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097&my=post&l=726570 < 1부


트레비아(Trebia)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한니발은 겨우내 병력의 보충에 힘썼습니다. 봄이 오자 병력을 이끌고 중부 이탈리아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죠.

 트레비아 전투 이후 발등에 불이 떨어진 로마 원로원들은 부랴부랴 새로운 두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를 선출하여 한니발의 남하를 저지하려합니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군은 아펜티노 산맥의 통로였던 아레티움(Arretium)으로, 전번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군은 이번엔 스키피오가 군권을 잡고 북부 이탈리아에서 에트루리아로 통하는 서쪽 가도를 틀어막았으며,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는 아레티움 동북쪽에 위치한 도시 아리미눔(현재의 리미니Rimini)에 주둔하게 됩니다.

 한니발은 남쪽으로 향하는 두 가도가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면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을 피하여 중부 이탈리아로 내려갈 수 있는지 고민하다 새로운 진군 루트를 생각해내게 됩니다. 그건 바로 아르노(Arno) 강 상류의 늪지대를 통해 로마군을 피하여 우회하는 방법이었죠.


 다만 이 계획에는 큰 난관이 었었는데요, 바로 이 지역이 봄이면 홍수로 인하여 늪지대로 변하는데다 그 크기가 거의 백여킬로에 이를 정도에 깊이는 허리까지 잠기는, 행군하기에는 거의 최악의 조건을 자랑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니발은 적이 예상하는 장소에서, 적이 예상한대로의 전투를 피하고자 했는데, 교육받은 로마장군들과 이러한 식으로 변수가 끼어들지 못하는 전장에서 붙게 된다면 소모전의 형식이 되는 걸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보급과 물량에는 한계가 있는 적지에서 소모전의 형식으로 병력을 소모하다 보면 찾아오는 건 결국 패배뿐.

 백여킬로에 달하는 늪지를 한니발과 병사들은 잠 한숨 자지 않고 4일간의 강행군 끝에 통과하게 되죠. 이 강행군 도중 상당한 수의 병사들이 피로로 인하여 낙오하였고, 코끼리를 타고 다니던 한니발 또한 피로를 이기지 못해 눈병에 걸려 한쪽눈을 잃게 될 지경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행군을 멈추지 않으며 병사들에게 선언 합니다. "나는 감은 눈으로 작전을 생각하며, 뜬 눈으로 적을 바라보겠다."

결국 눈까지 잃어가며 한 강행군이 끝나고 늪을 통과한 한니발군은 3일간의 휴식을 취한 후, 주변 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하는 데요. 이 소식을 들은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군을 막기 위하여 급히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1. 트라시메느 호수의 전투

1) 트라시메느 호수의 전투의 시작

 플라미니우스 군이 한니발 군을 막기 위하여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군이 세르빌리우스의 군단과 합쳐지기 전에 격파하는 것을 노리게 됩니다. 플라미니우스군의 바로 눈앞에서 로마의 도시들을 약탈하여 도발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는 단순한 도발만이 아닌 당시 도시들의 연합체의 성격을 띄고 있던 로마가 동맹국들을 지켜줄 힘이없다고 사방에 알려, 연합의 붕괴를 노린것이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다혈질이라는 평가를 받던 플라미니우스이지만 한니발의 처음엔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버텨내지만 결국 넘어가게 됩니다. 계속되는 도발과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한니발군의 움직임 때문이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플라미니우스를 내버려두고 움직이던 한니발군이 트라시메느 호숫가를 지나고 있었을 때, 마침내 플라미니우스 군이 캠프를 떠나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늘의 장난이었을까요? 마침 지나던 트란시메느 호숫가는 좁은 길로 되있는 데다 매복하기에 딱 좋은 지형까지 갖춘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로마군을 상대하기로 결정한 한니발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언덕꼭대기에 자신의 막사를 지어 적들의 이동을 한눈에 파악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의 거처 근처에는 중보병들을 배치 로마군의 선두를 막고, 기병과 갈리아군을 길의 서쪽에 있는 언덕 위 숲속에 배치하여 로마군의 퇴로를 끊으며, 경보병과 투창병들은 호숫가 길을 따라 배치하여 로마군 대열의 중간을 공격 할 준비를 합니다.
 게다가 배치를 마친 후에는 약간의 병사를 보내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을 피우게해 로마군이 방심하고 이 길로 진입하도록 만들게 됩니다.

