방어를 갖출 여유는 없었던 이들은 전선의 돌출부이자 모스크바로 나아가는 교두보인 옐냐(Yelnya)를 결국 지키지 못하고 군대를 뒤로 물려야 했습니다.

 이 승리에 스탈린은 크게기뻐했고, 근위사단이라는 명칭을 옐냐 반격작전에 투입된 사단들에게 수여합니다. 이것이 대전 기간 여럿 만들어진 근위사단의 유래가 됩니다(지금도 러시아에는 근위사단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사단들이 여럿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브랸스크

약간의 준비 이후(약 보름) 드디어 공세가 감행됩니다. 이게 그 유명한 태풍 작전(Operation Taifun, 혹은 Typhoon)이죠. 남쪽부터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브랸스크 일대에서 제2기갑집단군의 우익이 감행한 공세는, 기동전과 그 뒤로 이어지는 포위섬멸전의 모범이라 할 만합니다. 전선 돌파, 급격한 기동, 일부는 후방의 적을 저지하면서 전방의 적을 포위, 적의 섬멸로 이어지는 깔끔한 스텝이죠. 사실 어느 정도는 소련군이 박자를 맞춰 주기는 했습니다만.


작전 개시 단 하루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도시인 오룔(Orel, 혹은 Oryol, Орёл)이 - 지금도 인구 30만이 넘는 큰 도시입니다(놀라운 사실은 무려 단 하루 만에 독일군 손에 떨어집니다.)<독소전쟁사>에서는 독일군이 도시에 진입했음에도 아예 시내전차(電車)가 돌아다니고 있을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죠. 얼마나 독일군이 빨리 진격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3일이 지나자 오룔을 기반으로 하여 돌파한 일부 부대는 북쪽에서 몰려오는 적을 막으면서, 서쪽의 포위망을 닫을 준비를 합니다. 물론 소련군의 반격명령이 없던 것은 아니겠지만... 
앞선 글에서 제가 가열차게 소련군을 깠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반격 작전은 이럴 때 쓰라고 있어야 정상인데 이미 예비대고 뭐고 다 소진해버린 브랸스크 전선군이 무슨 수로 반격을 감행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하필이면 샤포시니코프가 후퇴불가 명령을 때려버리는 바람에 기동지연전을 펼칠 기회조차 막혔습니다. 결과야 뭐... 곧 보실 그대로입니다.



다음날이 되자 모루 역할을 담당하던 제2군과 제4군이 슬금슬금 독일군의 좌익에서 소련군의 우익으로 치고 올라가면서 포위망을 닫으려는 시도를 벌이게 됩니다.



3일 후. 남쪽의 포위망은 닫혔고, 북쪽은 간신히 명줄은 붙어 있으되 혈로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열흘 후. 북쪽에서 포위될 뻔한 제50군은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만 남쪽의 제3군과 제13군이 포위 섬멸당할 위기에 처하고, 이들은 문자 그대로의 혈로를 뚫어가면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시도합니다. 물론 독일군 사정상 포위망이 완벽했을 리는 없어서(바르바로사 작전 자체가 얼마나 말이 안됬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죠), 어쨌든 일부 병력이 살아나오기는 한 모양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시면 답이 나오죠.


10월 24일. 아래에 제13군이 살아 있는 걸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쨌든 일부 병력이 살아는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결과로 큰 도시인 오룔이 삽시간에 넘어간 것은 물론이요 오룔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최후의 관문인 툴라가 까딱까딱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에게도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난세는 영웅을 요구한다고 이토록 처절히 밀리던 소련군이지만 빛과 소금처럼 신이 소련을 돕기위해 보낸 장군중에 미하일 카투코프라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인물이 여기서 상당히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도를 자세히 보시면, 독일군의 전과확대(목표지점을 넘어 적의 후방에 이르기까지 밀어붙이는 것)가 10월 6일 이후로 크게 둔화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분명히 돌파하고 최전선의 적이 무력화되어 가는 와중에 기동부대 및 공군이 적의 후방을 강력하게 공습하여 결과적으로 전선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것이 독일군의 장기였는데, 그 구멍을 크게 뚫어버리는 과정이 지금 막힌 것이죠. 어째서 막혔냐 하면, 그걸 막은 게 카투코프라는 말입니다. 가로막힌 지점의 이름은 므첸스크(Mtsensk, Мценск). 위의 10월 6일자 지도를 보면 독일군의 진로방향을 가로막고 있는 웬 소련군 군대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이 카투코프입니다.

