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님의 전공은 널리 퍼져있으나

상대적으로 "사람" 이순신으로서의 모습은 덜 유명하다.

환란의 시기를 보낸 한명의 "사람" 이순신의 모습을 알아보자.




1. 어머니에 대한 마음

어머니 변씨는 상당한 걸물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분이다.

난중일기 1594년 1월 12일의 기록을 보면 그런 모습이 보이는데

아침식사를 마친 뒤, 문안인사를 마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라고 말씀하시며, 난중일기에 묘사되길

'두세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하시는 빛이 없으셨다.'

고 되어있다.

[朝食後 告辭天只前 則敎以好赴 大雪國辱 再三論諭 少無以別意爲歎也]


또 1593년 6월 12일 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흰머리를 뽑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흰머리를 뽑은 이유가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적혀있다.

(아들의 머리에 흰머리가 있어, 어머니께서 보고 마음 울적해지시면 안되기 때문이란 내용이다)


어머니의 부고를 듣는 날의 기록은 정말 마음이 아픈데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가는 중에 아들 울이 종을 보내 "아직 배 소식이 없다."하였다. ... ...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1597년 5월 28일 난중일기-


이미 연세가 80이 넘으신 노모께서 아들이 파직당하고 의금부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놀라 전라도 여수에서 충청도 아산까지 배를 타고 급히 오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님이 느꼈을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어머님에 대한 장군님의 마음을 말하듯, 난중일기에 어머님이 등장한 부분은 수두룩하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어서 죽느니만 못하구나.'

라고 쓰여있거나

죽은 두 형이 꿈속에 나타나 함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고, 장례도 하지 못했다며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모습도 나온다.



2. 아들 이면(李葂)

이순신 장군님의 막내아들 이면은 1597년에 전사하게 되는데

장군님의 가족을 잡아, 장군님을 협박하기 위해 아들 이면을 잡으러 하였지만 당당히 맞서싸우다 전사하신다.

그리고 그 막내아들의 부고를 알리는 편지가 장군님 앞에 도착하는데...

十四日辛未。晴。四更。夢余騎馬行邱上。馬失足落川中而不蹶。末豚葂似有扶抱之形而覺。不知是何兆耶。夕。有人自天安來傳家書。未開封。骨肉先動。心氣慌亂。粗展初封。見䓲書則外面書痛哭二字。知葂戰死。不覺墮膽失聲。痛哭痛哭。天何不仁之如是耶。我死汝生。理之常也。汝死我生。何理之乖也。天地昏黑。白日變色。哀我小子。棄我何歸。英氣脫凡。天不留世耶。余之造罪。禍及汝身耶。今我在世。竟將何依。號慟而已。度夜如年。

14일 신미. 맑음. 사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던 중 말이 발을 헛디뎌 냇속으로 떨어졌으나 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막내 아들 면(葂)이 나를 껴안는 듯한 형상이 보이는 듯 하더니 잠에서 깼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 천안에서 온 사람이 집의 편지를 전하였는데 열어보지도 않았건만 살과 뼈가 먼저 떨리고 마음이 황란(慌亂)하였다. 겉 봉투를 대강 열어보니 그 겉에 예(䓲)가 쓴 '통곡'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이내 면(葂)이 전사했다는 걸 알고 나도 모르게 낙담하여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구나.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구나. 나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고 적혀있으며, 16일에 쓴 일기를 보면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라고 쓰여있어 막내아들의 죽음이 가져온 비통함을 짐작할 수 있다.

우는 것 또한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 울지 않고, 강막지의 소금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난중일기는 또 전한다.






또한, 두 형의 죽음이후 조카들을 맡아 길렀는데 이 조카들을 잘 길렀을 뿐만 아니라,

조카들이 혼례를 다 치루고 나서야 친자식들의 혼례를 치뤘을 정도로 그 조카를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카들에 대한 에피소드로는 정읍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조카들로 인해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면

파직 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 뿐인데, 어찌 두고 가는가? 차라리 파직 당할 지언정 조카들을 두고 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이순신 장군님이 성웅으로써 우리들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것은

단순히 그 전과 때문이 아닌, 이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흔드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