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가 본 중세 일본의 기상천외한 풍습 3가지


조선통신사는 1404년(태종4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된 후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단을 일컫는다. 이들은 처음에는 왜구근절을 목적으로 파견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국교회복, 문화교류 등 그 목적이 더욱 다양해졌다. 조선통신사는 1811년(순조 11년)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한 것이 마지막이었으며, 이후 서양의 침략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는 쇠퇴하였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대해 기록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일본의 풍습에 관한 내용이 많은데, 전국시대, 임진왜란 전후 등 일본에 전란이 만연했던 시기에 조선통신사의 왕래가 이루어졌으므로 그만큼 역동적이었던 일본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임진왜란의 주역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일본도 비로소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한일 간 문화교류도 절정에 이르렀다.

강재언이 쓴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가깝고도 먼 이웃인 일본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를 조금 더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은 제공해 주고 있다.


1. 무로마치 시대의 왜인 해적

“소 긴의 배에 탄 여러 사람들이 ‘그들은 해적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돛을 멈추고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작은 배를 돌려보내 호송선을 부르도록 한 다음 갑옷을 입고 활을 잡았다… 나도 갑옷을 입고 호송선을 기다렸다.”  (책 '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 강재언 저)

조선통신사 초창기, 일본으로 가는 여정은 안전하지 않았다. 조선 임금이 일본 쇼군에게 전하는 국서와 예물을 노리는 왜인 해적들이 대마도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국할 때도 일본 쇼군에게서 받은 국서와 예물을 싣고 갔기 때문에 노략질을 당할 위험은 늘 존재했다. 따라서 일본측 호송선의 도움이 필요했다.

당시 일본의 지배세력인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력이 강하지 않아서 해적이 들끓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남북조를 통일하고 내란을 수습하긴 했지만, 지방 호족들과 해적들은 여전히 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인 해적들은 각 세력권에 대한 상호 존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통신사 송희경은 “동쪽으로부터 오는 배가 동쪽의 해적 한 명을 태우고 있으면 서쪽의 해적이 해치지 않는다. 서쪽으로부터 오는 배가 서쪽의 해적 한 명을 태우고 오면 동쪽의 해적 역시 그 배를 해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돈을 지불하고 동쪽 해적 한명을 태웠는데, 그 해적이 그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해적에게 부탁하여 조선통신사에게 묵을 장소까지 제공하기도 했다.

송희경은 왜인 해적들이 단순히 빈곤해서 노략질을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았다. 해적들이 사는 지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매우 풍족한 농촌지대였다. 그는 무로마치 막부의 통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며, “만약 현명한 임금이 나와 선정을 베푼다면 빈천한 상태에 놓인 백성들이 모두 양민으로 바뀔 것”이라고 개탄했다.


2. 조선통신사 초기 일본의 성 풍속

“일본에서는 남북조의 내란이 수습되었다고는 하지만 호족 사이에 반목과 다툼이 계속되었다. 무력 충돌 때문에 많은 남성이 죽었기 때문에 남녀간의 성별 균형이 무너졌을 정도였다.”  (책 '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 강재언 저)

조선통신사가 처음 일본에 파견된 1400년대 초는 일본의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무로마치 막부가 막 들어선 시점이었다. 오랜 전쟁의 후유증이 일본 전역에 만연하였고, 많은 남성들이 죽어 여초현상이 심각했다. 당시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송희경은 ‘일본행록’에 실린 ‘일본의 기이한 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여자가 남자보다 두 배나 많다. 이 때문에 거리에 있는 가게에 나가보면 유녀는 옷을 반쯤 벗은 상태이다. 음란한 풍속이 크게 유행하여 유녀는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나와서 길을 막으며 자고 가라고 청하는데, 옷을 잡아끌기까지 한다.”  (책 '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 강재언 저)

하루는 송희경이 시모노세키의 젠넨지(全念寺)를 구경했는데, 그곳에서 젊은 비구니가 비구와 동숙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다.

“삼보라(三甫羅)는 절 문 밖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이 절의 중과 비구니는 항상 불전에서 같이 자고 있다. 그 나이 젊은 중과 비구니는 서로 범하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비구니가 아이를 가지면 그의 부모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낳은 뒤 불전에 돌아옵니다. 그러면 3일 후 여러 비구니들이 와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청합니다.’”  (책 '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 강재언 저)

송희경은 일본의 개방적인 성 문화에 매우 당황했다. 유교 문화가 강했던 조선의 관리였던만큼 그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3. 1607년 단오절의 칼싸움 “축제”

“대개 일본이라는 나라의 풍속은 사람을 잘 죽이는 것을 담용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살인을 많이 하는 자는 비록 저잣거리의 천한 사람일지라도 그 명성이 드높다… 그 삶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즐겨하는 풍속이 이와 같다.” (책 '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 강재언 저)

1607년(선조 40년) 단오절(5월 5일)에 에도(지금의 도쿄)에 있었던 조선통신사 일행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다짜고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칼과 창으로 서로 마구 베거나 찌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조차 일반적이지 않은 풍습이었던만큼 진기했던 이 사건은 조선통신사의 기록에 의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멀리에서도 장정들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여든다. 그들은 창과 칼을 메거나 들고 시위를 벌인 다음, 수천 명씩 떼를 지어 진을 치고 대치한다… 각 편은 정예를 내보내 칼싸움을 한다.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는데 서릿발 같은 칼날이 부딪쳐 불꽃을 튀긴다. 서로 앞다투어 죽이고, 죽는 사람을 봐도 굳세게 나아간다… 죽은 자가 많게는 40여 명에 이르렀다. 그 밖에도 어깨가 잘리고 다리를 베여 상처를 입고 돌아온 자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 싸움은 죽인 자의 숫자로 승부가 정해진다.”  (책 '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 강재언 저)

기록에 따르면 일본 전 66주에서 서로 싸움을 했다고 한다. 교토만이 예외였는데, 싸움 대신 무늬 선반을 이용한 연극 놀이를 했다. 당시 조선통신사들이 묵고 있던 숙소 근처에서도 싸움이 벌어졌는데, 일본 측 관리들이 외국 사절단에게 이런 광경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요란스럽다면 금지하겠다고 물어보았다. 조선통신사는 “나라의 풍속이므로 금지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답했다. 이 역시 우리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