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콜론 보고서 ' 는 당시 한국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습니다.


" 젊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또 양심이란 것을 지키는 사람은 전부 소외되거나 배척되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머지 않아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 


이처럼 1950년대 말 한국은 정말 심각한 정치 및 경제 위기에 빠져있었으며, 경제 위기로 인해 한국은 미국이 제공한 원조에 의존해 성장을 해왔습니다.

미국의 원조 비중은 1957년에서 1961년 기간에 국민 총생산(GNP)의 13-14% 였으며, 재정 규모에서는 50% 를 넘나들었을 정도였으니깐요.


미국이 제공한 원조를 받고 있었지만 1950년대 말부터 미국의 원조가 급속히 감소하면서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1957년 3억8천만 달러에 이른 미국의 원조액은 1959년에는 2억 2천만 달러로 줄어들게 된 것이죠.

이렇게 미국 원조 감소와 과잉투자로 인해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게 되면서 1960년 총실업률이 34% 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생활고뿐 아니라 독재 정권의 억압 정책으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당시 이승만의 자유당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써 암묵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계속 곪고 곪다가 결국 썩어서 터져버린 사건이 1960년 3월 15일날 치뤄진 제 4대 정·부통령 선거였습니다.

이 부정선거에 반발해서 학생들을 시작으로 국민들까지 일으킨 혁명이 바로 ' 4.19 혁명 ' 입니다



5.18 민주화 운동
유신체제의 폭압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은 1979년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 더욱 더 민주화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
그러나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국민이 열망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게 되자 1980년 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어서 5.17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광주에서는 비상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명이 모였는데, 군부대의 진압과정에서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과잉 진압으로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살상.
다음날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하여 5.18 민주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생.

6월항쟁

1987년 4월 13일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핵심내용으로 하는「4·13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사회 각계 인사들의 비난 성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해 5월 27일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이 연대하여 형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었다. 이후 국민운동본부는 육십항쟁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공식성명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의 분노는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 제1대 ~ 3대 대통령

 · 출신지 - 황해남도 평산

 · 생몰 -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

 · 재위기간 - 1948년 7월 24일 ~ 1960년 7월 24일

박정희

 · 제5대 ~ 9대 대통령

 · 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

 · 생몰 -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

 · 재위기간 -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전두환

 · 제11대 ~ 12대 대통령

 · 출신지 - 경상남도 합천

 · 생몰 - 1931년 1월 18일 ~

 · 재위기간 -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노태우

 · 제13대 대통령

 · 출신지 - 대구광역시

 · 생몰 - 1932년 12월 4일 ~

 · 재위기간 -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이명박

 · 제17대 대통령

 · 출신지 - 일본 오사카

 · 생몰 - 1941년 12월 19일 ~

 · 재위기간 -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박근혜

 · 출신지 - 대구광역시

 · 생몰 - 1952년 2월 2일 ~

그동안 주류세력은 대한민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생겨난 신생국중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해 왔다. 그러나 박근혜게이트는 촛불의 외침처럼 “과연 이게 나라이기나 한 것인가?”를 자문하게 만들고 있다. 촛불혁명은 가장 표층인 ‘사건사’측면에서는 박근혜게이트로 표출된 박정희체제가, 중간수준에는 87년 헌정체제가, 심층에는 97년 IMF사태에 따라 생겨난 헬조선과 흙수저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박근혜게이트와 촛불혁명은 해방 70년사와 민주화 30년, 신자유주의 20년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만들고 있다. 이와 관련, 이번 사태가 해방-정부수립 70주년, 민주화 30주년, IMF경제위기 20주년에 터진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아가 박정희신화와 87년체제, 그리고 “돈 많은 부모를 만난 것도 실력”인 97년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공화국을 구상하도록 만들고 있다. 2017년 체제는 촛불시위에서 한 여고생의 말대로 “사람을 돈과 이익으로 환산하지 않고 경쟁 속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살아가는” 탈신자유주의체제이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권력남용에 대한 불만으로 지난 2016년 10월부터 시작하여 연이어 일어난 시위들에 대해 대한민국 언론은 "촛불 혁명"이라 표현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최근에 이와 같이 광범위하게 연대하고 단합하여 집단적으로 시위를 전개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에 대한 정부의 민주적 책임성과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에 근거한다면 대한민국 언론의 이와 같은 표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번 시위는 지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최대의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0월 29일부터 12일 10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서울 광화문 광장과 지방 주요 도시에서는 수십만 명의 인파가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와, 대통령 최측근이자 "친구"로 통하는 최순실을 포함한 모든 측근들의 범죄 혐의들에 대한 즉각적인 수사를 요구했다.

이번 시위 참가자들은 지난 80년대 민주항쟁 시기를 대표했었던 노래들을 불렀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시위에 나선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권위주의에 맞섰던 자랑스러운 투쟁들을 기억해 내었고, 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났던 과거 속의 "큰 변화의 시기"로 돌아갔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이번 시위는 국가적으로 큰 갈등과 폭력이 수반돼곤 했던 과거의 대규모 시위들과는 달리 "촛불 혁명"이란 표현 그대로 별다른 인명피해도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대한민국 정치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가의 주요 정치적 변화와 민주적 발전에는 국민들의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960년 4월 혁명은 수백 명의 희생을 초래했으며, 이 중 대다수는 대학생들이었다.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으로 시위에 나선 이들 중에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고 사망한 사건은 국민들의 분노를 크게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1987년 고문 치사사건의 희생자인 서울대학교 학생 고 박종철군과 대규모 시위 중 사망한 연세대학생 고 이한열군은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대표적인«순교자»가 되었다. 이들이 흘린 거룩한 피는 당시 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켰으며, 시위대를 정부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게끔 이끌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대통령임기 5년이 국민입장에선 참 긴 시간이다. 두번이면 세대가 바뀌어버리니까. 아직 한참 어리고 이른 나이지만 

다음세대를위한 투표란 생각도 해봐야하는것 아닐까 하고말이죠. 

그래서 적폐청산or적폐세력이 싫어하는것.

최우선의 기준으로두게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선배님들중엔 얼굴도모르는 후세대를위해 나라를위해 희생하신분들이 계셨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