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역한지 얼마 되지않아 심심하던 찰나에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독소전쟁에 대해 한번 글을 써보려합니다.
워낙 이 방면에 전문가들이 많으셔서 조심스럽지만 최대한 간결하고 간단하게 여러분게 알려드릴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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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2차대전에 대해 어떻게 알고계시나요?
"독일이 소련과 손잡고 폴란드를 치고, 독일이 서유럽을 정복하고, 영국을 치려다가 단념하고, 소련을 치러 들어갔다가 털리는 새에 지상 최대의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 대작전으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아서 (사)망했다."
아마 이렇게 알고계신 분들이 대부분일거라 생각됩니다. 이는 절반정도는 맞지만 절반은 틀립니다. 
당연히 양면전쟁을 치루고있는 독일 입장에선 동부전선 유지도 가랑이 찢어지는 판에 후방에 영미 연합군이 나타나 
진격해오니 전략적으론 엄청난 공인건 맞습니다.(실제로 서유럽 전선 개전을 위해 스탈린이 지랄발광을 떨었었죠)
하지만 2차대전은 명백히 소련전선이 주 전선이였습니다. 즉, 이에 맞게 문정을 수정해보자면
"소련을 치러 들어갔다가 소련에게 대차게 털렸고 여기에 서방연합군이 가세해서 독일군의 패망을 이끌어냈다."
정도겠네요. 차이점이 보이시나요? 앞의 문장은 전쟁을 종결한 주공이 서구쪽에 있지만 뒤의 문장은 소련에게 있다는거죠.

이는 2차대전 사상자 수만 봐도 대충 감이 잡힙니다. 자 한번 보시죠.
소련 - 전투원 사망자 최소 8백 6십 6만 명, 비전투원 사망자 1천 6백만 명. 합계 최소 2천 6백만 명.
독일 - 전투원 사망자 최소 4백 4십만 명, 비전투원 사망자와 전투원 사망자 합계 최소 6백 9십만 명.
프랑스 - 전투원 사망자 최소 20만 명, 비전투원 사망자 최소 40만 명. 합계 60만 명.
영국 - 전투원 사망자 약 40만 명, 비전투원 사망자 약 6만 7천 명. 합계 45만 명 가량.
미국 - 전투원 사망자 약 40만 명, 비전투원 사망자 약 1만 명. 합계 42만 명 가량.(출저- 위키피디아)

물론 서구연합군도 어마무지한 피의 대가로 파시즘으로 부터 세계를 구했습니다(사상자 수가 비교가 안되게 차이날지언정, 이를 적다고 말하는건 그분들에 대한 모욕이죠.) 하지만 소련은 영미연합군과 자리수 자체가 다릅니다;;
(참고로, 순수 사망자입니다 사상자가 아니고요;;)
영프독 다합쳐도 소련 사망자엔 택도 없이 모자릅니다... 심지어 독일군 사망자의 80%는 동부전선에서 나올 정도입니다.


대체 독일과 소련은 얼마나 치고박았기에 이 정도로 사망자가 나오냐고요?
사실 소련은 널리 알려진대로 독일에게 주구장창 밀리다가 스탈린그라드를 기점으로 우세해졌다고 알려졌습니다만, 사실과는 매우 다릅니다.(여태까지 독일 입장에서만 연구하다 최근에야 소련 측 자료가 나왔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우선, 사실이 아닌 것부터 짚고 넘어가죠.


일단, 판터,티거로 대표되는 독일의 우월한 기술력으로 소풍다니듯 소련을 박살낸걸로 아실텐데
판터 티거는 각각 43,42년도에 나온 전차입니다(참고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을땐 41년도입니다.)
당시 독일은 3돌, 3호, 4호 전차(이놈의 주력)을 굴리고 있을 때 소련은 뭘 굴렸냐?


(kv-1)


(kv-2)

(t-34,참고로 개전 발발 당시 100여대 정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놈들을 굴리고있었습니다.
특히 kv전차들은 4호전차론 도저히 격파가 불가능하여 8.8cm 대공포, 심지어는 10.5cm 야포(포병이 쓰는 그거)
를 동원해야 가능했었죠(이를 두고 kv쇼크란 일화가 있는데 그건 다음기회로..)


즉, 전차 기술력만으로 보자면 소련은 결코 독일에게 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일이 쇼크를 먹고 티거를 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됬죠. 허나 이미 수많은 실전으로 엄청난 운용노하우가 있는 독일은 그걸로 기술력 차이를 커버하며 소련 전역을 휩씁니다.


그렇다면 대체 소련은 왜 저렇게 성능이 앞서는데 주구장창 밀렸을까요? 원래 세상 만물이 그렇듯 복잡한 뒷사정이 있습니다.


학자들 마다 설이 분분합니다만은,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대숙청이겠죠?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라 알고계실꺼라고 (물론 절 포함하여)생각 됩니다.
그런데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 리처드 오버리 교수는 대놓고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라고 디스를 퍼붓습니다(p. 51). 하지만 디스를 하기전에, 오버리 교수는 이런 말을 했었죠.
1937년에 군 기구를 파괴한 위기는 오로지 1917년에 유아기에 있던 볼셰비키 정권이 처음 몇 주에 시행한 국가 테러라는 더 큰 배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p. 39)
이게 뭔 개소리지? 하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저도 뭔 소린가 싶어 수차례 알아봤습니다.)