2) 전투의 본격화

 다음날 아침 로마군은 한니발군이 숨어있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는데, 호숫가에서 발생한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 까지 합니다. 허나 한니발이 멀찌감치 피워놓은 모닥불 덕분에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군이 멀리 있다 생각하였으므로 병사들에게 빠른 진군을 명하게 되고, 로마군이 얼추 길로 들어왔다 판단한 한니발은 소수의 투창병을 보내 선두의 로마군에게 창짤짤이 후 도망치게 해서 로마군을 더욱 더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로마군 전체가 길로 접어들자 한니발은 나팔로 신호를 보내 매복하던 군의 총 공격을 명령하고, 로마군은 삼면이 포위당하고 나머지 한쪽면 마저 호수로 가로막힌 상황에 빠진채 공격을 받게 됩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도망칠 곳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플라미니우스는 로마군들을 독려해보지만 안개로 인해 시야가 가려진채 받는 포위 기습은 로마군의 사기를 꺾어 놓았고 결국 플라미니우스는 갈리아 기병 중 한명이었던 두카리우스의 돌격에 사망하고 맙니다.
* 두카리우스는 일개 병사였지만 로마의 집정관을 죽인 공로로 인해 역사의 기록에 남게 되었죠.

3) 전투의 결말

 플라미니우스의 사망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 되었는데요, 로마군 전위부대는 후방에 남겨진 로마군을 구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한니발측 경보병부대가 있던 쪽으로 돌파를 시도하여 달아나게 됩니다. 이 전투로 3만여 로마군 중 1만5천이 싸우다 죽거나 물에 빠져죽고, 약 1만은 간신히 로마를 향해 도주할 수 있었으며 남은 6천명가량은 그대로 생포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집정관이었던 세르빌리우스가 플라미니우스를 돕기 위해 보낸 4천의 기병대가 뒤늦게 도착한 뒤 한니발군에게 걸리는 바람에 고스란히 격파당하고 맙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동상

 트라시메느 호수의 전투에서 패배를 한 로마는 언제나 로마가 큰 위험에 처하면 선출하던 독재관을 선출하게되는데요. 바로 파비우스의 전략으로 유명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였습니다.
 파비우스의 전략은 로마의 주력군이 적과 대치하며 추격하되 대규모 전투는 벌이지 않고, 소규모 부대를 보내어 적의 보급로를 끊는식으로 대항하는 전략으로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로는 파비우스의 전략이 두가지 면에서 한니발에게 먹혀들었다고 하였는데요.

 첫째, 본국에서의 보급이 끊긴 한니발군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니발군의 계속된 승리로 인한 로마의 동맹국들의 신뢰 저하와 이에 따라 배반 후 한니발에게 가세하는 것이었는데. 한니발과 전투를 피함으로써 패하지 않는다 +따라서 동맹국들은 배반하지 않는다 = 보급할 방법이 없는 한니발군은 계속된 소모끝에 무너지게된다.
 
 둘째, 한니발의 군대의 대다수는 용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용병이란 본디 충성심이 부족하고 대규모 약탈등을 통하여 부를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전투를 피함으로써 전리품 획득이란 목적을 막고, 보통 용병부대들은 전리품을 약탈하기 위하여 무겁고 휴대성이 떨어지는 공성무기를 지참하지 않았는데 이때문에 한니발군은 공성전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벽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한니발군은 로마군을 공격할 수 없다.

 이러한 파비우스의 전략은 한니발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로마가 카르타고보다 우세하였기에 가능한 전략이었습니다.

