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장군(1898년 9월 23일 - 1980년 8월 8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전 군인, 정치인이다. 초명은 홍일(弘日)이며, 호는 일서(逸曙), 산남(山南)이다. 

 

중국어 이름으로는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 등을 썼다. 

 

본관은 김해(金海) 1898년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동에서 김진건(金振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육군 창군에 참가했는데 광복 당시 국부군, 일본군, 광복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집단군 참모장, 사단장을 역임하며 대부대를 지휘하여 전투를 경험한 장성급 장교였으며, 중국육군대학에서 군사학을 학습한 인물이었고,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의 장군 임관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은 일본육군대학출신이고 여단장 지휘경험이 있는 홍사익 중장 정도이며, 

 

그나마 단순히 군사지휘경험만으로 따진다면 김석원 대령(연대장 경험)를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6.25 전쟁 초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6사단과 8사단이 만들어준 기회를 이용하여 병력을 수습하고, 지연작전을 통해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기여했다. 

 

이러한 '기적'적인 업적은 건군 당시 사실상의 유일한 장성급 지휘 경험자로서 김홍일의 탁월한 능력에 힘입은 것이었고, 이후의 방어, 반격을 위한 준비를 가능토록 만들었다.

 

 

 

 

6.25 발발직후 5개사단이 채 후퇴하기도전에 한강철교,인도교 박살내는 바람에

 

와해가 되버렸는데(당시 국군은 총 8개사단) 혼자서 그걸 수습해서 3개사단으로 재편하고

 

한강방어선 구축해서 무려 일주일을 버팀

 

이 일이 국군 재편성 및 미군 참전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하게 됨

 

전투기간은 1950년 6월 28일 부터 7월 4일


백선엽은 미군이 주도권을 잡은 상태에서 전공을 세운 데 반해, 김홍일은 미군이 없는 상태에서 인민군을 묶어놓았다. 김홍일이 없었다면, 미군의 참전이 '뒤늦은 참전'이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홍일이 있었기에 인민군의 도하가 '뒤늦은 도하'가 되고 말았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백선엽이 받는 찬사의 상당부분은 실은 김홍일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낙동강 방어전투가 한창이던 그날, 김홍일은 제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 교장으로 전임됐다.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던 장군이 전쟁 중에 갑자기 2선으로 밀려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동원 논문은 정일권 같은 만주군 출신들을 부각시켜 군부 장악력을 높이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계획과 더불어, 김홍일이 작전 수행 과정에서 미군과 마찰을 빚은 것이 김홍일의 2선 퇴진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이렇게 일선 지휘관에서 물러난 김홍일은 전쟁이 한창 때인 1951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물러나는 그를 '오성장군'으로 치켜세웠다. 중국군 소장으로 퇴역한 경력과 국군 중장으로 퇴역한 경력을 합쳐 그렇게 불러준 것이다.

하지만 그의 6·25 전공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백선엽의 전공이 과도하게 치켜세워진 데 반해 김홍일의 전공은 과도하게 저평가됐다. 이동원 논문은 "6·25 전쟁기 한국군 지휘관으로서 그 역할과 성취에 비해 가장 저평가된 인물을 꼽는다면 김홍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홍일의 지시를 거부하며 국군의 전력 손실을 확대시킨 백선엽은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