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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12년하고 좀 달라진게요. 정말 절박해졌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좀 뻔뻔해지기도 했습니다



(질문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밝히겠다재작년 1114일에 백남기님이 물대포 맞았다11월 15일에 수술이 끝났는데 11월 15일 혼자 오셨다수행비서 한분 데리고 오셔가지고기자도 한명 없었고 대표님 혼자 오셔서 30분 내내 저 자세로 말씀을 들으셨다30분 내내 말씀을 들으시고가시면서 정치인들은 보면 금일봉 이라는 걸 전하지 않나

보통 정치인들은 이렇게 드리는데 대표님은 돌아서셔서 행여나 누가 볼까봐
돌아서셔서 사모님한테 드리는 것을 봐버렸다그러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백남기 어르신께 총 5번을 가셨다그 뒤로 민주당 대표에서 물러나고 양산 자택으로 내려가시는 길에도 기어이 서울대 병원 들러서 가신 분이다전 그걸 증언을 하고 싶었다감사하다.

(문재인)
정말로 진심으로 미안하고 송구스러웠던 것이 제가 지난번 대선 패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겼다라고 생각하는 것만 해도 제가 정말로 아픈데 특히 우리 농업에 대해서는 지난번 대선 당시 우리 쌀 80키로 산지가격이 가격이 17만 원 선 이었습니다. 그것을 저와 박근혜 당시 후보가 21만원 수준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그렇게 공약을 했었거든요. 박근혜 대통령 당선 된 이후에 그냥 나 몰라라 했죠. 그래서 백남기 농민 그 일이 벌어졌을 때는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15만 원 선으로 떨어졌습니다. 농민들이 못살겠다. 못살겠다 하고 거리로 나선 거였는데 그에 대해서 정부가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정말 살인적인 물대포로 그렇게 대응을 한 것이었죠. 

저는 그것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라도 마음을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었고요. 그 가격이 지금 더 떨어졌습니다. 작년에 또 대풍이 돼가지고, 이제는 12만원 어떤 곳은 11만 원 선 이렇게 떨어졌습니다. 우리 농촌 농민들 살려내는 것 그게 또 다음 정부의 중요한 그런 국정 목표의 하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

(시민질문
저는 광주, 전남 60항쟁 기념 사업회라고 올해가 6월 항쟁 30주년이라서 지역에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는 조성호다. 아까 얘기하신 백남기 선생님 물대포로 쓰러진 날 구속되었다가 40일간 서울구치소에 있다가 나왔다. 다음날 찾아뵈어 주셔서 감사드리고, 광주에 호남에 반문정서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저도 마음이 좋지 않다. 

가장 가슴 아픈 공격 오해 내지는 가장 가슴 아픈 공격은 무엇인가. 왜 이런 질문을 드리냐면 그러한 질문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문재인 전 대표의 대답을 듣고 싶다. 잘못된 것 시정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묻는다. 부산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이끌어 오면서 그쪽에서는 빨갱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면서 활동한 것이 광주의 정신과 맞닿아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질문 드린다
.

(문재인)
사실 뭐 가장 저에 대한 가슴 아픈 공격이 호남 홀대라는 공격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이렇게 광주 호남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 일방적이었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저는 민주화 운동 내내 살아오면서 늘 광주 호남과 함께 해 왔다고 저 스스로는 생각했거든요. 저는 80년 5월17일 구속되었습니다. 저도 제가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청하지 않았지만, 만약에 신청한다면 광주 유공자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80년 5월 그 서울역에 수십만 대학생들이 모였을 때 저는 그때 경희대 총학생 대표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정말로 민주화를 이루어낼 그 중요한 고비에 많은 대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여서 노력을 하다가 군대가 출동할 것이라는 소식에 5월15일 대학생들이 다 거기서 철수 했습니다. 그래서 광주가 외롭게 군부와 신군부와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때 광주 그 5월에 아픔이 당장 나라를 바꾸어 낼 것처럼 서울역에 모였다가 군출동이 두려워서 그냥 해산 해 버린 그때 그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80년대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아마 부산의 민주화 운동은 바로 광주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성당 같은 곳에서 광주 비디오 돌려 보고, 그다음에 해마다 5·18되면 차 한 두 대씩은 대절해서 뚯 있는 사람들 모아서 망월동 묘역 참배하고, 그렇게 그렇게 넓어져 나가다가 드디어 87년 5월 그 광주 그 기간에는 드디어 부산 가톨릭 센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제가 광주 비디오 관람 전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 수만 명의 부산 시민들이 그 광주 비디오를 봤습니다. 그것이 87년 6월 항쟁의 동력으로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

87년 6월 항쟁 때 부산이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박종철 열사가 부산 출신이었다는 것에 더해서 그런 우리 광주를 알리려는 노력들 또 광주에 대한 민주시민들의 부채의식들 그런 것들이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광주와 함께 살아왔고 민주화 된 이후에도 부산에서 우리 민주당 대통령을 지지하고, 또 민주당 깃발을 들고 정치를 하는 것은 또 그것이 빨갱이다 전라도다. 그렇게 핍박받는 왕따 당하는 그런 일이었지만 노무현대통령과 저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광주와 늘 함께 해 왔기 때문에 광주가 저를 그냥 알아주겠거니 저는 조금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아까 우리 김형석 대표님 말씀해 주셨는데 광주 호남에 아픔을 좀 더 알아달라 제가 그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더 노력을 하겠습니다.

-오유펌-








사실 안철수를 가장 인정해주고 가장 챙겨준것도 문재인 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