이 카투코프가 쓴 전술은 이렇습니다. 보병지휘관인 렐류셴코와 연계해서, 일단 보병이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가로막은 보병은 어디까지나 페이크. 독일군이야 저걸 놔두고 갈 수는 없으니 공군이든 포병이든 동원해서 예비 포격을 감행하는데, 그 틈에 보병은 줄행랑을 쳐서 뒤쪽으로 쭉 후퇴합니다. 그 동안에 길 양 옆의 숲에는 신형전차인 20여 대의 T-34가 매복을 했고, 대충 정리된 줄 알고 달려오는 독일군의 전차를 상대로 기습!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독일군 전차 14대를 박살내는 대전과를 올리면서 성공적으로 독일군의 발을 묶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독일군의 진군을 아예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구데리안의 장갑부대는 꽤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당장 구데리안부터가 놀랐죠. 게다가 여기에서 시간이 질질 끌리는 통에 툴라까지 접근하기도 어려웠고, 여기에 독일군의 두 번째 문제가 더 크게 제2집단군을 덮쳐옵니다. 대대로 러시아를 침략자로부터 지켜주던 2대 명장 중 1명입니다.
누구냐고요?

 라스푸티차였죠

10월 6일에 첫 눈이 내리고, 이 눈이 녹으면서 길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면서 독일군의 진격은 크게 둔화되었습니다. 예상의 3배나 되는 연료를 써 가면서 진군하는 판이었으니 연료가 어디 남아났겠습니까? 그래서 카투코프의 시간 벌기가 매우 중요했던 겁니다. 만일 이 시간 벌기가 없었으면 오룔보다도 더 큰 도시인 툴라가 넘어갔을 테고, 그러면 거리는 좀 멀지만(180 km), 모스크바의 남쪽은 그냥 닫혀버리는 겁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 툴라가 엄청난 공업도시라는 것. 전쟁 기간 내내 군수장비를 생산하고 모스크바의 남측을 보호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니 이 도시가 안 날아간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는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아실 듯합니다.

그러니 카투코프가 영웅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죠. 당시 대령이었던 그는 전쟁을 거치면서 결국 별 다섯 개를 달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그래도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여전히 엄청났습니다. 키예프에 맞먹는 사상자가 바로 이 브랸스크에서 발생했기 때문이죠. 8만의 사망자와 무려 66만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이래저래 양군에게 재앙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브랸스크 이후에 독일군이 툴라로의 공세를 재개한 것입니다.



10월 24일, 그러니까 포위망이 대강 정리되고 난 후, 공격을 시도하기 직전의 제2기갑집단군입니다.



10월 30일. 어쨌든 모스크바의 남쪽 측방을 포위하는 데 있어서 툴라의 점령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계속해서 적을 밀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진격 속도가 진창길이라 많이 더디기는 했지만 어쨌든 툴라를 점령하지 않고 모스크바를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독일군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측면 돌파를 노리고 있었죠. 그러나 이걸 모를 모스크바가 아니었고, 그래서 주코프(당시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넘어옴)가 계속해서 파쇄공격 허가를 요청합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파쇄공격은 적의 공격을 받아내기 위해 적의 공격 전에 공세적으로 나와서 적의 조직력이나 공격 계획 자체를 흔들어버리는, 일종의 방어적인 공세를 말합니다.



