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namu.wiki/w/%EB%A7%88%EC%98%A4%EC%A9%8C%EB%91%A5#s-4.4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일화.

 

 

1957년 11월 러시아 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왔을 때 니키타 흐루쇼프의 도취감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최초의 ICBM과 스푸트니크 호가 막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 새로운 지도자를 싫어했고 탈스탈린주의에 대해 반대했지만, 이 감동적인 기술의 위업은 "객관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의를 진전시켰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동풍이 이제 서풍을 압도하고 있다"는 선언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무한한 인력과 "제3세계" 에서 솟아나는 혁명적 조류와 합쳐질 때 소련 군사력의 이 새로운 조짐은 "사회주의의 힘이 제국주의의 힘을 압도할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며 모인 동지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상한다.

 

 

"우리는 원자탄과 미사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재래전이든 핵전쟁이든, 어떠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 대해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마 3억 명 이상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전쟁은 전쟁이다. 세월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아기들을 낳으며 일할 것이다."

 

 

 

단, 이것은 좀 더 당시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이 상황을 잘 모르면 뭔 대륙의 기상 내지 중2병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말은 전략적인 계산하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을 한 1950년대 후반은 중국은 핵무기가 없었지만 양대 핵강국인 미국과 소련 모두 적대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핵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양 강대국이 유사시 중국에 핵공격을 하려 할 때 한 번쯤 재고하도록 허풍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저런 대외발언을 마오쩌둥의 성격이라고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건 무리다.

 


마오가 저런 말을 하면서 핵무기가 쓸모없다고 주장했지만, 뒤로는 핵개발을 시도했다는 것은 저 말이 전략적인 처지를 고려한 허세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2차례의 대만 해협 위기와 소련의 중국 지원 중단 이후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개발을 시작한 지 2년만인 1964년에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해에 사정거리 800km짜리 둥팡로켓에 핵탄두를 장착하여 발사하는 핵실험을 실시했다. 참고로 이렇게 직접 미사일에 달아 핵실험을 한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고 할 만큼 위험한 실험이었다.

 

 

 

 

 


이런 허세나 비이성을 내세우는 전략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하며,

 

국제정치학 용어로 자리잡을 만큼 유명한 전략이다.

 

상호확증파괴가 국제정세의 지배적인 논리로 군림하던 시절에, 마오쩌둥은 핵무기에 의한 완전한 파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미-소 양국과 나름 대등한 수준의 협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심리적 우위로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는데 성공한 희귀한 사례.

 

물론 상호확증파괴 구도를 안정한 세계 정세의 근본으로 여기고 있던 소련의 지도자들은, (비록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마오쩌둥의 이러한 언행이 핵전쟁을 억지하려는 미소 양국의 노력을 무위로 돌린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이에 대단히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이는 마오쩌둥이 평생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진영과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진영의 양극 체제를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강하게 견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을 제외한 소련의 역대 지도자들 스스로가 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말을 듣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였던 안토닌 노보트니(Antonín Novotný)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래, 좋다. 당신네들은 3억이 죽어도 아기를 좀 더 낳으면 된다 치자. 우리는 1천 2백만 명밖에 없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다 죽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사람들은 1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런 정서에 공감했고, 마오쩌둥의 태도가 아주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흐루쇼프가 나중에 말하길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아서는 그가 농담을 하는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었다."

 

 또한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물었다.

"마오쩌둥 동지! 핵전쟁에서 살아남을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에 마오쩌둥은 전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무도 없을 것이오. 어쨌거나 이탈리아인들이 인류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보시는 거요?"


그리고 마오쩌둥은 또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원자탄이 아주 강력하여, 중국에 투하될 때 지구를 관통하는 구멍을 내거나 아니면 지구를 날려버릴지라도, 이것은 태양계에는 중요한 사건이겠지만 우주 전체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 1955년 1월, 마오쩌둥 -



이후 마오쩌둥은 중국을 찾은 네루나 소련의 미코얀에게도 비슷한 주장을 하여 그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닉슨에선 닉슨과 만난 브레즈네프가 이 일화를 들먹이며

마오를 천하의 미친놈이라고 까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