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3월 15일, 영국 위릭셔(Warwickshire) 주의 럭비(Rugby)시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었다.



1897년 아홉살 여름, 아버지가 근무하는 대학교에 온 유학생 여병현(呂炳鉉)을 만나

동방의 작은 나라 코리아(Korea)를 알게 된다.

1905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체셔(Cheshire)주의 한 농장에 들어가 세 끼를 챙겨주는 약속하에 일하게 되고





그 곳에서 시달리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편에 설 것을 다짐한다.

1907년에는 자유, 일자리 그리고 공부의 불빛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하고, 현지 농장에서 일하여 학비를 벌고

농장에서의 경험으로 가축에 대한 관심이 생겨 온타리오 수의학 대학교에 입학한다

1910년 대학 2학년 때에는 소아마비를 앓게 되어 지팡이를 짚게 되지만 그건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가 졸업할 때 그의 성적은 전과목 A의 우등생이었으니 말이다.

1911년엔 논문을 써, 졸업장을 받게 되고, 1913년 인생의 반려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1916년 봄 한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장 애비슨 박사로부터 한국으로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해 가을 아내와 함께 한국에 도착한다.

1917년 선교사 자격을 위한 한국어 시험에 합격하여 선교사 자격을 따는 한편, 본인의 한국 이름도 짓는다.

"석호필(石虎弼)" 

자신의 굳은 믿음(石)과 호랑이 같은 자세로(虎) 사람들은 돕는(弼)다는 뜻이었다.



1919년 3월에는 3.1운동을 직접 보고, 만세를 하는 민중들과 일제의 탄압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써 세계에 알린다.

이 3.1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하는데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제암리 주변 천여명이 발안 장터에서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고, 

시위행진은 점점 주재소를 향해 가고 있었다.

주재소에 접근하는 모습을 본 일본 육군 헌병들은 참지 못하고 경고사격 후 칼을 뽑아 시위대를 향해 휘둘러

3명을 살해하고, 시위를 주도 했다는 논리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을 감금, 고문한 뒤 풀어준다.

이와같은 행위는 시위대들을 더욱 화가 나게 만들었고 주변 일본인 민가, 학교에 불을 지르게 된다.

이로인해 수십명의 일본인이 대피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4월 2일, 시위에 참여할 마을 사람들을 검거한다는 명목하에 헌병들을 파견,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잡아들인다.

일본 헌병들의 폭압적인 행동들은 주변 마을까지 화가나게 만들고, 인근 화수리와 수촌리 천도교, 기독교 지도자들과

주민들이 모여 4월 3일 "2차 만세시위"를 여는 방아쇠가 된다.




2차 만세시위는 더욱 격해져 일본인 순사가 사망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데

4월 5일, 일본 육군은 본격적으로 병력을 수촌리로 보내어 주민들을 죽이고 가옥 42호 중 38호를 불태우는 만행

저지르고, 수촌리에서 교회당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선교사들은 수촌리로 모인다.

당일 또 다시 발안 장터에서는 만세 시위가 열려 일본 육군을 병력을 나눠 제암리로 보내

만세시위운동 주모자들을 색출해낼 것을 아리타 도시오 육군 헌병 중위에게 명하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교회당에 15세 이상의 제암리 주민들을 모으며

시위 진압 과정에서 너무 심하게 매질한거 같아 사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화가 난 시위대 때문에 도망쳤던 일본인 중 사사키라는 인물에게 미리 제암리 개신교인들에 대한 명단을 받은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자신이 교회당 밖으로 나가는 동시에 육군헌병들의 일제 사격을 명하고

짚더미에 석유를 뿌려 불을 붙이는 것까지 한다.

바람으로 인해 이 불은 교회당 아래 민가로 번지고, 위쪽 민가는 일본 육군이 방화하였고

한 여인이 안고있는 아기라도 살리려고 창문 밖으로 던지자 밖에 있던 군인들이 떨어지는 아기를 향해 총검을 내질러

아기를 죽이고, 22명을 교회당에서 학살, 탈출하려는 3명 중 2명은 죽고 오로지 한 명만 산으로 피신해 살아났다.

다음날엔 근처 마을 천도교 지도자와 그 가족 6명을 죽이기까지 한다.






큰 사건이지만 당시 일본의 손아귀에 있던 정황상 그대로 묻혀 버릴 수 있는 사건이었는데

수촌리 얘기를 듣고 그 쪽으로 모이던 석호필은 이 소식을 듣고 제암리로 달려간다.

그리고 제암리에서 죽은 유골들을 수습하고, 이 비참한 광경을 사진으로 찍고, 제암리,수촌리에서 벌어진 이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세계에 알린다.

또한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기사를 쓰는 한 편, 직접 형무소를 방문하여 고문을 확인하고

이를 총독과 정무 총감에게 하지말아 달라며 호소한다.




1920년엔 3.1운동 견문록 원고를 쓰며 "끌 수 없는 불꽃" 이란 이름을 붙였고, 

그 해 4월엔 암살 미수 사건까지 겪게 되고 총독부의 입김과 계약 만기로 인해 출국한다.

1958년에는 국가의 초빙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 받았고

1970년 4월 16일, 대한민국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언은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주고, 돌보던 소년,소녀가장들을 대신 보살펴달라" 였다



감추어져 버렸을지 모르는 잔혹한 진실을 세계에 드러내어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자국이 아니지만 자신에겐 더 자국 같았던 타국에 묻히는 것을 바라며,

돌보던 약한 자들을 죽는 그 순간 까지 감싸안았던 외국인



"석호필"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또 다른 외국인이 아닐까?






외국인 독립 유공자 1편 후세 다쓰지 - http://www.inven.co.kr/board/webzine/2097/1136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