그래서 11월 10일이 되자 진격하는 적을 맞아서 파쇄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예로 파쇄공격을 맞이한 사단 중의 하나가 제112보병사단인데, 이 사단은 중부 집단군 예비병력이었고, 그런 탓에 장비가 좀 부실했습니다. 하필이면 대전차화기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사단이 제대로 피를 봤고, 제17기갑사단이 투입되었으나, 소련군의 반격으로 인해 우익이 진격해서 포위망을 닫는다는 시나리오 자체가 틀어져버렸습니다.



11월 27일의 지도입니다. 독일군의 우익이 거의 툴라를 포위하나 싶었습니다마는...


12월 5일의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번의 이 파쇄공격의 전과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우익이 그대로 밀고들어갔으면 적어도 툴라는 꼼짝없이 포위당했을 텐데(여기서 우린 제대로 된 사령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죠), 우익이 밀려버리는 통에 툴라가 비록 돌출부 형식으로 노출되기는 했지만 완벽한 포위 섬멸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군 자체가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전투력이 고갈되어 지나치게 넓은 지점에 산개하게 되면서 별 이상 없이 후방으로 기병사단을(오타아닙니다)하는 데 성공했고, 바로 이 때문에 독일군이 쭉쭉 뒤로 밀려난 겁니다.

여기에 독일군 자체가 병력과 물자의 부족으로 공세종말점에 도달해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카투코프의 힘이 컸고, 그가 독일군의 전과확대 단계를 박살냈으며, 결국 그게 툴라를 지키는 나비효과를 불러온 겁니다.

뱌지마

이번에는 가운데 지점입니다. 이 당시 이미 레닌그라드의 방침은 포위 섬멸전이 아닌 포위전으로 바뀌어 있었고, 때문에 더 이상 레닌그라드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제4기갑집단군이 북부 집단군에서 차출되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쪽의 제2집단군과는 달리 이쪽은 전과확대도 꽤나 성공적으로 거두었습니다.



이게 지금 지도를 확대하다 보니 몇 야전군의 이름이 잘렸는데, 위에서부터 아래로 순서대로 독일군 제9군, 제3기갑집단군, 제4군, 제4기갑집단군, 제2군의 순서입니다. 최북단의 제9군과 최남단의 제2군이 양익을 보호하고, 제4군이 모루 역할을 맡는 동안 양익에서 기갑집단군이 돌파, 섬멸... 이제는 꽤나 익숙해지셨겠죠.(독소전 초반부는 모두 모범적인 포위섬멸의 무한반복입니다)



10월 10일, 각 전선이 밀어붙여지는 전형적인 과정을 거쳐서...



10월 16일, 그 결과로 소련군 제19군과 제20군이 포위됩니다. 당시에 소련군의 반격을 지휘하던 게 그 파블로프가 목이 달아날 당시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영웅인 볼딘 중장이었는데, 여기서도 그는 깨집니다. 데이비드 글랜츠는 <독소전쟁사> 에서 그 원인으로 지나치게 복잡한 지휘 체계와 부족한 통신장비, 그리고 그로 인한 통신 체계의 조기 붕괴를 꼽습니다. 여하간 그렇게 또다시 소련군은 4개의 야전군(19군, 20군 외에 24군과 32군이 같이 걸려들었습니다)을 날려먹는 대참패를 맛보게 됩니다. 뭐 이 이후야 전형적인 포위섬멸전이었고, 역시 포위망은 그리 완벽하지는 않았으며, 일부 병력이 탈출한 것까지 똑같습니다. 같은 전투의 양상이 워낙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지겨울 정도죠.



그러나... 저 지도가 12월 5일 지도인데, 거의 두 달이 되어 가도록 소련군을 얼마 밀어내지 못하고 전선이 거의 고착화되고 맙니다. 물론 원인은 라스푸티차. 여기에 양군의 병력의 소진까지 겹쳐서 더 이상 서로 진군할 수 없었던 겁니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에서 표현을 좀 빌리자면) 마치 계속 난투전을 벌이다가 제풀에 지친 권투 선수처럼 말이죠.

