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집단군은 그런대로 순조로운 진격을 하고 있었는데, 라트비아를 지나 에스토니아에 접근하자 거의 끊겨버린 항공지원과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서 무려 한 달 반 가량을 에스토니아에 발이 묶인 채 극심한 소모전을 치러야 했습니다. 7월 9일에 러시아의 프스코프를 점령하면서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을 닦아놓았지만 그대로 진격하다가는 에스토니아 방면에서 밀고들어올 소련군에게 후방을 위협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스토니아의 소련군 일대를 문자 그대로 wipe out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고, 이 와중에 병력을 긁어모은 소련군의 반격이 크리티컬로 터지기까지 하면서 탈린 공방전을 8월에 들어가서야 시작하는 판이 되었고, 그나마도 소련군의 저항이 격렬했기에 탈린을 점령하고 레닌그라드로 진격했을 때는 이미 9월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히틀러는 시가전에서 입을 전차의 손실이 어마어마하리라고 예상해서 함부로 시가전에 돌입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고(뒷날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대혈투를 생각해 볼 때 히틀러의 이 조치는 충분히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시민들을 살려둘 필요는 없다 하여 레닌그라드를 아예 굶겨죽이는 작전이 입안, 실행됩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영웅적인 저항과 처절한 버티기로 레닌그라드가 독일군 손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죠.

중부집단군 또한 민스크와 스몰렌스크를 순식간에 점령하며 소련군을 문자 그대로 지도에서 지워버리며 모스크바행 고속도로를 뚫어 달린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스몰렌스크 부근에서 소련군의 처철한 저항을 이겨내며 비록 점진적이지만 진격속도가 느려지고 사망자는 누적됩니다.(키예프에서 또 한번 시간이 끌린 것도 크고요.)
또한 엘냐에서의 기습적인 패배, 미하일 카투코프의 발목잡기, 때마침 모스크바 방위를 맡게 된 그 유명한 "게오르기 주코프"의 적절한 파쇄공격 등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길은 마냥 어렵기만했습니다.
결국 모스크바 앞 3~40km까지 진격하여 크렘린을 관측할 수 있을정도까지 왔으나 때마침 닥쳐온 소련의 동장군, 라스푸티차로 인한 보급난항 소련군의 처절한 저항으로 인해 결국 그곳에서 공세종말점을 맞이하게되었습니다.

작전개시 당일의 전투서열 - 독일군

남부 집단군 및 그와 대치하던 남서부 전선군의 바르바로사 작전개시 당일 전투 서열입니다. 아, 이게 적다 보니 이 바닥을 파 본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만한 이름들이 상당히 많고, 또 규모가 만만치 않아서, 구분선을 좀 넣었음을 알립니다.

독일군 남부 집단군(Heeresgruppe Süd) : 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참모장 게오르그 폰 조덴슈테른 대장(3성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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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기갑집단군 : 사령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상급대장
  제14차량화군단 : 사령관 구스타브 안톤 폰 비터스하임 보병대장
   SS사단 비킹(Wiking) : 사령관 펠릭스 슈타이너 SS중장. 영화 〈몰락〉의 패러디 장면에서 슈타이너 어쩌구 할 때의 그 사람.
   제9기갑사단
   제16기갑사단 : 사령관 한스-발렌틴 후베 소장
  제3차량화군단 : 사령관 에버하르트 폰 막켄젠 기병대장. 1차대전 당시 동부 전선에서 활약한 아우구스트 폰 막켄젠의 아들입니다.
   예하 1개 기갑사단, 2개 보병사단
  제29군단 : 예하 2개 보병사단
  제48차량화군단 : 사령관 베르너 켐프 기갑대장
   제11기갑사단 : 사령관 루드비히 크뤼벨 소장
   이외 예하 2개 보병사단
  직속 예비 1개 기갑사단, 2개 보병사단
  직속 예비 SS경호친위대사단 아돌프 히틀러(일명 LSSAH) : 사령관 제프 디트리히 SS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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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야전군 :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
  제17군단 : 사령관 베르너 키에니츠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제44군단 : 사령관 프리츠 코흐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직속 예비 제55군단, 1개 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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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야전군 : 사령관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보병대장
  제4군단 : 사령관 빅토르 폰 슈베들러 보병대장
   예하 5개 보병사단
  제49산악군단 : 사령관 루드비히 퀴블러 산악대장
   제1산악사단 : 사령관 후베르트 란츠
   이외 예하 2개 보병사단
  제52군단 : 예하 1개 경보병사단
  직속 예비 2개 경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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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야전군 : 사령관 오이겐 폰 쇼베르트 상급대장
  루마니아 파견군
   1개 보병사단(독일군 소속)
  루마니아 산악군단
   예하 3개 산악여단, 1개 기병여단, 1개 보병사단(루마니아군 소속)
  제11군단 : 사령관 요아힘 폰 코르츠플라이슈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독일군 소속), 2개 보병사단(루마니아군 소속), 1개 기병여단(루마니아군 소속)
  제30군단 : 사령관 오이겐 오트 중장
   예하 1개 보병사단(독일군 소속), 1개 보병사단(루마니아군 소속), 1개 기병여단(루마니아군 소속)
  제54군단 : 사령관 에릭 한센 기병대장
   제50보병사단 : 사령관 카를-아돌프 홀리트 중장
   이외 예하 1개 보병사단
  직속 예비 1개 보병사단, 1개 기병군단(루마니아군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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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군 직속 예비
  제34특수군단
   예하 1개 산악사단, 3개 보병사단
  제51군단 : 사령관 한스 볼프강 라인하르트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직속 예비 1개 경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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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집단군에 배속된 전차사단 5개 + 차량화사단 2개 (cf. 북부 집단군 전차사단 3개 + 차량화사단 2개)
남부 집단군에 배속된 전차 726대 (북부 집단군 615대)
 3호 전차 355대 (북부 집단군 238대)
 4호 전차 100대 (북부 집단군 80대)

