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1892~1944)는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여성계몽운동가입니다

 

도산 안창호는 1923년 “김마리아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었던들 한국은 독립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녀는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도 신뢰를 받았다.

 

심지어 그에게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안겨준 당시 일본 검사도

“너는 영웅이다. 너보다도 너를 낳은 네 어머니가 더 영웅이다”라고 말 할 정도였다

 

1913년 모교 정신여학교의 교사가 된 그는 미국인 교장의 추천으로 1년 만에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후 1918년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한 그는 굳은 의지와 활발한 활동으로 많은 후원자를 얻기도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일본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의연한 말과 행동으로 오히려 심문자들을당혹시켰다.

1919년 도쿄에서 감행된 ‘2ㆍ8 독립선언’으로 연행됐다 풀려난 그는 즉시 밤을 새워가며 독립선언문을 복사,

2월15일 이것을 조국으로 운반했다.

 

일본여성이 입는 기모노 차림으로, 허리띠에 독립선언서 복사본 10여장을 숨긴 채 귀국한 것이다.

조국에서 3ㆍ1 운동으로 다시 체포된 그녀는,

“독립운동이 어찌 죄가 되느냐”며 심문자를 호통치는 등 민족운동가의 기상을 꺽지 않았다.

 

 

그는 5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가석방 후 정신여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게 되지만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을 비밀리에 추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치려고 했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3개월 만에 다시 체포됐다.

 

재판결과 3년형을 받고 수감 중에 죽음에 이를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 다시 병보석으로 나온 그는 비밀리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때가 29세 때인 1921년이다.

 

 

중국과 미국 등 망명지에서도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주도하는 등 애국활동을 계속 하다가

다시 귀국한 것은 1933년. 서울 체류를 불허하는 일제의 조치에 따라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성경학과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다’는 등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등 항일의 의지는 꺽지 않았다.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 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협력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1943년 오래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평양의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고,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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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ㆍ8 독립선언’ 당시 동지였던 이광수는 변절하기전인 1933년 김마리아가 망명에서 돌아오자 ‘누이야’라는 제목의 

시로 김마리아를 조선 여성 대표로 기렸으나 변절자 춘원의 시이므로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숙부집에서 자랐으나 김마리아의 집안은 민족 의식이 투철한 명문가였습니다

"김마리아의 고모부인 서병호와 그의 아들인 서재현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김규식의 부인이며 역시 독립 운동가인 김순애에게는 김마리아가 나이 어린 종고모가 된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을 졸업한 숙부 김필순은 나중에 임시정부를 세운 노백린, 류동렬,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로, 김마리아는 숙부의 집에서 연동여학교(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다니면서 민족정신을

갖고 있는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A7%88%EB%A6%AC%EC%95%84#cite_note-2

마지막으로 독립기념관에 적혀있다는 그녀의 전언입니다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