 파비우스는 이러한 전략을 통해 최대한 시간을 끌게되지만, 한니발을 쳐부수기를 바랬던 로마내에선 점점 인기가 떨어져 가게 되는데다 파비우스 사임의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한니발이 데리고 다니던 길안내인이 카사눔을 카실리눔으로 잘못알아듣고 길을 안내하여 한니발군이 분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파비우스가 입구를 막고 한니발을 궁지에 몰아넣게 되는데, 한니발이 기지를 발휘하여 밤에 황소 2천마리를 끌어와 뿔과 꼬리에 짚을 묶고 불을 붙인뒤에 로마군을 향해 몰아 로마군을 혼란에 빠뜨린 사이에 무사히 빠져나가게 되죠.

 게다가 한니발은 약탈의 와중에도 파비우스의 영지만은 약탈하지 않음으로써 파비우스가 로마시민들의 의심을 사게 만들어 결국 파비우스가 인기의 하락과 의심등으로 로마에 불려가 고생하고 있을때, 한니발은 중부 이탈리아를 지나 남부 이탈리아의 곡창지대였던 아풀리아를 점령하게 됩니다.

2. 망치와 모루전술의 완성이자 완벽한 양익포위전술의 교본, 칸나이 전투

 로마는 새롭게 8개 군단을 편성하고 같은수의 동맹시 군단을 동원하는 둥 병력 모집에 힘쓰는 한편, 새로 집정권 파울루스와 바로를 뽑아 한니발과의 결전을 지휘하게 합니다.

 얼핏 로마가 병력모집에만 신경 쓴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로마는 병력을 모집한 뒤 7개월간 단 한번의 전투도 하지않으며 병력들의 훈련에만 힘썼고, 이전의 전투를 바탕으로 전술을 짜게 되는데 트레비아 전투에서 완전히 포위당한 상황에서 중앙돌파에 성공했던 것이 로마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판단해 보병전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방법을 익히는데에 주력하게 됩니다. 거기에다 전장 마저도 양 측면에 방해되는 지형이 있어서 기병전력에서 우위였던 한니발군에게 불리한 칸나이를 고르고 이를 시행하게됩니다.

 로마군은 로마가 원하는 시기에, 로마가 원하는 방식으로, 로마가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고자 했고 싸우게 되었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로마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상대가 한니발만 아니었다면.

1) 전투의 시작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4만 기병1만으로 정예 아프리카 보병, 이베리아 보병과 갈리아족 용병으로 보병진을 구성하고 기병은 이베리아 기병, 켈트족 중기병과 누미디아 경기병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또한 발레리아스 투석병을 투입하였는데 이들은 근,중,장거리 용의 슬링을 따로따로 장비하여 거리에 따라 바꿔 사용하는 둥 지중해 최고의 투석병이라 할 수 있었죠.

로마군은 로마 8개 군단과 동맹시 8개 군단을 합쳐 총 16개 군단에 보병 8만 기병 6,400명을 투입하였고 1만명의 보병을 후위대로 편성하고 남은 보병을 중앙에 집중 배치 함으로써 보병부대의 무게로 한니발군 보병대열을 밀어서 뚫어버리는 작전을 생각 했습니다. 이제 로마군 기병대가 돌파가 성공할 때 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데 우익 쪽에 흐르던 아우피디우스 강을 이용하여 우익에 1,600명의 기병을 배치하여 파울루스가 지휘하고 좌익에서는 4,800명의 기병부대를 바로에게 맡겨 지휘하게 하였죠.

2) 전투의 진행



 한니발은 로마의 계획을 '모두' 읽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일직선 대형을 갖춘 한니발군이었으나 점점 중앙부의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여 초승달 모양의 진을 만들게 됩니다. 이 초승달 모양의 진은 어차피 로마군이 중앙에 집중하여 밀기 시작하면 카르타고군 중앙은 점점 뒤로 밀릴 수 밖에 없으니 처음부터 중앙을 돌출시켜 중앙이 버티는 시간을 늘리고 돌파를 저지하기 위한 진이었죠.

 전투가 시작되자 카르타고 군 좌익의 기병대는 숫자의 우위를 바탕으로 로마군 우익의 기병대를 향하여 돌격하는데 설상가상으로 로마군 우익을 지휘하던 파울루스가 투석병의 돌에 맞아 중상을 입게되어 제대로 된 지휘도 받지 못하고 순식간에 패배하게 됩니다.