담당하는 범위가 넓기도 해서 그렇겠습니다만 남부 집단군은 주력인 중부집단군 수준의 병력을 보유하였습니다. 여기에 헝가리군은 명단에서 빠져 있는데... 작전 개시 당일에는 루마니아고 독일이고 헝가리가 바르바로사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 보았습니다만, 친독파가 장악하던 헝가리의 군부가 바르바로사 작전에 헝가리가 참여하는 것을 강력하게 밀어붙였죠. 그래서 작전 개시 전날에 헝가리 외교부는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6월 26일에 소련군 표식이 박힌 항공기가 헝가리령의 카사(Kassa, 現 슬로바키아의 코시체, Kosice)와 문카치(Munkács, 現 우크라이나의 무카체베, Мукачеве)를 폭격하자 즉각 소련을 상대로 선전 포고를 단행합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 p. 80의 지도 3에 따르면 이 헝가리군이 진군한 것은 독일 제17야전군과 루마니아 제3군의 사이였다는군요.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루마니아는 소련이라면 아주 이를 득득 갈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40년 7월에 소련이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넣어서 삥... 아니, 현 몰도바 일대인 베사라비야 및 현 우크라이나 서북부의 일부인 부코비나를 할양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이죠. 그러니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 루마니아가 아주 이를 갈며 진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군의 수준은 독일군이나 소련군에 비해서는 좀 떨어졌을지언정.

잠시 분위기도 환기할 겸 하여, 굵은 글씨로 처리한 인물들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어디에서 등장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독일군의 배치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 말이 필요없는 독일군 최고의 원로 중 한 명. 프랑스 전역에서 주공인 A집단군의 사령관을 맡음. 대서양 방면의 방어도 담당.

게오르그 폰 조덴슈테른 - 룬트슈테트의 참모장. 만슈타인이 참모장에서 잘리고 후방의 제38사단으로 좌천되었을 때에 참모장을 맡은 인물. <전격전의 전설>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이름난 신중파.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프랑스 전역에서 기갑집단군의 군단장을 맡은 인물. 본래 병과는 기병과. 발칸 반도에 독일군이 진격할 때 사령관을 맡은 바 있습니다. 이후 그의 기갑집단군은 클라이스트 기갑집단군(Panzergruppe Kleist)이라 하여 꽤나 유명해졌으며, 훗날 만슈타인과 같은 날에 해임당합니다.

펠릭스 슈타이너 - 언급했듯이 영화 〈몰락〉을 통해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겁니다. 히틀러가 있는 베를린을 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는데, 설령 명령을 따랐다고 해도 자살돌격이 되었을 것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죠. 바로 이 때문에 히틀러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었구요(영화 대사 - Das war ein Befehl! Der Angriff Steiner war Befehl! - 그것은 명령이었다! 슈타이너의 공격은 명령이었다고!). SS기갑군단장을 맡았음에도 용케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무혐의로 풀려난 것으로 보아 개인적으로는 파울 하우서처럼 전쟁범죄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었고, 이후에 SS를 변호하는 책을 내면서 역사가들에게 푸짐하게 욕을 먹기도 하죠. 애시당초 그 막장 집단인 SS의 사령관을 맡았다는 점에서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하위 부대의 전쟁범죄 행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혐의는 매우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한스 발렌틴 후베 - 독일군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인 발터 모델(Walter Model)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훗날 카미아네츠-포딜스키(독일식으로는 카메네츠-포돌스키)에서 포위되어 전멸 위기에 처한 군을 용케도 빼낸 것으로 유명합니다(이게 바로 그 유명한 후베 포켓). 헌데 전쟁기간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어이없이 사망.

제프 디트리히 - 나치 당 돌격대(SA)를 숙청한 사건인 일명 〈장검의 밤〉 사건의 핵심 인물. 이후 아르덴 대공세에서 공격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발터 폰 라이헤나우 - 군 내에서 가장 나치에 충성하고 가장 나치와 가까웠던 독일군의 원수. 심장마비로 급사하는데, 이 인물의 참모장으로 있던 사람이 제6군의 사령관으로 승격하고, 이 부대가 스탈린그라드에 끌려들어가면서... 아, 그 인물이 바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되겠습니다.

카를 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 발키리 작전 적극 가담자. 프랑스의 SS를 모조리 잡아들이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암살 실패가 확정된 후 상관인 귄터 폰 클루게가 허락하지 않자 별수없이 잡아들인 SS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고, 이후 자살을 기도하나 실패, 처형됩니다.

카를 아돌프 홀리트 -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을 구원하기 위한 겨울폭풍 작전의 홀리트 분견군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사령관 되겠습니다.


작전개시 당일의 전투서열 - 소련군

남부 집단군에 대응하는 소련군은 남서 전선군과 독립된 거대 군단이었던 제9군이었습니다. 이 제9군이 인근의 야전군과 합쳐지면서 남부 전선군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집단군이 만들어진 것인데, 이렇게 집단군으로 만들어진 것은 독소전 발발 직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6월 22일 당일에는 남부 집단군이라는 건 없었다는 말이죠.

독일군과는 달리 소련군의 자료는 일단 맨 말미에 적어둔 출처인 독일 사이트처럼 한 군데에 잘 몰아넣은 사이트가 없고, 일일이 러시아 어 위키피디아를 뒤져야 할 판이라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단 수는 또 엄청나게 많고 그나마도 러시아 어 위키백과에 모두 등재된 것도 아니라서, 사실상 독일군처럼 완벽하게 자료를 싸그리 정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물론 시간이 충분히 투자된다면야 가능한 이야기겠지만.....한 1주일 정도를 여기에 매고 있으면 충분할까요?). 주요 전투와 야전군 단위의 사령관 및 참모장의 약력을 전장 지도까지 기가 막히게 엮어 놓은 사이트를 찾기는 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군단 이하의 단위는 일일이 찾아야 하더군요. 뭐 어쨌건, 이 남서 전선군과 제9군에도 중요한 장군이 몇몇 있었으니...

