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촉오, 삼국을 통일 시킨 서진왕조가 멸망 한

 '영가의 난' 그리고 이어진 오호16국시대


  북방의 수 많은 이민족이 침략해 와서  

도시와 마을이 모두 불타고 초토화 된

지상에 말그대로 지옥이 펼쳐졌습니다


사방에서 전쟁과 살육이 끊임 없었기에

사람들은 가족, 친지들과 흩어졌으며

고향을 등지고 유랑을 다녔지요


이때 서진의 유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여 떠돌아 다녔습니다

이를 걸활군'乞活軍' 이라 하였죠

'빌어먹어 사는 군대' 이름에서 알듯

말이 군대지 그냥 무장한 거지떼입니다.


염량(冉良)은 서진사람으로

부친은 하내지방의 서진 수비군 장군이었습니다

흉노족의 침공이 있던 때 석륵의 공격을 받아

하내에서 아버지 염륭(冉隆)이 전사했고

이 걸활군에 들어가 유랑생활을 시작했죠  


  어려서 이민족과 싸우며 성장을 했고

전투를 생활화 한 탓에 싸움에 능하였지만  

결국 패전하여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그의 나이 12살 때의 일입니다.


염량이 사로잡힌 군대는 바로

아버지를 죽인 석륵의 군대였습니다.

석륵은 당시 흉노족이 세운 전조(前趙)의 장군이었고

12살에 불과한 소년장군 염량은 석륵의 밑에서

동진(東晉)의 군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웁니다


사실 아이러니죠

자신의 아버지는 사마씨 진(晉)왕조의 장군이었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자는 석륵이지만

아들인 염량은 그 석륵의 밑에 들어가

사미씨 진왕조의 군대를 격파하는 선봉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는 무슨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그런 개념이나 인식이 있던 시절이 아니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것은 그가 아주 어릴 때 였고  

거지처럼 유랑생활을 한 어려운 성장기를 거친 후  

자신의 재능을 알아준 것은 오직 석륵이었으니

그런 난세에 목숨을 부지하여 이어가게 해주고

재능을 알아봐 준 은인에게 충성을 다한 것 뿐이죠


염량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알아본

석륵의 일족 석호에 의하여 소년 염량은

결국 석호의 양자로 거두어 지게 됩니다

이름도 개명하여 염량을 석첨(石瞻)으로 바꾸죠


그가 양자로 들어간 석씨 가문은 갈족(羯族)입니다

서역에서 넘어 온 유목민이죠



서흉노가 중앙아시아 지방을 정복했을 때

흉노의 밑으로 들어 온 서역의 이민족으로 추정되는데

코카서스 인종으로 백인입니다.




(후조 석륵)



기록에 따르면 이들의 생김새를 묘사하길

"코가 크고 눈이 깊으며 털이 많다"라고 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신을 섬기는 다른 종교가 있고

호천(胡天)이란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이들이 중동지방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게 아닌가 추정합니다

'호천'이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가 보는 것이죠

최근에는 이 종교가 조로아스터교고 아니라

유대교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갈족은 지금의 이스라엘지방에서

나와 동쪽으로 온 이민족이다 이거인데

이 주장이 맞다면 유대인 계열이란 말이고

호천은 야훼란 주장이 됩니다.  


이 갈족은 상당히 호전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전투에 매우 능하고 잔인하였기에

흉노족이 서진왕조를 멸망 시키며

중원 지역을 정벌하고 다닐 때

석륵과 갈족은 최선봉에서 활약을 했지요


이들의 흉폭함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한족 여성 10여 만명을 붙잡아 데리고 다니며

밤에는 겁탈하고 낮에는 삶아서 잡아먹었다

때문에 이들은 한족 여성을 두고

"양각양(兩脚羊)두 다리를 가진 양"이라 불렀다-  

동진의 '진양추' 송나라때 '책부원귀'에 나온다


하지만 해당 서적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대신 비숫한 기록으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팔왕지란 때 하간왕 사마옹의 장군 장방은

백성 1만여명을 데려가 식량이 없으면

이들을 죽여 말고기와 함께 잡아 먹었다"


"영가의 난때 갈족 석륵이 진나라 군대 10만명을

추격섬멸 할때 진나라 포로와 시신을 불태워서 먹었다"


또한 석씨 후조왕조의 태자

석수는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여

이쁜 궁녀가 있으면 그 목을 잘라 얼굴을 감상하고

그 신체는 삶아서 나눠먹었다고 합니다


갈족의 후조 왕조가 궁녀 10만명을 징발해

업성에 잡아 두었는데 이후 모용씨와의 전투과정에

업성이 장기간 포위가 되자 이들 궁녀들은

한족 수비군들에게 모두 잡아 먹혔고 성이 함락되었을 때

단 한사람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갈족이 특히 잔인하긴 했지만  

식인의 참상이 그게 한족, 갈족이냐를

굳이 따질 상황이 아닌거죠...

