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농담으로 무다구치 렌야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다구치 렌야(牟田口 廉也 1888년 ~ 1988년)

하지만 무다구치 렌야는 일본 패망에 큰 도움을 준건 맞지만 그건 본인이 빠가라서 일뿐

대한민국의 독립을 목표로 행동한게 아니다.하지만 행적이 마치 독립을 목표로 한 듯하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진짜 독립유공자는 따로 있는데

바로


후세 다쓰지(布施 辰治, 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3일)

이 분이다.


(7~8분 가량의 짧은 내용이니 꼭 보자.)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 시에서 태어난 후세 다쓰지는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우쓰노미야 지검 검사로 부임하는데, 검사 생활 중 생활고로 아들과 어머니가 동반자살을 시도했지만

어머니만 살아남은 사건에서 어머니를 살인미수로 기소하는걸 보고 법률의 문제점을 느껴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가 된다.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써서

일본의 행동이 한반도 침략임을 규정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했고



일본 경찰한테 조사 받는다.

그는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으며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1919년에는 2.8 독립선언의 핵심 멤버이던 최팔용, 송계백의 변호를 맡았고

故송계백





1923년에는 "영화 밀정"의 실존인물 김시현과 황옥의 변호를 맡았고




1924년에는 도쿄 궁성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김지섭의 변호를 맡는다.

故김지섭

이런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바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변호였다.

이 사건은 덴노 폭살을 기획했다는 혐의로 두 사람이 잡혀 들어갔던 사건으로

박열 대역 사건이라 불리며 일본내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고, 이 재판에서 후세 다쓰지는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한다.

둘이 투옥된 후에도 둘의 옥중결혼을 돕고, 후미코가 의문사하자 그 유골을 수습박열의 고향에 매장해 주기도 한다.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만을 맡았느냐 하면 아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폭동설을 실은 매일신보)


관동대지진 사건 당시 수 많은 조선인들이 참살당한 것을

일본 정부, 군부, 경찰에 조작된 유언비어로 인해 발생한 사건인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조선일보에 사과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일본의 패전 이후로도 한신 교육투쟁이나 도쿄 조선 고등학교 사건, 재일 한국인 사건 및 노동 운동에 변호를

맡았고, 1946년에는 조선 건국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2004년 그가 떠난지 51년 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어 그의 외손자가 대신 받는다.






자신의 조국이 화를 내며 말려도

정말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멈추지 않았던 후세 다쓰지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할 외국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