소련군 남서 전선군(Юго-Западный фронт) : 사령관 미하일 페트로비치 키르포노스 상장(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Кирпоно́с, 당시 나이 49세).
참모장 막심 알렉세예비치 푸르카예프(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중장
담당 구역 : 브오다바(Włodawa, 現 폴란드-벨라루스-우크라이나 3국이 만나는 폴란드측 국경) - 카미아네츠-포딜스키(Кам'янець-Подільський)
사령부 위치 : 키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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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군 : 사령관 막심 이바노비치 포타포프(Потапов,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소장, 사령부 위치 : 루츠크(Луцьк)
  제15소총군단 : 사령관 이반 이바노비치 페듀닌스키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제27소총군단 : 사령관 P. D. 아르테멤코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9기계화군단 : 사령관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소프스키 소장
   제20전차사단 : 사령관 미하일 카투코프 대령
   이외 예하 1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제22기계화군단 : 사령관 세묜 미하일로비치 콘드루세프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직속 1개 기갑여단, 4개 포병연대, 2개 방공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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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군 : 사령관 이반 니콜라예비치 무지첸코(Музыченко, Иван Николаевич) 중장, 사령부 위치 : 리비우(Львів)
  제6소총군단 : 사령관 I. I. 알렉세예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37소총군단 : 사령관 S. P. 지빈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5기병군단 : 사령관 F. V. 캄코프 소장
   예하 2개 기병사단
  제4기계화군단 : 사령관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블라소프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제8기계화군단 : 사령관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랴비셰프 소장 (6월 22일 저녁에 제26군에서 소속이 변경됨)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제15기계화군단 : 사령관 I. I. 카르페조 소장 (6월 22일 저녁에 제26군에서 소속이 변경됨)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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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군 : 사령관 표도르 야코블레비치 코스텐코(Костенко, Фёдор Яковлевич) 중장, 사령부 위치 : 보리슬라우(Борислав)
  제8소총군단 : 사령관 M. G. 스네고프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1개 산악소총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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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군 : 사령관 파벨 그리고리예비치 포네델린(Понеделин, Павел Григорьевич) 소장, 사령부 위치 : 스타니수아포프(Stanisławów, 現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란키우스크,  Іва́но-Франкі́вськ)
  제13소총군단 : 사령관 N. K. 키릴로프 소장
   예하 3개 산악소총사단
  제17소총군단 : 사령관 I. V. 갈라닌 소장
   예하 1개 소총사단, 2개 산악소총사단
  제16기계화군단 : 사령관 A. D. 소콜로프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령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직속 1개 기갑여단, 4개 포병연대, 2개 방공대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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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령부 직속 배치
  제31소총군단 : 사령관 안톤 로파틴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36소총군단 : 사령관 P. V. 시소예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49소총군단 : 사령관 이반 알렉세예비치 코르닐로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55소총군단 : 사령관 콘스탄틴 코로테예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1공수군단 : 사령관 M. A. 우센코 소장
   예하 3개 공수여단
  제19기계화군단 : 사령관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페클렌코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령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제24기계화군단 : 사령관 A. V. 쿠르킨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령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그 외 사령부 직속 각종 여단 다수 및 항공대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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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 전선군 소속이 아닙니다!
 독립군단 제9군(9-я армия) : 사령관 야코프 티모페예비치 체레비첸코(Я́ков Тимофе́евич Черевиче́нко) 중장
 담당 구역 : 現 루마니아 - 몰도바 국경
 사령부 위치 : 오데사(Одеса)
  제14소총군단 : 사령관 다니일 그리고예비치 예고로프 소장 (감옥에서 옥사한 알렉산데르 예고로프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예하 2개 소총사단
  제35소총군단 : 사령관 I. F. 다시체프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제48소총군단 : 사령관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노프스키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1개 산악소총사단
  제2기병군단 : 사령관 파벨 알렉세예비치 벨로프 소장
   예하 2개 기병사단
  제2기계화군단 : 사령관 Y. V. 노보셀스키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령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제18기계화군단 : 사령관 P. V. 볼로흐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령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이외에 전쟁 발발 직후 남부 전선군이 새로 만들어질 때 제7소총군단(예하 3개 소총사단), 제9소총군단(예하 2개 소총사단, 1개 기병사단), 제3공수군단(예하 3개 공수여단), 제47소총사단이 추가됩니다.

키르포노스 상장의 나이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 국군이라면 기껏해야 중령 정도를 달 나이에 별을 무려 세 개나 달고 있을 정도로 소련군의 수뇌부는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절대적인 원인 중 하나는 당연히 대숙청이고 또 하나는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붉은 군대의 폭발적인 양적 증가... 이런 식으로 갓 원숙기에 접어든 장교를 상장, 중장, 소장으로 초고속 진급시키고도 모자라서 대령이 사단장을 맡는 등(당장 위의 미하일 카투코프의 경우가 그렇죠)의 황당하리만치 심각한 인력 부족 현상은 당시의 붉은 군대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숙청으로 투옥된 장교들을 대거 복권(ex.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시켰음에도 불구하구요.

