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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그 악명높은 이완용을 대담무쌍하게 칼로 찌른 의사로 유명하다.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1907년에 귀국하였다. 1909년 1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로 하였을 때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하지 못했다.

'백범일지'에 명동성당 의거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있다. 김구가 황해도 재령군에 있었을 때 이재명이란 자가 총을 쏘며 난리를 피우면서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났는데 백범과 노백린은 이재명이 단순히 자기 말을 안 듣는 아내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고 그의 총을 빼앗아 기차를 타고 가버렸는데 의거 이후 그것이 이완용을 척살하기 위한 무기였음을 알고 크게 안타까워 했다 한다. 사실 말하자면 이재명이 자신이 이완용을 죽이겠다 하자 그의 아내는 만류하였고 이재명은 이 계집이 나라가 중한 것을 모른다고 화를 낸 것. 그리고 나서 나중에 이완용이 칼빵을 당하고도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후회했다는 말이 있다.

그 후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죽자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을 처단하기로 하였다(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이, 송병준은 이동수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결정).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이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이재명은 신문을 보고 이 정보를 입수한 뒤 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11시 30분에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의 허리, 어깨를 칼로 3번 찔렀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과 이재명 사이를 막아섰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고, 부상 당한 이완용은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병원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게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1호이다. 이게 통탄할 노릇인 것이, 이때 이완용을 치료한 의사가 말하기를 "외과기술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날 죽었다.


재판정에서 이재명은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라며 고함을 쳤다. 재판장이 다시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 "2천만이다!"라고 답하자 창밖에서 “옳소!"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한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라고도 했다.

 

 


1910년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란 말을 남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비록 이완용 암살은 실패했지만 그의 칼침은 유효해 결국 이완용을 폐렴으로 괴롭히다 더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