  그냥 이 시대가 생지옥 그 자체였던 것 뿐입니다.  


다시 돌아 염량 즉 석첨의 이야기로 오면

석첨은 석호의 양아들이 되어

석륵이 후조왕조를 건국할 때 선봉에서 활약했고

석호의 가장 아끼는 장수였지만

결국 전사를 하게 됩니다.

당시 남겨진 아들이 고작 6살이었는데


바로 본문의 주인공 염민입니다

석씨의 일족으로 석민이란 이름을 썼죠


석호는 아끼는 양아들 석첨이

일찍 죽은것을 너무 안타까워하며

석첨의 아들인 양손자 석민(염민)을

본인이 직접 거둬서 키워주었고

석민은 석호의 자식들과 어려서

함께 성장하며 생활했습니다


석민(염민)은 아버지를 닮아

군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석호를 따라 다니며

전쟁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매일 전쟁을 하며 수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닭보다 일찍 일어나 전투를 했고

싸우다 닭보다 늦게 잠에 들었다"


라고 하니 말 그대로 성장과정과 청춘시절을

오직 석씨일가의 천하통일에 모두 바쳤던 것이죠

  그렇게 양할아버지 석호는 후조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석민(염민)은 갈족과 같은 백인종이 아닌 한족이었지만

스스로를 한족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수가 없었죠

아버지 시절 부터 갈족 부락에서 자랐고

석씨 형제들과 함께 어려서 성장했으며

석호의 손자로 석씨 성을 가진 인생을 살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석호가 죽었습니다


 


당시 석민(염민)은 관중의 반란을 진압하고

수도로 돌아 오는 길이었는데


황제 석호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하내의 석준에게 달려가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합니다


석호의 아들로 어려서 석민(염민)과

함께 자라고 함께 싸운 석준은

당시 반정을 결심하며

석민(염민)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길 합니다


"우리 한번 잘해 보자

이번 거사가 성공해 내가 황제가 되면

널 태자로 삼겠다"


 


물론 정변의 성공 여부를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던 때

석준은 함께 하는 석민에게

그냥 "잘해 보자" 라는 뜻으로

아무런 생각없이 던진 빈말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걸 들은 석민은

"진짜로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는 것에 있지요


석준이 반정에 성공하여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태자는 석민(염민)이 아닌

석준의 조카인 석연이 됩니다.


석준에게 아들이 있어 그가 태자가 된게 아닙니다.

같은 석씨의 다른 조카를 대신 태자로 세운거죠

그도 그런것이 석민(염민)이 아무리 석씨라고는 하나

결국 인종도 다르고 종족도 다른 그냥 양자거든요


당연히 석민이 제안를 사양할거라 믿었고

자신은 그냥 빈말로 던진 말을 그대로 믿고 

진짜 태자가 될 생각을 했을거라 상상 못했죠


어찌하였던 큰 공적을 세웠음으로

석민(염민)에게 군권과 직위를 주며 달래보았지만

오히려 이런 큰 불만을 품고 있는 석민에게

군사를 관리하게 시킨 것이 큰 우환으로 작용해

석준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석민(염민)이 불만이 큰 것을 알고 있는데

권력까지 있으니 언제 반역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긴 것이죠.



석준은 친본가와 황족만 모아서 가족회의를 열었습니다

아무래도 석민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친본가인 의양왕 석감, 낙평왕 석포, 여양왕 석곤 등과

석호의 황후였던 정태후만 모여 석민 문제를 논했습니다  

신하의 처분 문제를 조정의 신하들과 논의 안하고

친본가와 가족들만 모여서 회의를 했단 것 자체가


어려서 함께 자라고 생활해 온 석민(염민)에 대한

특별한 감정 또는 미안함이 있었단 증거이기도 합니다


실제 당시 정태후(석호의 황후)는

"그동안 극노(석민의 자)의 공로가 이토록 큰데

그 아이가 잘 못을 했으면 꾸짖어서 고치게 하면 되지

왜 죽이려고 까지하느냐!" 며 반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가족회의 결과는 석민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회의가 끝났는가 싶었는데...