어쨌든 보다시피 규모도 규모지만 그 유명한 독소전에서 손에 꼽는 명장이라 할 만한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와 로디온 말리노프스키가 끼어 있고, 훗날 기갑부대 원수의 직위에까지 이르는 미하일 카투코프도 당시에 남서부 전선군에 있었으며, 독소전 기간 소련 최악의 반역자인 블라소프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남서 전선군의 사령관인 키르포노스 상장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는데, 그는 독일과 소련의 전쟁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스탈린에게 들키면 모가지가 날아갈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의 NKVD 병력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으며, 독일군이 집결하자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이 덕에 초반에 패퇴하기는 마찬가지였어도 그 과정은 북서 전선군이나 서부 전선군과는 크게 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규모에 좀 주목하실 필요가 있는데, 독립군단인 제9군을 제외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서 전선군의 전력은 소총사단 26개, 산악소총사단 6개, 기병사단 2개, 차량화소총사단 8개, 전차사단 16개에 직속으로 각종 여단과 항공지원까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병력을 모아놓고 있었습니다. 북서 전선군이 고작 4개의 전차사단과 2개의 차량화소총사단, 17개의 소총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갑절 이상의 엄청난 병력이 남서 전선군에, 좀 직설적으로 표현해서 몰빵하고 있었다는 거죠.(그랬기에 키예프에서의 처참한 패배가 예상케되죠.)

물론 이런 배경에는 스탈린의 의중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 112에 따르면, 스탈린은 독일의 주공이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음이 명백해진 상황에서도 무려 100여 개의 사단을 남서부 전선에 펼쳐놓으라고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스탈린의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렌드리스가 소련에게도 제공될 것이 미 의회에서 가결된 것은 1941년 8월의 일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다른 제3국에게서 도움을 받는다"라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각종 공장과 생산 기지 및 엄청난 밀의 생산지인 우크라이나는 전시 경제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중요한 땅이었기 때문이죠. 재미있는 것은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히틀러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게 바르바로사 작전 과정에서 주공을 틀어버리는 결정적인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건 차후의 일이고...

하여간 그렇기 때문에 남부 집단군은 본의 아니게라면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적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남부 집단군 대 남서 전선군 - 첫 일 주일 : 브로디 전투

여기서는 <독소전쟁사>의 p. 84 - 86에 기술된 타임라인을 따라가보겠습니다.

가뜩이나 자연 방어선인 부크 강을 도하해야만 했던 시작도 별로 개운치 못했는데, 거기에다가 내내 계속되는 소련군의 그런대로 잘 정비된 반격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우선 독일군의 진군을 맞아 포위된 제124소총사단(제5군, 제27소총군단 소속)을 구하기 위해 카르페조의 제15기계화군단 예하 2개 전차사단이 독일군의 우익을 공격했으나, 이에 맞서는 독일 제197보병사단이...라고 책에는 기술되어 있는데 어째 위키백과의 지도상으로는 제15기갑연대로 되어 있군요? 이 분견군이라고 해야 하나 전투단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간 이들이 제15기계화군단의 앞길을 막아서며 측면을 보호하고, 제11기갑사단은 그대로 동진.

다음날인 6월 24일에는 포타포프의 제5군이 보이니차(Voinitsa, Войница)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북쪽 측면에 대해 좀더 조직적으로 반격에 나섰습니다. 여기에는 제22기계화군단이 관여했는데, 5일간의 격전에서 무려 81%의 전차를 잃었고, 콘드루세프 소장이 최초의 교전에서 전사하는 비상사태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 일대의 격전이 대략 정리된 7월 15일경에 이 기계화사단에 남은 전차라고는 원 기갑병력의 고작 4%뿐이었다는군요. 그리고 독일군이 소련군을 우회해서 아예 스티르 강(Styr, Стир)으로 냅다 돌진해버리자 졸지에 강이라는 천연 장애물에 가로막혀 포위 섬멸당할 위기에 처한 제5군은 별수없이 후퇴해야 했습니다.

북부 집단군의 만슈타인이 그랬듯이 폰 클라이스트도 빠르게 돌진해서 스티르 강의 도하 교두보를 접수했고, 작전 개시 4일 만에 강을 도하하며 키예프로 가는 길을 뚫어놓게 되었습니다. 현 폴란드 국경에서 브로디까지는 최단 거리가 100 km가 채 되지 않기 때문에 무려 300 km 가까이를 돌파한 폰 만슈타인의 그것보다는 덜하기는 합니다만, 기갑부대의 빠른 돌파 - 빠른 교두보 확보 - 뒤이은 보병들이 잔당을 소탕하면서 진격 및 다음 공격로를 확보한다는 이 공식이 얼마나 독일군에게 철저하게 퍼져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걸 눈 뜨고 보고 있을 키르포노스 상장이 아니기는 했는데... 하필이면 이 당시에 소련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당한 것은 차치하고서도 엄청난 차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앞서 이야기했지만 렌드리스가 통과된 게 1941년 8월이고, 그나마도 제대로 물자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1943년에 가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전 까지는 순수 소련의 힘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량화사단은 그야말로 말만 차량화사단이었고, 이 때문에 예정대로였으면 제때 반격에 투입되었어야 할 보병사단을 아예 쓰지도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쉽게 말해서 전차사단만으로 반격해야 할 상황에 몰린 것이죠.(장갑차와 보병 등 충분한 호위가 없는 상황에서의 단독전차는 움직이는 관짝일뿐이죠) 그리고 남쪽에서는 남서 전선군의 주력부대인 제15기계화군단과 제8기계화군단의 반격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6월 26일에 제6군 예하 라비셰프의 제8기계화군단은 독일군 제1기갑집단군 소속 제48차량화군단 예하 제57보병사단을 10 km나 뒤로 밀어버리는 놀라운 전과를 거뒀습니다만, 판단 미스였는지 어쨌는지 하여간 밀어붙인 적을 놔두고 독일군 주력군이 위치한 두브노(Dubno, Ду́бно)로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양쪽의 적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자동으로 포위망에 걸려들어서 폭격은 기본이고 포병과 기갑부대의 공격까지 아주 합동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고, 7월 1일이 되어서야 간신히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 10 km 뒤로 밀어붙인 승리가 잘만 하면 독일군의 보급선을 끊어버리고 독일군의 창 끝이라 할 만했던 제11기갑사단을 고립시킬 수 있는 수였는데, 무리하게 두브노의 적을 노리려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엄청난 수의 병력을 집결시킨 독일군에게(1개 기갑사단 포함 무려 다섯 사단의 집중포화를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거죠. 이 때문에 (다른 곳도 손실이 크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만) 제8기계화군단의 병력 역시 7월 7일에 전선이 그런대로 안정되고 나서 보니 원 기갑병력의 5%만 남아 있었다는군요.