그러나 이 패배 역시 소련군에게는 만만치 않은 비극이었고, 뱌지마 자체가 스몰렌스크와 모스크바 사이의 경로에 있다 보니(약 200 km) 이번에는 모스크바 자체가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스탈린 역시 심각하게 수도를 탈출하는 것을 고려했습니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수도에 남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그는 연설에서는 자기가 수도를 떠날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다고 좀 뻥을 치긴 했습니다만, 그런 선언이 있은 덕에 모스크바의 소요 사태도 어느 정도 가라앉을 수 있었습니다.(9년 후 어느 신생 독립국가의 대통령과는 많이 비ㄱㅛ..)
어쨌든 이로 인해 모스크바로 가는 최후의 관문인 뱌지마가 날아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까지 공격이 닿기는 어려웠습니다.

모스크바의 북익

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 게, 지금까지 이야기를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좀 미심쩍은 데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아니 전황 지도가 저 모양이면 대체 쌍안경으로 첨탑을 봤다느니 어쨌다느니 한 이야기는 다 어디서 나온 거냐? 그걸 본 게 이 북쪽의 이야기입니다. 점점 이야기가 길어지니 빠르게 지도로 넘기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차피 전술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게 없으니까요.



우선 가운데에 있는 칼리닌 전선군을 노리고 제9군과 제3기갑집단군이 공세를 개시합니다. 북쪽을 밀어붙여서, 뱌지마를 거쳐 모스크바로 진군할 집단군의 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죠. 덤으로 자기들이 북쪽에서의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구요. 아, 칼리닌은 현재의 트베리(Tver, Тверь)입니다. 오룔보다 큰 대도시였죠. 괜히 전선군 이름에 칼리닌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닙니다. 사실 원래 트베리였다가 당시 국가 원수였던 미하일 칼리닌(Mikhail Kalinin,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물론 명목상이었고 실권은 당 서기장인 스탈린의 것)의 이름을 따서 칼리닌으로 이름이 바뀐 거긴 합니다만...


이쪽은 포위섬멸전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밀어붙이기 쪽에 가깝긴 했는데, 어쨌든 모스크바 서북쪽에 쳐질 주코프의 방어선을 여차하면 포위할 전력을 갖추었고, 때문에 주코프는 더 뒤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모스크바를 노리고자 했고, 그 결과 모스크바의 북쪽은 고착화됩니다. 그게, 하도 전쟁이 길어지고 꼬일 판이다 보니 모스크바를 노리게 된 거죠. 뭐 여하간 그래서 12월 5일에 가면...



트베리가 점령당한 상태로, 그대로 쭉 북쪽에 전선이 저렇게 형성됩니다. 그러면 그 동안에 독일군이 손 빨고 있었을 리는 없고, 뭔가 움직임이 있었기는 했죠. 그러나 이 시기는 라스푸티차... 덕분에 독일군은 트베리, 그러니까 칼리닌을 접수한 한 달 후인 11월 16일에서야 공세를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독일군은 모스크바 전방 110 km 앞(다시 언급드리지만 여기는 대평원입니다.. 네 고속도로처럼 냅다 달리면 순식간...) 했습니다만.




위의 지도는 11월 16일, 아래 지도는 11월 20일의 것입니다. 모스크바로 가는 최후의 도시, 그러니까 서울로 치자면 마치 판교 일대에 있는 서울톨게이트와 같은, 이스트라(Istra, Истра) 및 그 북익을 보호할 클린(Klin, Клин)을 접수하기 위한 최후의 공세가 펼쳐졌고, 소련군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후퇴해야 했습니다. 