 돌출되어 있는 중앙은 한니발의 지휘를 받아 공격보다 방어위주로 싸우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여 위로 볼록했던 초승달 모양의 진은 점점 아래로 볼록한 모양의 초승달 진으로 변경되어 갑니다. 이에 로마군은 물러나는 카르타고 군을 따라 전진하며 더욱 더 중앙을 향해 밀집하게 됨으로써 진형이 무너져 가게 됩니다.

 우익의 카르타고 기병대는 로마군 좌익의 기병대를 맞아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바로가 지휘하는 로마군 기병대를 잡아두었고, 바로군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중앙 돌파가 성공하기까지 최대한 기병이 버텨줘야 했기때문에 손해를 보면서도 버티고 있었는데 카르타고 좌익의 기병대가 로마군 우익을 부수고 지원을 오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게 됩니다.

 한편, 중앙의 로마군은 계속해서 카르타고군 중앙을 밀고 들어가고 있었는데, 너무 돌파에만 신경 쓴 나머지 계속해서 쉬며 대기하던 한니발의 정예 아프리카 보병에게 측면과 후방을 노출하게 됩니다. 측면의 로마군은 정예 아프리카 보병의 돌격에 점점 중앙으로 밀려나게 되면서 안그래도 너무 밀집한 상태였던 로마군이 이젠 칼도 휘두르기 힘들정도로 몰리게 되어 버립니다.

로마군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을때 카르타고 군 기병이 로마군 후방으로 이동하여 로마군을 완전히 포위, 로마군은 무기조차 휘두르기 힘들 정도로 밀집한 상태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3) 전투의 결말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저서를 보면 "바깥쪽에 서있던 로마군은 끝없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군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커다란 소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결국 그들이 서있는 자리에서 죽게되었다."
 
 또 다른 역사가 리비우스는 "너무도 많은 로마군이 살해당하고 있었다. 간신히 죽지 않은 부상자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로마군의 시체를 목격하고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전사자 중 몇몇은 머리를 땅에 묻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위해 땅을 파고 자신의 머리를 묻은 것처럼 보였다."

 훗날의 역사가 파울리는 이 전투에서 일분당 600명의 로마군이 사망하였다고 하였는데, 초당 10명이 죽은 꼴로 이미 이 상황은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할 수 있겠죠. 로마측의 피해는 보병 47,000명 기병 3,000명이 전사했고 2만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지휘관으로 참가했던 원로원 멤버 80여명도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 한번으로 당시 로마가 가용 가능했다 여겨지는 병력 30만중 1/4이 한방에 날아가 버립니다. 한편 카르타고군의 피해는 6,000~8,000가량에 불과했습니다.

 한니발은 전투가 시작하기 전부터 로마군이 물긷는 것을 방해하여 갈증에 시달리게 만드는 한편 자신의 부대를 동쪽에 배치시켜 아침에 전투 시 카르타고 군은 태양을 등지고, 로마군은 태양을 바라보며 싸울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등의 준비를 하고 있었죠. 거기에 로마군이 진형의 단점을 제대로 꿰뚫어 보이는데 로마군이 주로 사용하는 마니풀라 대형은 치고빠지기에 적합하지만 밀어붙이는데에 부적절하였는데 자신의 병력을 천천히 뒤로 물림으로써 로마군의 후열 병력까지 앞으로 전진하게 만듬으로써 치고빠지기를 봉쇄하고 후방을 지키게 하는 걸 원천봉쇄 하였습니다.

3. 로마의 반격과 카르타고 안습전설

 칸나이에서 패배한 로마는 화들짝 놀라 더이상 전면전을 바라지 않게 되고 파비우스의 전략대로 싸우지 않고 지연전을 펼치며 상대방의 취약점을 노리는 방법을 쓰기 시작하는데요. 한니발과의 맞상대는 피하며 한니발이 점령하고 지나간 지역을 다시 점령하는 방식으로 한니발의 힘을 깎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점점 늘어가는 동맹시의 배반을 막기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파비우스의 전략때문에 고생하며 한니발은 본국으로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동생인 마고를 보내게 됩니다. 카르타고에 도착한 마고는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15,000명의 보병, 1,200명의 기병과 2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지원받게 됩니다만 마침 사르데냐 섬에서 로마에게 반기를 든 원주민이 카르타고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고,