이외에 남익의 제15기계화군단과 북익의 제19기계화군단이 각각 반격을 시도했지만, 남익에서는 독일 공군과 습지대 때문에 별다른 전과가 없었고, 북익에서도 독일의 기갑사단에 밀려났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제9기계화군단을 맡았던 로코소프스키는 아예 반격 자체가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일단 반격명령을 접수한 후 공격을 감행해서 큰 손실을 입자 아예 재차 내려진 반격명령을 거부하고 독일군의 다음 목표였던 로브노(Rovno, 現 우크라이나 리우네, Рівне)로 진격하는 독일 제13기갑사단의 선두 부대를 기습해서 큰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합니다.

얼마나 큰 피해인지는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은데, 확실한 것은 선두부대가 후위의 기습으로 인해 당분간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독일군을 막아낸 후에 로코소프스키는 주저없이 군을 뒤로 물립니다. 보통 때였으면 명령 불복종에 후퇴라는 이유로 사령관이 갈리고 로코소프스키는 또다시 NKVD에게 잡혀 루뱐카 감옥에서 고문받는 신세가 되었겠지만, 나름대로 적의 선봉을 막고 발을 늦춰버리는 큰 전과를 올린 덕에 로코소프스키는 계속해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죠. 그리고 이것으로 벌어들인 시간이 대략 1주일 가량이 되는데, 이게 훗날 키예프의 나비효과를 불러오는 한 원인이 됩니다.

그거는 그거고... 그렇다고 해서 제공권이 소련에게 넘어갔다던가, 기갑 부대의 운용이 혁신적으로 변모했다던가, 기습에 올바르게 대응했다던가 한 건 또 아니라서, 어쨌든 이 일대의 격전은 7월 1일이 되기 전에 독일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일련의 전투를 종합해서 브로디 전투라 일컫는데,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소련군의 경우 무려 3,500대의 전차가 집결했지만 살아남은 전차 자체가 수십도 아니고 고작 수 %에 불과했으니 어림잡아 3천 대의 전차가 박살이 났다는 거죠. 일례로 개전 당시 제8기계화군단의 병력은 전차 920대였는데, 이 중 800대 이상의 전차가 박살났으니... 다른 부대는 뭐 말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손실 또한 의외로 심해서, 가뜩이나 병력이 모자라는(남부 집단군에 배속된 전차가 726대라고 위에서 밝힌 바 있죠)상황에서 무려 200대 가까운 전차를 잃었습니다.

이 전투에 대해 <독소전쟁사>의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책에서(p. 86) 이렇게 논평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초기의 전투는 독일 기갑 부대도 결코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냈으며, 로코소프스키 같은 미래의 고급 지휘관들이 비싼 대가를 치르고 기계화전에 대한 알찬 전훈을 얻을 수 있게 해 줬다."

그러나 독일군이 무적이건 아니건 남서 전선군의 상황이 좋지 못한 것은 여전했고, 전쟁은 이제 시작될 따름이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루마니아의 '루'자도 언급하지 않았죠. 

한가지 짚고 넘어가볼만한 점은 중부나 북부에 비해서 남부집단군은 초반부터 왜이리 손실이 거대할까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남부 집단군은 부크 강이라는 천연장애물이 소련군과 이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초반 공습에 차질이 빚어졌고, 이 때문에 같은 기간 동안 규모가 더 작은 북부 집단군이 거둔 전과에 비해서 남부 집단군은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비슷한 규모의 중부집단군에 비하면 더더욱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련군이 완벽히 막아낸 건 아니고... 일단 경계태세에 들어갔다고 해서 전쟁 준비가 끝나는 것도 아니거니와, 결정적으로 전차 운용에 대한 교리가 너무 미숙했고 초반에 제공권까지 완벽하게 장악당하면서 남서 전선군의 전차 손실은 평균이 90%를 웃도는 정신나간 상황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얻어맞는 와중에서 보여준 제9기계화군단의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반격은 놀라운 것이었고, 이 때문에 가뜩이나 느렸던 남부 집단군의 진격은 더욱 느려지게 됩니다.

7월 2일 당시의 양 군의 상황

일단 6월 22일부터 이 때까지의 남부 집단군의 성과입니다.

어쨌거나 밀기는 밀어냈지만, (지도에서 그냥 직선 말고 가시 돋힌 붉은 선인) 소련군 병력들은... 글쎄요, 보시다시피 북쪽의 독일군은 그런대로 소련군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남쪽의 루마니아군, 특히 루마니아 제3군쪽의 병력 배치도는 큰 차이가 나지 않음을 볼 수 있죠.

동 기간 동안 북부 집단군이 거둔 성과를 보면 전과의 차이가 더욱 확연하게 차이가 드러납니다.

비슷한 축척의 지도입니다. (같은 줄 알았는데, 라트비아 쪽이 약간 지도가 크긴 합니다만... 6 : 7 정도 될까요?) 이제 좀 실감이 좀 가시는지요.

