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 기원전 247년~ 기원전 183년

역사 속 최고의 명장은 누구인가?에 대해 얘기를 하다보면 꼭 등장하는 두명이 있습니다.
동양측에선 손무(손자)를 빼고 논할 수 없고 서양측에선 한니발 바르카를 빼놓고 논할 수 없죠.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명장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활약한 기간 또한 길고 한니발에게 크게 당한 로마측에서 꼼꼼하게 기록을 남기었기 때문에 내용이 길어질 것 같으니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1. 한니발의 성장
BC 247년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9살에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를 따라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이베리아반도)에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시칠리아는 지중해 최대의 섬이자 이탈리아의 주(州)중 하나입니다

한니발은 아버지 하밀카르를 꼭 닮은 외모와 전투시 용맹하였으며 여가시간을 모르는 성실한 태도로 인해 병사들에게 신망을 얻으며 아버지 하밀카르 사후 히스파니아 사령관이 되었던 매형 하스드루발이 강압적으로 대하던 켈트족 노예에게 살해당한 뒤, 그 뒤를 이어 27세의 나이에 히스파니아의 총사령관이 되게 됩니다.

*매형 하스드루발은 공정한 하스드루발(Hasdrubal the Fair)이라 불렸지만 켈트족 노예들을 무시하고 탄압하다 켈트족의 손에 살해당하고 맙니다. Fair라는게 공정해서 붙인게 아니라 중세 영어에서는 Fair의 뜻이 매력적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단순히 잘생겼을 뿐 공정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2. 한니발 전쟁이라 불리는 제 2차 포에니 전쟁

제 2차 포에니 전쟁당시 카르타고와 로마의 영역지도 진한쪽이 카르타고, 붉은 쪽이 로마

1) 전쟁의 서막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는 로마가 갈리아와의 전쟁을 치루며 정신이 없는 사이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원주민을 복속시키기 시작하는데요. 거의 대부분의 히스파니아 지역을 정복하는데 8년 가량의 시간이 걸립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역을 정벌하는데 소요한 시간이 똑같은 8년 가량이었다는 것을 보았을 때 하밀카르 또한 출중한 능력을 가졌었다고 볼 수 있을거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하밀카르는 기원전 228년 전투에서 사망하게 되고 그 후임을 맡은 매형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노바(현 카르타헤나) 즉 신 카르타고라는 도시를 남쪽해안에 건설하여 강력한 육군을 양성, 7년간 히스파니아 안에서의 카르타고의 영향력을 점점 키워나가게 됩니다.

카르타고 노바(카르타헤나)의 위치

카르타고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경계한 로마는 에브로 강을 경계로 더이상 영역을 확대하지 않도록 매형 하스드루발과 조약을 맺습니다.
 후에 매형 하스드루발이 켈트족 노예의 손에 살해당한 뒤 한니발이 히스파니아 총사령관 후임으로 임명되게 되고 이 틈에 일어난 히스파니아 내부의 반란을 한니발은 2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제압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됩니다.

 반란을 진압한 한니발은 당시 에브로강 이남에 있던 사군툼이라는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요. 이 사군툼이라는 도시는 명목상 로마의 동맹국이자 실질적으로는 속국으로써 과거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서 맺어진 에브로강 이남은 카르타고에게 넘긴다는 조약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사군툼내에서 카르타고계 시민들과 친카르타고계 인사들이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나게 되죠.