빨간지역이 사르데냐 섬

 또한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는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대패한 이후 카르타고 안습사건2 남부지역 원주민들의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납니다.
 카르타고는 사르데냐 섬에는 15,000 보병과 1,500 기병을 포함한 새로운 군대를 보내고, 히스파니아의 하스드루발 바르카에게는 4,000의 보병과 500의 기병을 보내줍니다. 각 군대에게 임무를 마치면 이탈리아로 향하라는 명령도 내려 두지만...사망플래그

 사르데냐로 향한 카르타고 병력은 운좋게도 당시 제해권을 장악했던 로마군을 뚫고 도착하지만 코르누스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격파당하고 맙니다. 카르타고 안습사건3
 스페인으로 향한 병력 또한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합류하여 스키피오 형제의 로마군과 싸우나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격파당하여 카르타고 안습사건 4 마고에게 지원 해주기로한 병력을 급히 히스파니아를 향해 보내게 되어 결국 한니발이 받은 것은....

 카르타고 본국은 다시금 한니발을 지원해주려 하였으나 누미디아의 시팍스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제압하기 위해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기는 커녕 히스파니아에 있던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불러들여 반란을 제압케 하였죠. 반란을 제압한 뒤 히스파니아로 향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거금을 투자하여 스키피오 형제 휘하의 스페인 용병을 매수하여 베티스 고지에서 승리하고 스키피오 형제를 전사시키게 됩니다. 힘내라 카르타고.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이긴 기쁨도 잠시 다음해에 스키피오 형제 중 형 스키피오의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침입해 카르타고 노바도 점령당해 버리죠. 이 젊은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데 젊은 나이에도 챈재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젊을때의 스키피오

 카르타고 본국은 히스파니아에서 계속 된 패배에 어쩔 수 없이 원래대로라면 이탈리아로 보낼 병력들을 스페인으로 계속 보내어 소모하게 됩니다. 스페인에서의 패배 이외에 이탈리아 안에서도 계속되는데요. 이탈리아 남부의 대도시 타렌툼을 점령한 한니발을 한노라는 장군에게 2만의 병력을 주어 남기게 되는데요 한니발이 2만을 주고 남은 병력이 3만정도에 불과한데다 보급이 되지않는 상황을 봤을때 당시 한니발에게는 정말 큰 병력이었죠. 허나... 로마군의 카푸아 포위전 당시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하여 북상하다 로마군에게 걸려 천명만 남고 궤멸당하고 맙니다... 1승만 하라고 스막 ㅅㅂ놈들아


 한니발의 승리에 편승해 반란을 일으켰던 카푸아가 결국 점령당하고 타렌툼 마저 내부의 친로마계인사들의 반란으로 로마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또한 카르타고로 넘어갔던 도시였습니다만 결국 로마군의 2년에 걸친 공격끝에 점령당하게 되는데 이때 카르타고에서 시라쿠사를 위해 보낸 병력이 또 전멸합니다.

 로마군의 견제로 행동이 묶인채 손발이 잘려나가던 한니발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여러번의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지원 없이는 버티는 일에 한계가 보이게 되고 마지막으로 한니발을 지원하러 오던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보낸 편지가 로마군 사령관 클라디우스 네로에게 걸려 클라디우스 네로의 병력 약간 + 리비우스의 군단에게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궤멸당하고 말아 이탈리아의 구석까지 몰리게 되죠.아 님들 제발염

 젊은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에서 승승장구해 나가며 4만 8천의 병력으로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지휘하던 7만의 병력을 일리파 전투에서 격파하여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게 됩니다.

4. 한니발의 몰락과 스키피오의 활약

 스키피오의 계속된 활약으로 로마시민들은 아프리카 공략을 생각하게 되었고 스키피오 또한 자신이 있었죠. 결국 원로원은 30세의 어린나이의 스키피오를 시칠리아 집정관으로 임명해주고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를 향해 모집한 병력들을 이끌고 떠나게 됩니다.