뮌헨 작전

일단 배경이 이렇기도 하고, 무엇보다 베사라비야(現 몰도바)와 북부 부코비나(現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우치, Chernivtsi, Чернівці́)는 루마니아가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끼여든 이유이기도 했죠. 누차 말씀드립니다만 1940년 7월에 소련은 루마니아를 강제로 협박해서 몰도바와 북부 부코비나를 합병했고, 자기 의지가 아닌 남의 힘에 굴복하여 강제로 넓은 영토를(현 몰도바의 영토만 대한민국의 1/3 가량이 됩니다.)할양해야 했던 루마니아는 아주 이를 득득 갈고 있었죠.

그래서 루마니아의 주도 하에(다시말해 독일군이 공격하고 영토를 되찾아준 것이 아니라 명명백백하게 주공이 루마니아군이었단 말입니다)부코비나를 되찾기 위한 작전이 입안, 실행됩니다. 그게 바로 뮌헨 작전(Operațiunea München)이죠.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좀 싱겁게 기술된 감이 없잖아 있는데 기실 이 전투도 (어느 독소전쟁 기간의 전투가 안 그랬겠습니까마는) 꽤나 격한 전투였습니다. 일단 뒤얽힌 병력의 규모부터 턱 빠지는 수준이었는데, 이 좁은 몰도바 땅에 양군 합쳐서 최소 65만 명(루마니아군 32만 명, 소련군 36만 명)이나 되는 병력이 뒤얽혔기 때문이죠. 러시아 어 위키백과에서는 당시 추축국 군대의 수를 70만 명으로 잡고 있는데... 처음에는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영문 위키백과에서 전력 외로 친 독일군 제17군과 헝가리군을 감안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더군요.

무엇보다 이 독일군 제17군과 헝가리군은 몰도바 북쪽을 돌파하여 제9군을 포위 섬멸하려 시도했고, 때문에 뮌헨 작전에 개입한 부대가 맞기는 하거든요.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제17군과 헝가리군을 전력 외로 분류해 놓았는데, 이것까지 세면 70만 명이라는 숫자도 아주 말이 안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17군 예하 사단이 12개였으니, 독일군의 실 평균 사단 전력이 1941년 당시 1만 4천 가량임을 감안해볼 때 적어도 16만은 더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죠. 여기에 헝가리군과 제11군이 더해지고, 루마니아군만 따졌을 때 32만 명 가량이었으니 합치면 얼추 70만이 되기는 되는군요.

여하간 전황이 돌아가는 판 자체는 단순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루마니아 북부를 담당하던 루마니아 제3군의 서쪽과 북쪽에 있던 헝가리군과 독일 제17군이 몰도바 북단의 소련군을 돌파, 포위 섬멸을 시도했고, 때문에 소련은 병력을 현 루마니아 - 몰도바 국경에서 몰도바 - 우크라이나 국경까지 뒤로 쭉 물려야 했습니다. 전황도 하나가 제 백 마디 말을 줄여줄 수 있겠군요. 확대하다 보니 그림이 잘려서 그런데 북쪽의 파란 화살표가 바로 독일군 제17군의 공격 루트입니다.


아, 다만, 이 뮌헨 전투에서 손실이 컸던 것은, 의외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바로 루마니아군이었습니다. 양군이 격돌한 결과 소련군의 전투원 손실이 약 1만 8천 명 가량이었던 데 반해, 루마니아군의 전투원 손실은 그를 상회하는 2만 2천 명 가량이었습니다.

일단 이 전역 자체가 프루트 강을 끼고 있어서 도하를 해야 하기도 했고, 루마니아군이라고 해서 소련군보다 딱히 나은 건 아니라서 그랬을 가능성도 꽤나 높습니다. 어떤 책에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진 원인을 설명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추정되는 근거를 몇가지 꼽아보자면 역시 위의 두 가지 이유를 들 수밖에 없겠네요. 영토를 되찾고자 하는 열의는 강했으나 장비는 독일군이나 소련군보다 부실했고 제대로 된 기갑사단 하나 없었으며 도하까지 감수해야 했으니, 이는 스타크래프트로 치자면 적군이 벙커 깔고 버티고 있는 라인을 알보병인 머린 메딕 부대로 달려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와 똑같죠. 스2처럼 중장갑 상대로 몸빵하며 위력을 발휘하는 불곰 부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김태영 전 국방장관이 연평도 포격 사태 당시 남겼던 "실제 상황은 스타크래프트가 아니다"라는 말을 기억해 두셔야겠습니다만,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여하간, 손해는 컸지만 루마니아는 염원하던 북부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야의 수복에 성공합니다. 위 전황도에도 나와 있지만 이 때가 7월 26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시계를 열흘 정도 이전으로 돌려 보죠.

우만 전투

우만(Uman, Умань)은 현 체르카시 주(Cherkasy Oblast, Черкаська область)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도시입니다. 훗날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이 벌어지는 바로 그 체르카시죠. 그런데 이게 대체 어디 붙어 있느냐, 이걸 먼저 좀 봐야 할 것 같네요. 우크라이나 지도에서 체르카시 주를 붉게 표시한 지도입니다.
(출저-위키피디아)

보시다시피 거의 우크라이나의 정 중앙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아예 우크라이나 서부가 통으로 날아갔다는 이야기와 똑같죠. 지금까지의 언급대로라면 분명 "뭐지, 소련군이 남서부에서는 선전했다면서? 이거 순 엉터리 아냐?"라고 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소련군의 피해 또한 엄청났죠. 몇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소련군은 가진 전차 전력의 90% 이상을 잃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참패를 당했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전선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적의 일부 진격을 로코소프스키의 제9기계화군단이 막아내고도 그를 적절하게 이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죠. 최전방에서 버틸 수가 없다면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소련군은 우크라이나에서 죽죽 밀려난 겁니다. 게다가 위에 지나가는 정도로 언급하긴 했습니다만 소련군의 반격도 (제9기계화군단의 그것을 제외하면)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이루어진 편은 아니라서, 역시 손실이 컸습니다. 그런 만큼 병력이 많이 지쳐 있던 것 또한 당연했고, 그러니 전선이 죽죽 뒤로 밀려날 수밖에요.