 카르타고 군이 사군툼을 포위하게 되자 사군툼에서는 로마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당시 갈리아와의 싸움으로 정신이 없었던 로마는 구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사절을 보내어 한니발에게 항의를 하려하였으나 한니발을 전쟁으로 바쁘다는 이유로 이들을 만나주지도 않게 되어 카르타고 본국으로 이동, 카르타고 원로원에 강력하게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측은 처음부터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건 예전에 맺은 조약을 어기고 사군툼을 로마의 속국으로 만든 것이었죠. 이 약점때문에 카르타고 원로원의 항변에 대답할 수 없었던 로마는 결국 전쟁이냐 평화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게 됩니다. 이 때 로마사절이었던 파비우스가 "전쟁과 평화 중 원하는 것을 선택해라"라고 하자 카르타고 원로원에서는 "너 원하는 거 줘라"라고 대답을 하게 되고 이에 파비우스는 "좋다, 그렇다면 전쟁을 주겠다"라고 선언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로마가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 해보려 하는 사이, 사군툼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지원군이 오지 않을 것을 깨달은 사굼툼 시민들은 한니발에게 강화를 요청하였으나, 한니발은 이렇게 답변하게 되죠.
"강화를 받아들일테니 모든 시민들은 그들이 가진 재산 전부를 그대로 놓아두고, 옷 두벌만 챙기어 도시밖으로 나오시오" 살려는 드릴께

한니발의 강화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굼툼은 자신들의 재산을 불태우고 정말 치열하게 마지막까지 항전하지만, 결국 한니발에게 함락당합니다. 모든 성인들은 죽고, 살아남은 자들도 노예로 팔려나가게 되죠.

2) 선전포고 후 로마의 대응과 한니발의 알프스 통과
 사군툼 점령 후, 한니발은 상당한 전리품을 손에 넣게 되고 이를 통해 봉급과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걸 갚고 남은 재물로 한니발은 새로운 전쟁을 계획하게 됩니다, 바로 로마와의 전쟁이죠.
 한편, 로마는 한니발의 북상 소식을 듣고 한니발이 진행해올 예상경로인 갈리아와 시칠리아로 6개의 군단병( 로마 시민 보병 2만4천, 기병 2400과 동맹시 보병 4만, 기병 4400)을 편성하여 두 집정관 스키피오와 셈프로니우스의 지휘하에 보내게 됩니다.

한니발의 진군루트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보병 9만, 기병 1만 2천과 전투 코끼리로 이루어진 부대를 편성하여 1만 5천명의 병사와 21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동생 하스드루발에게 남겨 히스파니아의 방위를 위임하고, 2만명의 병력을 카르타고 본국 방위를 위하여 아프리카로 보내고, 막내동생 마고와 함께 원정군을 출정시킵니다.

 한니발의 진군은 시작부터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알프스 산맥통과는 많이 알려져있지만 피레네 산맥 또한 만만치 않게 험난한 길이었죠.
 한니발은 피레네산맥의 원주민들의 저항을 받게 되고 피해를 입게 되지만 결국에는 제압하게 됩니다. 그 후 1만 1천의 병력을 떼어내어 피레네 지역에 주둔시킨 뒤, 갈리아 지방에 약 5만의 보병과 9천의 기병과 함께 진입하게 됩니다.

 한니발이 론 강유역에 도착하였을 때, 론 강 도하를 저지하려고 하는 갈리아 지역 부족들의 방해를 받게 되는데요. 이때 한니발의 병력은 보병 3만 8천, 기병 8천, 37마리의 전투코끼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갈리아 부족 연합은 약 보병 5만, 기병 9천으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론 강 전투의 전개양상

 한니발은 자신의 장교 한노에게 일군을 떼어주어 한밤중에 강의 상류로 도하하게 시켰고, 도하 후 하루를 쉰 별동대가 지핀 연기로 도하 성공을 알게 된 한니발은 강을 건너 총공격을 지시합니다. 이와 동시에 한노의 별동대는 갈리아군 배후로 기동, 갈리아군 후방을 급습케 하였죠.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된 갈리아 군은 혼란에 빠지게 되어 퇴각하게 되고 한니발은 론 강을 무사히 건너게 됩니다.

