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참전한 용사들 찾아가서 큰절 올림

 

 

에티오피아가 참전한 이유는 1935년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에게 침공을 당했었던적이 있는데, 당시 에티오피아의 셀라이에 황제의 
도움 요청에도 국제사회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전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에티오피아인 27만명이 숨지고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된 투쟁으로(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비슷) 1941년에 기적적으로 승리해 결국 이탈리아를 몰아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을 받지 못한 설움을 잘 아는 셀라시에 황제는 1953년 UN의 파병 요청을 흔쾌히 수락해 한국에 병력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침략군에 부당하게 공격 당한 나라가 있다면 다른 나라들이 도와줘야 한다. 저 먼 곳에 있는 한국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라"


-셀라시에 황제 


당시 에티오피아군은(우리나라의 국군 개념)은 총 4개 정규 사단으로 5만 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최고 정예부대였던 황제 직속의 제1근 위사단에서 지원자들을 모아 1개 대대를 편성하여 보냅니다. 그리고 황제는 그 자리에서 "강뉴 대대(Kagnew battalion)"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강유의 뜻은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또는 '적을 초전에 격파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고요. 공산집단의 침략을 격파하고 혼돈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원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1951년 5월 7일 부산에 도착하여 미 제7사단 32연대 예하 대대로 배정받습니다. 1956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5차례에 걸쳐 연 인원 6,037명이 파견되어 전사자 121명, 부상자 536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강뉴 부대는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찰과 적과의 교전을 비롯해 고지 탈환과 사수, 진지방어 등 253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는 저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1952년 10월 금화지구 '철의 삼각지'를 사수한 것은 이들의 용맹성을 잘 보여줍니다. 강뉴 부대는 철의 삼각지로 오는 주 저지선 계곡에 1개 중대를 배치했는데,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공격에도 4시간 동안 백병전을 벌여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강뉴 부대원들은 부대가 위험에 처하면 장교와 부사관들이 가장 먼저 적진으로 돌진해 포위망을 뚫었습니다. 전투 중 부상자와 사망자를 전장에 남겨두지 않았으며 포로가 발생하면 끝까지 추적해 구출했습니다.




<강뉴 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