당시 회의에 참석한 의양왕 석감이 다른 마음을 품고

회의가 끝나자 바로 석민에게 쪼르르 달려가

회의에서 벌어진 일과 그 정황을 상세하게 꼰지릅니다




황제인 석준을 죽이고 자신을 옹립해 달라 이거죠


석민(염민)은 결국 참고 참은게 폭발해 버립니다.

같은 갈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같은 석씨임에도 무시를 당한 것을 참았는데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까지 하다니...

그동안의 그냥 잊고 모른채하고

또 아프면서 참았던 상처가 터져 버린 것이죠



곧장 병력을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 갔고

황제인 석준과 그 일가를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그때 석민의 목숨을 살려줘야 한다 석민을 변호한

할머니 정태후 역시 가차없이 죽여 버리죠


황제 석준이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죽임을 당할 때

물어봅니다 "누가 날 죽이라고 하였느냐"


그때 병사 한명이

"의양왕(석감)께서 황제가 되어야 합니다"

라고 대답을 하자


석준이 죽어가며 실소를 하며 말합니다

"나 까지도 이렇게 당했는데 하물며

석감 같은 멍청이는 얼마나 버틸거 같으냐..."


물론 석감은 그런 우려와 달리 마냥 멍청한게 아니라

사실은 큰 그림을 그리며 나름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우선 석민을 무덕왕에 봉하여 작위를 주어

그 공적을 치하 해 준 다음


궁궐로 불러 들여서 다른 갈족 장군으로 하여금

매복해 두었다 차도살인해 제거할 계획이었죠


용양장군 손복도 등에게 3천명의 병력으로

성에 매복하도록 지시한 후 석민을 궁궐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습을 하게 하였죠.


과거 하진이 십상시에게 당할 때

동탁이 왕윤에게 당할 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으니

상당히 훌륭한 계책이기도 합니다


멍청한 줄 알았던 석감도 사실

처음부터 나름의 훌륭한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쳐 맞기 전 까진 몰랐을 뿐이죠


 


분명 호위병 수백명만 이끌고 온 석민이고

매복한 병사는 3천명에 달하는데


석민은 죽기는 커녕 용맹무쌍하게 버텨내고

거꾸로 이들 공격을 모두 격파해 버린 것입니다


이게 뭔가 일이 틀어지고 큰일 났다 싶은

석감이 다급하게 석민에게 문을 열어주며

다시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손복도가 반역을 저질렀다"


자신이 석민을 죽이려한게 아니라

갈족 장군 손복도가 혼자서 반역해 저지른거라

뒤짚어 씌워버린 것이죠.


석민은 "아..네. 그러세요?" 하며


손복도를 죽여 버린 후 궁궐로 들어와 장악 한 뒤

수도인 업성의 성문을 걸어 잡그고

반역자인 갈족병사를 잡는다며

무기를 든 갈족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순식간에 수도가 아수라장이 되고

갈족들은 무장 해제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립니다.

난을 평정했으니 성문을 다시 개방하겠다.


"나를 따를 사람은 업성에 남도록 하고

나를 안 따를 사람은 성을 떠나도록 하라"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로 직전에 갈족 병사를 잡는다며 살육을 하여

놀랐던 갈족 사람들은 성문이 열리자

그게 살 길이라는 생각에 앞다투어 성문을 나갔고


성 밖에 있던 한족 사람들은 또 난리가 났으니

성 밖에 있으면 행여 죽임을 당할까 염려하여

안전한 업성으로 들어 오고자 난리가 난거죠


석민(염민)이 나를 따를 자는 성안으로 오고

나를 안따를 자는 성밖으로 나가라 명령을 내렸는데


갈족은 전부 성밖으로 나가려 아우성이고

한족은 전부 성안으로 들어오려 아우성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 보던

석민은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나는 갈족이 아닌 한족이었구나...