 한편, 스키피오가 이끄는 3개 군단병이 동맹국 도시 마르시아(현 마르세유)에 도착하는데요. 이들의 본 목적은 한니발의 론 강 도하를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키피오는 3백의 기병 정찰대를 편성하여 한니발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는데 이들은 론 강을 따라 북상하던 중 한니발의 5백 누마디아 기병 정찰대와 우연히 마주쳐 교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로써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양측의 도착을 알게 되죠.

알프스 통과

 로마의 도착을 알게 된 한니발은 고민하게 됩니다. 그 지역에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하는지. 고민하는 도중 마침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부족의 사자가 도착하여 얘기를 나눈 결과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서 싸우게 되면 그 지역 갈리아 부족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게 되고, 알프스를 넘기로 합니다.

 막상 알프스산맥을 보고 겁에 질린 병사들을 보고 한니발은 "이 사자(使者)가 하늘을 날아서 알프스를 넘었는가? 이 사자들처럼 우리도 알프스 산맥을 넘을 수 있다!"라는 연설을 하여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알프스를 넘기 시작합니다.

 알프스 산맥안에서도 한니발은 두번에 걸친 알프스 산중 부족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요. 첫번째는 부족이 언덕위에 포진하고 카르타고 군을 공격 하였는데 한니발은 이들을 무시하는 척하면서 밤중에 언덕을 점령, 이들을 격퇴하게 됩니다. 두번째 부족은 한니발과 우호를 맹세하여 끌어들인 뒤 매복공격을 시도하였지만 미리 의심하여 대비하던 한니발의 신중한 대처로 격퇴당합니다.
 절벽투성이의 알프스에다 때는 가을을 지나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라 알프스는 이미 한겨울이나 다름 없는 추위를 자랑하고 있었고 더구나 산맥을 오를 때에는 코끼리를 밧줄로 묶어 끌어 올리는 둥 생고생을 하였고 수많은 병사들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는 등 이루말할 수 없는 고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알프스 정상에서 한니발은 이탈리아 평원을 내려다보며 격려하는 연설을 한 후, 내려오기 시작하는데 이 길은 더욱 어려웠다고 합니다. 눈과 빙판을 가로지르며 식초로 바위를 부숴가며 길을 만들면서 결국 14일만에 알프스를 넘는데 성공합니다.(알프스 통과 후 대략 3~4만의 보병, 1만 가량의 기병이 남았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집정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한니발이 로마군과 싸우기 위하여 마르세유로 남하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자신의 군대 상당수를 형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넘기고 남은 군대와 함께 바다를 건너 북이탈리아로 돌아오게됩니다.
 이렇게 군대를 넘겨받은 그나이우스는 보병 2만, 기병 2천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향하여 에브로 강 북쪽의 키사라는 곳에서 한니발이 남겨두었던 병력과 마주치게 되는데요. 이때 남은 병력을 이끌던 카르타고의 장군 한노(위의 한노와는 동명이인)은 멍청하게도 거의 두배에 이르는 로마군과 기습도 아닌 정면대결을 펼치게되고 강려크한 로마군에게 패퇴하고 맙니다. 이때 한노의 병력과 합류하려던 동생 하스드루발은 북상을 멈추고 돌아가게 됨으로써 카르타고 군은 이 전투후 다시는 에브로강 북쪽을 넘겨다 볼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카르타고 안습전설의 시작1

4) 트레비아 전투


4-1 트레비아 전투의 발단
 알프스를 건넌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부족들을 회유하며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고 로마를 상대하기 위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정병력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준 후 북부 이탈리아에 있던 각 갈리아 부족도시들에게 동맹을 요청하기 시작하는데 이 중 투리니 지방의 갈리아 부족은 동맹을 거부하는데, 한니발은 그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것인지 투리니를 점령하여 갈리아 부족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한니발군은 최소 보병 2만 8천, 기병 6천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학살 소식을 전해들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북상하여 학살중이던 한니발군과 티키누스 지역에서 맞닥뜨려 소규모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때 스키피오는 부상을 입게 되죠. 한니발군이 이탈리아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 원로원들은 급하게 시치리아에서 대기중이던 셈프로니우스의 3개 군단을 북상시켜 북이탈리아에서 스키피오의 군단과 합류시켜 한니발과의 전투를 대비하게 합니다.
*본래 로마군의 작전은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이탈리아 바깥에서 잡아두고 있는 사이 셈프로니우스군이 아프리카로 넘어가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이 작전이 무산되어 버리죠. 또한 이것은 한니발이 세운 전략의 일부이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로마군이 자주 써온 우회 기동을 통한 전략적인 우위를 잡는것을 방지하는 것이죠.

