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는 연기력이 중요한 게 아니다. 배우 준비하는 애들 널리고 널렸고 다 거기서 거기다. 여배우는 여자 대 남자로서 자빠뜨리는 법을 알면 된다.”

“깨끗한 척해서 조연으로 남느냐, (감독을) 자빠뜨리고 주연을 하느냐, 어떤 게 더 나을 것 같아? 영화라는 건 평생 기록되는 거야, 조연은 아무도 기억 안 해.”

이것은 영화대사가 아니다. 영화 <흥부>를 연출한 조근현 감독이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온 여성 ㄱ씨에게 한 말이다. 최근 문화예술계에서 ‘미투(MeToo) 운동’과 더불어 성범죄와 관련된 각종 증언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영화계에서도 자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올해 대학을 졸업한 24살 ㄱ씨는 2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2017년 12월 18일 월요일 오후 3시에 감독의 작업실에서 가수 Y님의 뮤직비디오 미팅을 가서 직접 들은 워딩입니다”라고 자신이 겪은 일을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ㄱ씨와 조근현 감독을 각각 따로 만나 들은 얘기를 모아보면, 조 감독이 ㄱ씨에게 해당 발언을 한 게 사실로 확인됐다.

ㄱ씨는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3시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조 감독의 작업실을 찾았다. 당시 <흥부> 후반작업을 진행하던 조 감독은 절친한 모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기로 했었다. 뮤직비디오 설정 때문에 그 가수를 빼닮은 배우를 찾기 위해 과거 자신의 엎어진 영화의 조감독의 도움을 받아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고, 인스타그램에서 가수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여성들을 찾아 그들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내 면접 가능 여부와 일정을 각각 따로 잡았다.

ㄱ씨는 조근현 감독과의 면접 자리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면접을 본 곳은 조 감독의 작업실이었다. ㄱ씨의 말에 따르면, 작업실은 7~8평 남짓한 전형적인 원룸 오피스텔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주방이 보였고, 개인용 소파 하나와 그 맞은편에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조 감독은 개인용 소파에, ㄱ씨는 맞은편 소파에 앉은 채로 면접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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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지난 2월 5일 조근현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근현 감독은 ㄱ씨와의 면접 자리에서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한 게 아님을 강조했다. 조 감독은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면 내 정체를 밝히고 작업실로 오라고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계가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는 현실을 말해주는 과정에서 자극적인 표현을 썼을 수도 있겠다. 상대방이 정말 불쾌하게 느꼈다면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뮤직비디오 면접 자리에서 성희롱 발언을 들은 건 ㄱ씨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조근현 감독은 <씨네21>과 전화통화를 한 다음날인 2월 6일 ㄱ씨를 포함한 당시 면접을 본 사람들 모두에게 장문의 사과 문자를 보냈다. “상황이 어찌됐든 그 미팅을 통해 상처를 받았다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내 영화를 봤는지 모르겠지만 살아오면서 나름 좋은 가치를 추구했고, 누구에게 폐 끼치는 걸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성격인데 누군가에게 이렇게 상처를 준 셈이 되었으니 무척 괴롭다. 영화라는 생태계 밖에서 영화계를 너무 낭만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 현실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길게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한쪽으로 치우친 얘기로 들렸을 수도 있겠다 싶다. 예의를 갖춰 열심히 얘기를 했고, 당신의 얘기를 듣지 못한 게 아쉬워 한번 더 만나길 바랐고, 그조차도 부담을 느낄 수 있겠다고 여겨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이 상해 글까지 올린 걸 보면 그 자체로 괴롭고 내 잘못이 크다. 다시 한번 사과한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그 글을 지워줬으면 한다. 영화(<흥부>)가 개인 작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포함된 까닭에 내 작은 실수가 영화를 깎아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ㄱ씨가 받은 문자 내용이고, 면접을 본 다른 사람들은 받는 사람 이름과 내용이 다소 달라진 문자를 받았다. 조 감독과 면접을 본 또 다른 배우 둘은 ㄱ씨에게 “같은 내용의 문자를 조근현 감독에게 받았다”라며 자신이 받은 문자를 캡처해 보냈다. <씨네21>은 이 두명의 여성에게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조근현 감독은 “누가 상처를 받았는지 몰라서 면접을 본 사람 모두에게 사과 문자를 보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누구한테 성희롱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 발언을 자주 일삼아왔다고도 풀이된다.

조근현 감독은 지난 2월 12일 <씨네21>과 만나 자신의 입장과 심경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공개 오디션이 아닌 개인 면접 방식으로 배우를 만나게 된 계기부터 설명했다. “전작 <>(2014) 시나리오의 노출 수위가 매우 높았던 까닭에 공개적으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배우 이유영씨가 그런 시나리오인 걸 알고도 직접 읽고 찾아와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잘 찍은 덕분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이 방식으로 배우를 만나 캐스팅을 했고, 신인배우 13명을 발굴해 내 영화에 차례로 출연시킬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미술감독 시절 많은 여성들과 작업해왔고, 연출 데뷔한 뒤에도 여성 제작자와 일을 해왔으며, 누구보다 폭력을 싫어하는 까닭에 이런 면접 방식이 문제라면 진작 일이 터졌을 것”이라며 “이번 상황은 그간 신인배우를 열심히 발굴해온 노력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안타깝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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