7월 10일, 그러니까 한창 남쪽의 제11군, 제17군 및 루마니아 제3군이 몰도바 북쪽을 돌파해서 몰도바 방면을 지키던 남부 전선군을 측방 포위하려 시도하고 있을 때, 소련군은 군 체제의 재정비에 들어갔는데, 이 때 창설된 것이 "방면군"입니다. 전선군 한둘 혹은 두셋에 각 지역의 해군까지 관리하는 군단이니 어마어마한 크기죠. 세 개의 방면군이 이 때 만들어졌는데 북서 방면군에는 보로실로프가, 서부 방면군에는 티모셴코가, 그리고 남서부 방면군에는 세묜 부됸늬가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남서부 방면군은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 및 흑해의 함대를 관리하고 있었죠.

문제는 이 부됸늬가, 독소전이 발발하기 무려 20년 전의 전쟁인 적백내전 때에나 전설적인 영웅이었지, 이미 한참이 지난 1941년대에는 군의 현대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나쁜 말로 표현하면 뒷방 늙은이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이후의 소련군이 계속해서 입을 어마어마한 피해는 반 정도도 아니고 적어도 8할 이상은 스탈린의 무조건 현지를 사수하라는 말도 안 되는 엄명 때문이었지만, 그걸 또 그대로 따르고 앉아 있었다고 욕을 먹는 건 부됸늬라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냥 불운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겠네요. 솔직히 스탈린이 무슨 어디 뭐 명목상의 국가원수도 아니고 장군들의 모가지를 한 손에 쥐고 있는 절대강자인데 거부할 생각을 못 하는 게 더 일반적이지 않았겠습니까. 군의 현대화에 대해 무지했고 그 때문에 줄창 깨지고 패전한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겠습니다만.

부됸늬에 대한 비판 반 실드 반은 이 정도로 하고, 그 7월 11일의 전황을 좀 볼짝시면, 일단 제1기갑집단군의 공격은 로코소프스키에 한 번 막히기는 했어도 아예 뒤집힐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 제1기갑집단군이 (앞서 공격받았던) 로브노에서 키예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토미르(Zhitomir, Жито́мир)를 돌파합니다. 지토미르에서 키예프까지는 불과 140 km. 게다가 최전선에 구멍이 뚫린 것이고, 계속된 공격으로 인해 소련군은 약체화되었으며, 후방 지원 사단이 없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쯤되면 그야말로 키예프로 가는 고속도로가 뚫린 것이나 다름없었죠. 실제로 제1기갑집단군은 북쪽 측후방의 방어는 제6군에게 맡기고 고속으로 치고나가서 단 5일 만에 키예프를 수 km 눈앞에 두게 됩니다. 자꾸 북부 집단군의 제56기갑군 에리히 폰 만슈타인 당시 보병대장의 초고속 기동(하루 평균 70 km 이상)과 비교하게 되는데 그건 그쪽이 정말 비정상적으로 빠른 것이었고, 이쪽도 충분히 빠른 편이기는 했죠.중부집단군과 비교하면....

아예 진군을 막으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아니 뭐 일단 병력이 제대로 준비가 된 상태여야 말이죠. 누차 이야기했습니다만 병력은 지쳤고 전차의 90%는 날아갔으며 상대는 그냥 보병도 아니고 기갑 부대였으니, 반격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했죠. 이 반격명령을 내린 게 부됸늬입니다. 이건 빼도박도 못할 실책이죠. 후방에서 재정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그 군대를 가지고 무리하게 반격을 시도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1기갑군이 드네프르 강에 도달하였습니다. 소련군 사령부(스타브카, Stavka, Ставка)는 이 제1기갑군의 기동을 북부 집단군의 그것처럼 최대한 빠른 돌파 - 교두보 확보 - 드네프르 강을 넘어서 돈바스(現 도네츠크 일대,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2014년에 발발한 돈바스 전쟁 할 때의 그 돈바스 맞습니다)로 아예 고속도로를 뚫어버릴 심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북부 집단군도 에스토니아에서 적을 섬멸해야 할 판이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하는 남부 집단군은 뭐 섬멸 안 하고 배길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 그리고 그 이전에 독일군의 교리 자체가 적 부대의 섬멸, 섬멸, 섬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적의 주력군을 섬멸하면 너희가 우리를 뭔 수로 막겠느냐 하는 이 섬멸전 교리는 남부 집단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여기서 알 수있는 사실은 독일군 하면 전격전인데 사실 그들은 전격전같은 교리와는 정 반대입니다.전격전은 주력(보통 기갑)부대가 적진을 깊숙히 돌파하되 교전을 최대한 피하지만 독일군은 반대로 적 주력을 찾아다니며 두들겨팹니다. 전격전은 오히려 대전말기의 소련군의 종심교리나 미군의 교리와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일단 북쪽에 구멍을 크게 뚫어버린 제1기갑집단군은 아예 그쪽 측방까지 죄다 제6군에게 맡겨버린 채 드네프르 강을 따라 급격하게 우회, 적의 부대를 상대로 포위섬멸전을 시도, 멋지게 포위에 성공합니다. 드네프르 강을 따라서 동쪽을 급격하게 제1기갑군이 남하하는 동안 몰도바에서 싸우던 제17군과 루마니아 제3군은 소련군 제9군을 남쪽으로 밀어붙였고, 이렇게 소련군 제9군과 우만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제6군 및 제12군 사이에 간격이 생겨버립니다. 독일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고, 그림과 같이 포위섬멸전이 벌어지면서 소련군 제6군과 제12군은 전멸당합니다. 물론 후퇴할 수도 있었지만, 스타브카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죠.(극과극은 통한다했나요?대전 중후반기에 접어들면 이젠 히틀러가 똑같은 지랄행동을 되풀이합니다.)