우선 저 테러가 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일단 소련이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뒤엎고 건국된건 다들 아실겁니다하지만 이 정권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정치적 실험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더더욱 가혹하고 극단적으로 사람들을 내몰게 된 것입니다. 
가상의 적 및 그로 인한 혁명의 돈좌는(비록 그 실체가 불분명한) 소련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겁먹게 만든 일종의 망령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소련은 내부의 적을 색출하고 혁명의 걸림돌들 즉, 소련 자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위협"을 제거하고자 그토록 애를 써 왔던 거죠. 
그래서 스탈린의 대숙청 이전에도 강제 수용소(굴라그)를 필두로 한 고문, 체포, 투옥, 강제 노동 및 사형이 끊임없이 자행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정점에 서 있던 것이 바로 엔카베데(NKVD, 내무 인민 위원회, НКВД)였죠.
게다가 스탈린 자체로도 그 특유의 병적인 암살의 공포와 우크라이나 대기근사건으로 대표되는 엄청난 인명피해로 인해 
인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이를 "테러"라 규정하고 전례없는 숙청을 시작하게됩니다.


그러다가 요리조리 시선을 잘피하던 군부가 결국 걸리게되죠.


앞줄 좌측부터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알렉산데르 예고로프 원수.
됫줄 좌측부터 세묜 부됸니, 바실리 블류헤르.(위키피디아 출저)



투하체프스키는 총살, 블류헤르는 수감된 감옥의 고문 기술자와 싸움 끝에 사망, 예고로프는 옥사. 부됸니도 숙청의 칼날을 비껴나가지 못하는듯 하였으나. 체포조를 힘으로 제압한 후 스탈린에게 직통으로 전화를 걸어 똥고를 심하게 빨며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그외에도 훗날 복귀하여 독소전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소프스키 원수도 이 때 숙청의 단두대를 피하지 못하여 평생 불구로 지내야 했고, 독소전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인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역시 이 때 걸려들 뻔하다가 때맞춰 터진 할힌골 전투에서 전공을 거둔 덕분에 숙청 대상에서 엔카베데가 슬그머니 이름을 지워버린 일도 있었죠.


투하페츠스키가 만든 종심교리로 대표되는 군 현대화가 이를 통해 늦어지게 되고, 더 큰 문제는 스탈린 주위에 이제 예스맨들 말고 존재하지 않게됬단 겁니다.(사실 이 2가지가 초반의 참담한 패배의 원흉 아닐까요)


당시 군 내부의 분위기는 아래 1줄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우리 인민은 무엇을 직접 말하기를 무서워합니다. 그들은 관계를 망치고 불편한 상황에 처하기를 무서워하며,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합니다." (1940년 5월,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p. 88)

게다가 1939년 1월부터 1941년 5월까지 (겨울전쟁 탓도 있겠습니다만) 자그마치 161개 사단이 신설되었는데 이들의 요구를 맞추는 것은 숙청된 장교의 복직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고 실제로 1938년에 숙청된 장교의 80%가 복직되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로코소프스키가 복직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심지어 스탈린은 독소전 개전을 부정하였고 이의 가능성을 0으로 보았는데 이는 실로 타당한 근거인게.
본래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는 5월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발칸 반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대삽질(이라 쓰고 지랄염병이라 읽는)을 거듭하는 바람에 폰 클라이스트 원수가 발칸 반도로 내려가게 되면서 시간적인 순서가 대차게 꼬였거든요. 그렇게 촉박하게 독일군이 침공을 감행해 오리라고는 스탈린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이죠. 
괴벨스가 일부러 대대적인 영국 침공 계획을 떠벌리고 난 후 스스로 책임을 지고 수습하는 모습을 본 것도 크게 작용했습니다.(물론 기만술이였지만)  게다가 이런 거 다필요없이 당시 세계최강국이였던 영국을 상대하는데 설마 자신들과 싸워 양면전쟁을 하겠어?란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 맞는 말이지만, 히틀러는 그것을 두려워마지않는 희대의 또라이였던걸 간과했죠.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침공을 할것이란 것 정돈 알았기에(설마 그렇게 빨리 했을거라곤 상상조차안했죠)다시 현대화 작업과 방어선 구축을 추진합니다.
 만약에 히틀러가 한 2~3년 정도만 늦었어도 44년도의 소련군정도의 역량을 당시 소련이 보유했을거고
그랬다면 아마 파국을 면치 못했겠죠. 하지만 정말 기가막힌 타이밍, 다시말해 자신의 군대가 최강의 역량을 보유하고 적국의 군대가 최약체일때르 정말 저어어엉말 우연의 일치로 잡아내서 침공을 감행했고, 초반의 엄청나다 못해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전과를 내게됩니다.(물론 이것은 행운이였다는걸 3년뒤 탈탈 털리면서 깨닫죠).


3줄요약을 해드리자면
1. 대숙청으로 인한, 소련군에서 한동안 말살되어 버린 종심 전투 교리와 전투능력(물론 대숙청만은 아니겠지만)
2. 스탈린 그 자신의 치명적인 오판과 거기에 대한 굳은 신뢰.
3. 그 변혁의 혼란기를 제대로 치고 들어온 독일군의 날카로웠던 타이밍.(이건 정말 우연의 영역이죠 신이 도왔다고 할정도로) 
정도가 될 수 있겠네요.


약간 프롤로그 격인데도 숨이차네요(베를린까지 연재가 가능할지;;)
하... 히틀러 이 미친놈이 그지랄만 안했어도;;
댓글로 틀린부분들 많이 지적해주시고 궁금한 점도 올려주세요 성심성의 것 제가 아는 한도내로 답변드리겠습니다(아마 저보다 고수분들이 많이계서서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다음엔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여러분깨 오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