 합류한 두군단이었지만 군단장들간의 성향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스키피오는 방어를 주장하였고 셈프로니우스는 공격을 주장하여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공격적인 셈프로니우스가 기고만장해지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지원을 거부한 갈리아 부족들을 한니발이 소규모 부대를 보내 공격하고 있는 도중 셈프로니우스가 1000명의 보병과 약간의 기병부대를 강건너로 보내어 일부 카르타고군을 사로잡고 남은 이들을 카르타고군 본진으로 귀환하게 만들게 됩니다. 이에 한니발군은 소규모의 부대를 더 파견하여 로마군을 다시 강가로 내몰고 로마측에서 다시 지원하여 맞서는 작은 전투들이 이어지게 되지만 한니발은 자신이 원하던 시기, 원하던 전장이 아니었기에 뒤로 한발짝 물러나게 됩니다. 물러나는 셈프로니우스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며 스키피오가 졌던 상대를 자신이 물리쳤다는 생각에 우쭐해지게 됩니다.

 한니발은 이러한 셈프로니우스의 공격적인 성향을 보고 그를 유인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여 강건너의 로마군을 자신의 캠프 앞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정하게 되죠. 본디 셈프로니우스군은 스키피오군을 도와주러 온 것이었지만 전에 있었던 전투에서 스키피오가 부상을 입어 부대 지휘가 힘들어졌기 때문에 주도적으로 군단들을 이끌게 됩니다. 또한 "도대체 무엇때문에 전쟁을 질질 끌어야 하는가? 지금 세번재 집정관과 그의 군대를 기다리겠다는 것인가? 이 장소는 우리의 땅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장소이다."라고 주장하며 "이탈리아의 심장부에서 겁먹어 숙영지에 숨어있다."고 스키피오를 압박하게 됩니다. 스키피오는 "갈리아인들은 변덕스럽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겨울내내 카르타고 군을 지원해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충고하지만 듣지않고 공격적인 모습을 견지합니다.

4-2 트레비아 전투의 전개
 로마군은 약 1만 8천의 로마군 보병 및 2만여의 동맹시 보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한니발은 기존의 원정군과 이탈이아에 넘어와 새로 모집한 갈리아군 병력을 합쳐 약9만의 병력을 트레비아에 데리고 왔으나 이 전투에는 약 4만의 병력만을 가지고 싸웠다고 두명의 로마 역사가는 서술합니다.

1: 카르타고군의 진영, 2 : 카르타고 기병, 3 : 카르타고 보병, 4: 마고의 매복군, 5: 트레비아 강, 6: 로마 기병,
7: 로마 보병, 8: 로마 진영, 9: 포 강, 0: 피아첸자 시

 한니발을 주변의 지형을 철저히 파악하여 강근처에 있는 숲속에는 늪이 있었는데, 이 늪 주변에는 가시나무와 수풀로 된 작은 숲이 있었기에 이 곳에 일단의 병력을 배치시켜 놓게 됩니다. 이들은 한밤중에 몰래 이동하여 아침에 있을 전투에 대비하게 됩니다.