스스로를 석씨이자 갈족의 구성원이라 여기고

양할아버지를 따라 갈족인 석씨가

후조 왕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우며

자신의 청춘과 일 평생을 다 바쳤던 기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태자의 자리는

갈족이 아닌 한족이라는 이유로

막대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버림 받았죠


그리고 다시 자신의 힘으로

장악한 수도인 업성에도


갈족들은 자신을 버리며 떠나고

한족들은 자신을 찾아 오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게 됩니다.


....


결국 석민은 후조 전국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살호령(殺胡令)


후조 왕조 전국에 있는

모든 갈족을 전부 죽여 버리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나온


특정 인종에 대한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학살

제노사이드의 첫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조나라 사람으로 호인胡人을 죽이면

문관은 3등급을 올리고

무관은 아문(부사관)으로 임명하겠다"


말 그대로 대대적인 학살이 시작되어

수도인 업성 인근에서만 20만여명 이상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참히 학살이 되었고

전국적으로 이민족 호인(胡人)이면

닥치는대로 학살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갈족 관리는 학살을 피했습니다  

양주 자사인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하는 갈족 관리는 

본인이 갈족임에도 죽음을 피하고자

동족인 갈족을 잡아 죽여서 그 목숨을 건졌다고 하니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 짐작이 되죠


기록에 따르면 죽임의 대상은 단지  

"코가 크거나 수염이 많다" 라는 이유로

닥치는대로 붙잡혀 학살이 자행되다 합니다


이 말은 즉 학살이 진짜 갈족인지 여부가

사실 중요하지 않은 단계에 이르렀단 것이죠


북중국지역의 한족은 이민족이 침략한 이래

각종 침략과 살육에 시달리며 한을 품어왔고

후조의 정권에서 공식적으로 학살을 명령하자

그동안의 한을 풀어 버리겠단 심정으로

이민족 에 대한 학살과 광기를 벌인 것입니다



그럼 황제 석감은 어찌되었을까요

동족인 갈족이 닥치는데로 학살되는 와중에

황제 석감이라고 멀쩡 할리가 없죠

석민에 의해 누각에 유폐되어 음식을 밧줄로

 올려서 겨우 먹었을 정도로 감금당하였고

결국 얼마 안가 끌려 나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석호의 자식을 비롯한

 석씨 황족 38명이 모조리 붙잡혀 도륙되었고

석씨 일족의 씨가 말려졌습니다


석민은 석(石)씨를 버리고

과거 할아버지의 성이자

한족의 성씨인 염(冉)씨로 돌아가

염민이라고 다시 본인을 부르게 되죠


이후 후조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워 황제로 즉위하였으니

염민이 세운 나라를 염위(冉魏)라고 합니다.


이후 염민의 행보는

가히 전신(戰神)의 경지를 보여주게 됩니다.


한족 기병 3천으로 흉노군을

급습하여 수급 3만을 베었고

다시 5천 기병으로 흉노군 7만을 격파했습니다


즉위 후 거의 매일을 군대를 이끌고

주변을 돌며 이민족과 전쟁을 벌였는데

살호령으로 이민족에 대한 대대적 학살의 원한으로

과거 후조의 잔당과 이민족들이 연합하여

30만 대군으로 염민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염민은 남쪽에 세워진 한족 동진 왕조에

구원병을 청하게 됩니다


"함께 오랑케를 몰아내고 중원을 수복하자"


근데 동진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염위의 요청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후조의 장군으로

동진의 사령관 저부가 이끄는 3만 북벌군을

무참히 격파해 버린게 바로 염민이었습니다

그 당시 동진이 중원회복을 위해 북벌을 시작하자  

화북의 한족 유민 20만이 동진에 귀부하였는데

염민이 동진의 북벌군을 전멸시킴으로써

동진에 항복한 20만 유민들은 그대로 학살되었죠


이런 과거의 '죄?'를 가진 염민이

이제와서 자신이 모시던 황제를 죽이고 찬탈 한뒤

또 무고한 백성을 대량 학살하는 짓까지 벌인 후

원군을 청하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히죠

동진입장에선 그냥 매국노에 역적에 불과합니다

동진은 염위의 영토인 합비성을 함락하는 것으로

그 요청에 대한 답변을 대신 했습니다.


그리하여 홀로 이민족을 모두 상대하게 된 염민은... 

다시 또 전신(戰神)의 위엄을 보입니다.


 이민족 연합군 30만을 창정에서

모조리 격파해 버린 것이죠

창정대첩이라 불리워집니다.