1개 연대 병력이 중대 수준인 150 ~ 200명 가량으로 줄어버리는 엄청난 격전과 피를 흘린 끝에 11월 24일에 마침내 클린을 접수합니다. 기어이 독일군은 모스크바 서북쪽으로 20 km도 되지 않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당시 쌍안경으로 크렘린 관측이 가능했으나 그것이 독일군이 본 마지막 크렘린의 모습이였습니다.) 그러나 포위망 없이 그 큰 도시인 모스크바를 접수한다는 것은, 스탈린그라드의 사례를 생각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대공세도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당시 저기가 모스크바 시내버스의 종착 정류장이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코앞까지 왔단소리죠)



12월 5일이 되자, 위의 선을 끝으로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약
오늘 한 이야기를 종합한 지도를 보여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0.02)


(10.10)


(11.16)


(12.05)

순서대로 된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불과 두 달 가량에도, 그것도 전투력이 꽤나 소진되었음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을 대단히 크게 밀어붙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상하기도 힘든 수의 많은 소련군을 섬멸했고 상상하기도 힘든 수의 많은 소련군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레닌그라드 점령도, 모스크바 점령도, 전쟁의 조기 종결도 모두 실패했습니다.

독일군이 실패한 원인은, 처음에 짚어드린 독일군 자체의 문제가 절반을 차지하고, 또 소련군의 영웅적인 항전이 나머지 절반을 차지합니다. 소련군은 결코 얻어맞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이 라스푸티차와 추위 때문에 졌다는 것은 절반, 아니 1/4만의 사실일 뿐입니다. 소련군은 엄청난 피를 흘렸지만, 결국 전쟁을 질질 끄는 데 성공함으로써 독일군이 그들이 가진 물자와 병력을 모두 소진하고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지게 만드는 큰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 보이기에는 엄청난 패배를 당한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리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독일군이되 독일군은 이겼으나 졌고, 소련군은 졌으나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칼자루를 독일군이 쥐고 있던 것은 여전히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비극은 한참 동안 더 이어지게 됩니다. 

쓰고 나서 보니... 순서가 잘못됬네요;; 남부집단군을 먼저 작성하고 중부집단군편을 올리면서 바르바로사를 깔끔히 마무리 하는게 순서가 맞긴한데.... 아무튼 바르바로사 작전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고 이에 고무되다 못해 최음제를 박스단위로 퍼마신 스탈린은 무리한 공세명렁(여태까지 주구장창 독일에게 깨진건 소련군이 아니였나봅니다)으로 그 유명한 르제프의 참사(오죽했으면 별명이 고기분쇄기)를 만들어냅니다..(물론 소련군 수뇌부조차 큰 반대를 안했습니다 오히려 동조한 편) 하지만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아직 독일군은 건재하며 지금의 소련군 능력으론 버거운 상대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을 도출합니다(이때부터 슬슬 스탈린이 군부에 간섭하기를 망설입니다. 물론 망설인다고 했지 안한다곤 안했습니다.)

이렇게 중부집단군 편도 마무리가 되었군요
이제 남부집단군 편만 연재하면 그 유명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원인!

청색작전

을 할 것 같지만! 
사실, 청색 작전과 바르바로사 작전 사이의 텀이 상당히 깁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종료일이 12월 5일인데, 청색 작전의 개시일은 6월 28일이거든요. 물론 청색 작전이 입안되기까지의 전장 상황을 고려해볼 때 프롤로그로 적어도 석 달 정도는 봐야 할 판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석 달이 남습니다. 워낙 이 사이의 긴 텀을 무슨 능구렁이 담장 넘어가듯이 넘어가서 그렇지, 이 기간 중에도 특기할 만한 치열한 전투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괜히 역대 최악의 전쟁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바르바로사 이후 바로 위에서 언급한 무리한 공세와 르제프 전역을 다루고(르제프 분량만 해도 바르바로사편이랑 엇비슷할 것 같지만....) 마지막으로 세바스토폴을 다룬 뒤에야!(아마 1~2달 걸릴 것 같습니다) 청색작전에 돌입하겠네요

왜 이리 분량이 토가나오지 하시는 분들은 잘 생각해보십쇼 모항목인 제2차세계대전을 제외하면 독소전쟁보다 큰 스케일의 전쟁은 여태까지의 인류사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사실 스케일만 보면 별개로 봐도 좋을정도)

이제 3차하르코프 와 쿠르스크 이후 대공세까지 하면 17년이 종료될것만같은 느낌적인 느낌은 무시하도록합시다!
그럼 이만 글을 줄이도록 하며 전 물러나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