 다음날 아침, 한니발은 휘하의 누미디아 기병들을 모두 내보내어 로마군 캠프를 기습공격하고 후퇴하게 하는데, 누미디아 기병들은 로마군 캠프 앞으로 이동하여 보초를 서고있는 로마군 병력에게 투창을 던지고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선빵을 맞은 로마의 셈프로니우스는 아직 병력들이 아침식사를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병력들을 준비시켜 한겨울 속 차가운 트레비아 강을 건너 적들을 쫒게 합니다.
 한니발군은 든든한 식사를 하고 횃불을 쬐며 로마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을 기다렸다 공격하는데 도강중에 공격하지 않은것은 한니발이 로마군을 완전히 쳐부숨으로써 동맹인 갈리아군에게 완전한 승리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한니발은 자신의 투석병과 투창병을 내세워 로마군을 공격하는 사이 양익에 약 1만의 기병대와 코끼리 부대를 배치하고 2만여명의 중보병 부대로 중앙을 구성하고, 누미디아 기병을 보내어 로마군 기병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셈프로니우스가 로마군 기병을 물리자 누미디아 기병은 타겟을 바꾸어 로마군 투창병(벨리테스)을 공격하여 이들이 모든 투창을 소모하게 만들죠.
 양측이 점점 가까워지자 로마군은 이들 경보병을 모두 중보병의 뒤로 퇴각하게 하였고, 한니발은 자신측에 있던 투창병 및 투석병들을 중보병 부대의 후방이 아닌 양익으로 물러나게 합니다.

 이제 양쪽의 포진은 로마군은 중앙에 약 3만 2천의 중보병, 한니발군은 2만으로 1.6 대 1로 로마군의 우세였고
양익은 로마군은 각각 2천의 로마기병, 한니발군은 각각 5천의 카르타고 기병과 4천가량의 투창병으로 이루어지면서 1 대 4.5의 비율로 로마군의 압도적인 열세가 됩니다.
 중보병들이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할 때 한니발군은 양익에 있는 4.5배의 병력으로 로마군 양익을 순식간에 패주시키고 로마군 중앙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매복하던 마고의 병력은 로마군의 후위가 들어남에 따라 로마군의 후위를 점하고 공격하는데 사방에서 시작된 공격에 로마군중 신참병들은 진형을 벗어나 달아나기 시작하지만 베테랑 로마군은 달랐습니다. 완전 포위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셈프로니우스의 지휘하에 진형을 갖추며 대항하기 시작합니다.(훈련 된 로마군의 뛰어남이 보여지는 순간이죠.)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도 로마군 지휘관 셈프로니우스는 침착하게 지휘하여 로마군으로 하여금 한니발군 중앙을 돌파하게 합니다. 끝없는 싸움 도중 로마군은 어느덧 자신들이 한니발군의 중앙을 돌파하여 후방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뒤를 돌아보는데 아직 동맹시의 병력들이 한니발군의 포위망에 갇혀 힘겹게 싸우는 모습을 보게됩니다만, 셈프로니우스는 이들을 구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피아첸자 시로 후퇴합니다.

4-3 트레비아 전투의 결말
 다행히 후퇴한 로마군 병력은 아직 남아있던 스키피오 휘하의 병력과 합류할 수 있었고, 한니발군은 갈리아군의 보충을 받아 병력을 재보충하게 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월터 렐레이그가 말하길 셈프라니우스는 세가지의 큰실수를 하였는데
 첫번째는, 기병병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원에서 정면대결을 펼친 점
 두번째는, 싸우기전 지형의 상태를 전혀 파악하지 않아 한겨울에 강을 건너는 데다가, 마고의 복병에 그대로 당하게 된 점
 세번째는, 자신의 병사를 식사도 하지 못한 상태로 추운 강속에 그대로 내모는 바람에 병사들의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없게 만든 점이라 하였습니다.

 한니발은 지형의 파악을 철저히 하였고 자신이 원하는 시기,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기 위하여 기다릴 줄도 알았으며 적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법을 알았습니다.

 2부에서는 다른 굵직굵직한 전투들과 망치와 모루전술의 완성형이자 양익포위전술의 대명사 칸나이 전투등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