아 근데, 드네프르 강에 도달할 때 제1기갑집단군이 있던 패스토프(現 우크라이나의 패스티우, Fastiv, Фа́стів)에서 드네프르 강을 따라서 쭉쭉 내려오는 키로보그라드(現 우크라이나의 크로피우니츠키, Kropyvnytskyi, Кропивницький - 2016년 개명)까지의 직선거리는 무려 280 km. 이 거리를 주파하는 데 걸린 시간은 20일 가량입니다. 앞선 돌파야 뭐 일단 뚫으면 그 뒤의 병력은 없었으니 빠르다 쳐도 이건 엄연히 교전을 해 가면서 밀어붙이는 것이었는데 20일 만에 이렇게 밀어붙인 것 자체가 또 한 번 기가 찰 노릇이었죠.

그리고 8월 2일에 포위망이 완성되면서, 남는 것은 철저한 소멸전뿐이었습니다. 독일군이 2만 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 출혈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습니다만, 이 때 소련군은 무려 20만에 달하는 병력 중 10만이 전사하고 10만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교환비 1 : 10의 이 어마어마한 (그것도 무슨 티거 대 T-34 같은 것도 아니고 순수 보병 대 보병의 교환비가 1대 10인)전투의 결과로 제9군과 제18군은 죽기 싫으면 병력을 뒤로 빼면서 최대한 빨리 탈출해야 했고, 제9군은 오데사로, 제18군은 8월 말로 접어들자 아예 드네프르 강 건너편까지 밀려납니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보면 제18군도 포위망에 걸려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아마 포위망에 걸려든 건 제18군의 전부까지는 아닐 겁니다. 애초에 뭐 제18군이라고 보내주고 제6군이나 제12군이라고 포위망에 몰아넣고 그러는 것도 아니구요.

이쯤에서 지도를 한 번 보는 게 좋겠군요.

(우만 전투 개형도입니다. 아래 지도에서 포위된 것이 소련군 제6군과 제12군이죠.)



우만 전투 이후의 전황도입니다. 위 그림이 7월 11일, 아래 그림이 8월 25일인데, 약 45일간의 기간 동안 오데사와 크림 반도의 소련군을 제외한 나머지 소련군은 모조리 드네프르 강 너머로 밀려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석권된 우크라이나 땅에 있는 것들인데, 물론 최선을 다해서 소련 노동자들이 공장 등을 우랄 너머로 빼돌리기는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산업기반시설 등이 넘어갔습니다. 주목하셔야 할 것은 아래 지도의 파란 글씨 바로 밑에 있는 크리보이 로그(Kryvoy Rog, 現 우크라이나의 크리비 리흐, Kryvyi Rih, Кривий Ріг)입니다. 여기와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니코폴(Nikopol, Ні́кополь)은 현재도 공업 도시로 우크라이나에서 손에 꼽는 도시인데, 특히 광공업이 발달한 도시입니다.

음, 우리 나라야 철강산업을 포스코가 꽉 쥐고 있으니까 못 들어보셨을 법도 한데, 전세계 최강의 철강기업이라고 하면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을 꼽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철강을 찍어내는 회사죠. 이 회사가 2006년에 인수한 우크라이나의 회사가 바로 크리보리흐슈탈(Kryvorizhstal)인데, 이 크리보리흐슈탈(現 아르셀로미탈 크리비 리흐)의 본사가 바로 크리비 리흐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르셀로미탈 크리비 리흐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가장 철강을 많이 찍어내는 회사가 되었죠. 괜히 크리비 리흐와 니코폴 일대에 이 기업이 있는 것이 아닌 게, 니코폴에는 망간이 풍부해서 독일군이 눈독을 계속 들이고 있었거든요. 이것도 원래는 마실 물조차 없던 땅에서 소련 인민들이 피 토하고 최악의 굶주림에 시달려 가며 고생스럽게 일궈 놓은 것인데 그걸 다 독일군이 날려먹어버린 거죠.

하여간 이 크리보이 로그 및 니코폴 일대의 광업 자원과 함께 드넓은 우크라이나 땅이 독일군 손에 떨어졌고, 독일군은 계속해서 당초 작전목표였던 하리코프를 향해 진군할 채비를 마쳤습니다. 그 전에...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두 군데 처리해야 할 곳이 생겼죠. 바로 오데사와 키예프입니다.

키예프야 우크라이나의 수도고 키예프 공국의 발상지고 러시아권 문화의 수도였으니 이래저래 많은 분들이 들어보셨겠습니다면 오데사 하면 "엥? 그건 또 어느 듣보 도시냐?"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좀 있겠군요. 만화가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의 지도에서는 심지어 그냥 5:4로 나오고 쫑이고...

근데 이 오데사는, 2001년 기준 자체 인구만 백만이 넘는 우크라이나의 다섯 도시 중 하나이며, 인구 순위 제4위입니다(나머지는 인구 순서대로 키예프, 하르키우,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도네츠크). 게다가 흑해 함대 하면 대개 세바스토폴만 떠올리지만 오데사도 흑해에 면해 있는 훌륭한 항구였고, 교통과 공업의 요지인 만큼(아예 이 오데사를 중심 지역으로 하는 철도국이 있을 정도입니다. 오데사 철도국, Odeska Zaliznitsya, Одеська залізниця) 추축국이 군침을 질질 흘리던 도시였죠. 그래서 여기에서도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해야겠군요. 공방전은 8월 8일 개시됩니다. 오데사 공방전이 워낙 길었던 관계로, 사실 오데사 공방전에서 할 이야기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번 글에서는 지도도 잔뜩 나왔고 저것까지 넣으면 쓸데없이 길어지는 감이 있으니 다음 글로 넘기는게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