이후에도 덤비는 이민족은 족족 싸워서

전부 격파하고 승리했지만

염민은 여포처럼 싸움에 능한 장군이지

황제가 아님을 증명하게 되죠


일단 황제가 수도를 비우고

거의 매일 군대를 이끌고 돌며 싸우니

국가 통치가 제대로 돌아 갈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오랑케는 과거의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고

한족도 과거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도 안되는 정책을 펼침에 따라


수백만에 달하는 이민족들은 강제로 이주를 당하였고

당연히? 이동하는 길에 공격과 살육을 당해 학살되고  

도착한 백성은 2할~3할 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한족은 멀쩡한가 청주, 유주, 기주 등지에

고향을 가진 한족들에게 또 강제로 이주를 시키니

원한을 가진 이민족이 이번에는 한족을 공격해

다시 또 태반이 학살을 당하며 흩어지게 됩니다

멀쩡한 나라의 인구가 삽시간에 증발한 것이죠


즉위 1년만의 일입니다.


결국 낙주, 예주, 서주, 형주 등 7개주의 자사가

동진으로 투항하였고 염위는 수도 주변만 남기고

사실상 고립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수도 업성의 양식이 다 떨어져

군사 1만을 이끌고 양식을 구하기 위해

황제가 거지처럼 유랑하게 되었으니

마치 갈족을 만나기 전 걸활군(乞活軍)이라는

한족 유랑군을 이끌던 아버지 염량의 꼴이 되어 버립니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수 없죠...


거지꼴의 고작 1만의 보병 병력 뿐이지만 그럼에도 염민은

고구려의 수도를 박살낸 전연의 모용선비와 또 붙어서

전연 최고의 명장 모용각의 14만 대군을 상대로

10번 싸워 10번을 모두 격파하는 위엄을 또 보여줍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를 종종 무력최강이라 부르죠 

사실 그 무력과 군재만 놓고 보면  

염민에 비하면 여포는 씹던껍 수준이죠.


전연의 모용준이 염민에게

"넌 석씨의 노예에 불과한데

어찌 황제를 참칭하느냐" 욕하자


"너 같이 금수만도 못한 오랑케도 황제를 참칭 하는데

어르신은 중원의 대영웅으로 못할게 무어냐" 라고

바로 답변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결국 모용각은 숫자로 압살하고자

기병대를 철삭으로 서로 연결하여 방진으로 조여서

3겹으로 에워싸 포위해 공격하여 겨우 격파를 합니다

그럼에도 염민은 수백명의 보병을 이끌고  

기여히 그 포위망을 부시고 나와 후퇴에 성공하지만



염민의 준마인 '주룡마'가 돌연 죽어버림으로써

결국 모용씨 전연군에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염민은 '용성' 지금의 요서지방 조양시로

끌려와서 죽임을 당했는데


전설에 따르면 그가 죽임을 당하자

요서지방에 장장 7개월의 가뭄이 들었고

그가 죽은 산의 주변 7리 반경의

산천초목이 말라 죽었다고 합니다


이에 모용준이 염민은 군신(軍神)인데

죽음을 당하여 저리 된 거라 여기고

그가 죽은 산에서 염민에게 제사를 지내고

'무도천왕'이란 존호를 올리니

그제서야 가뭄이 멈췄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한족 유민들이 만들어낸 신화겠죠




지금도 염민은 한족의 대영웅이니 하며

칭송을 받고 위와 같이 석상이 세워져있습니다.


인종학살을 자행한 천인공노할 짓을 한

인물에게 과분한 대접이 아닌가 싶지만


당시 한족들이 당한 울분을 풀어 준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존재를 하고

만약 우리가 고려시대 40년 간

한반도를 유린한 몽골족을

누군가 나와서 전부 격파 했다면

이를 어찌 평가를 했을지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 봅니다.


역사에 다양한 분기점이 있죠

그 중에 참으로 어마어마한 일도

매우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정을 앞두고 그저 빈말로 뱉은

말 한마디에서 시작 된 작은 균열은


그 말을 뱉은 당사자는 물론

석씨 황실 전체가 멸족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나아가 갈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역사에 최초로 등장한 백인종 집단이자

후조 왕조를 세웠던 유목민 갈족

전체 인종이 아예 멸종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갈족은 중국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5호16국 시절의 염민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