 아프리카를 향한 스키피오는 누미디아를 손에 넣기 위해 움직이게 되고 이 과정 도중 카르타고군 사령관이었던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대패시키는 한편 결국 누미디아를 로마의 동맹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죠.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의 활약에 멸망 직전까지 몰리게 되고 스키피오와 강화를 맺게 되는데 카르타고가 완전히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화내용은 상당히 온건했는데요. 한니발과 마고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면 스키피오도 철수하고 이후 제해권을 로마에게 양도하고 배상금만 물면 되는 내용이었는데 아무래도 무패의 장군 한니발을 의식한 강화내용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 때 카르타고는 정말 풍전등화의 위기였거든요.

 강화를 맺고 돌아가려는 로마의 사절들을 카르타고의 과격파들이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들은 한니발을 불러들여 싸우기로 제멋대로 결정하고 이런 행동을 하죠. 한니발과 마고가 귀국하는 도중 마고는 부상으로 인해 사망하고 한니발은 무사히 도착하지만 한니발 또한 강화하는게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허나 강화를 맺고 돌아가는 사절을 공격하고 일방적으로 강화를 깨뜨린 후 다시 강화를 맺을 수는 없었죠

1) 자마 전투의 시작



 한니발은 보병을 3열로 구성하였는데 1열은 여러 인종들로 이루어진 용병부대로 12,000명, 2열은 리비아와 카르타고 시민명 14,000명, 3열은 한니발의 정예병력 1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하고. 좌익에는 누미디아 기병 2,000명, 우익에는 카르타고 시민기병 2,000을 배치 하였습니다.

 이에 맞서는 로마군은 29,000~36,000명, 기병은 6,000~8,7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는데요. 기병 전력에 있어서는 로마측이 확실한 우세였고 보병 전력은 한니발이 우위였으나 시민병들이나 야만족 용병부대들은 로마군이나 한니발의 정예부대에 비하면 손색이 있기 때문에 크게 우위를 차지하지는 못하게 되죠.

 한니발은 1열과 2열의 병력이 로마군 보병의 힘을 빼놓고 나면 3열의 정예군이 나선다는 작전을 세우고 전투를 시작하게 됩니다.

2) 전투의 진행


 한니발은 처음엔 코끼리들을 돌진시키는데 스키피오는 코끼리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죠. 보병을 기존의 체스판 대형(체스판의 같은 색깔의 칸마다 병사를 배치해 놓는 듯한 대형)이 아닌 전면에 세운 경보병 뒤쪽으로 간격을 넓게 벌린 종대로 세운 것입니다.


 코끼리들이 돌진해오자 경보병들은 흩어져 피하기 시작했고 코끼리들은 보병들 대열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거나 투창과 나팔소리 등에 놀라 카르타고 기병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혼란에 빠진 카르타고 기병대를 향해 로마군 기병대를 돌격을 시작했고 이내 카르타고 기병대는 멀리 도망치기 시작하는데 이는 한니발이 지시한 것으로 로마군 기병이 다시 전선에 복귀하기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지연시키려는 작전이었죠.



 한니발군의 1열과 2열은 로마군을 상대하기엔 무리여서 패퇴하게 되지만 3열에있던 한니발의 정예부대가 이들을 막고 달아나는 자들을 베기 시작하자 도망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정예부대의 양익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한니발군의 1,2열이 3열의 양익에 붙어 횡렬이 길어지게 되자 스키피오 또한 로마군 2, 3열을 양쪽으로 벌리게 되는데 이는 스키피오가 이때 할 수 있었던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평가 됩니다.

 한니발이 이때 노린 것은 두가지 중 하나로 보는데
 
1. 양익으로 이동한 1열과, 2열로 자신의 정예보병이 붙들고있는 로마군을 측면에서 포위 공격하거나
2. 상대방이 자신을 따라 종의 두께를 버리고 횡으로 늘어섬으로써 자신의 정예부대가 중앙을 뚫기 쉽게 만드는 것으로 봅니다.

3) 전투의 결말

 보병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카르타고 기병을 쫒아내고 돌아온 로마 기병이 카르타고군 보병의 후위를 공격함으로써 끝나게 됩니다. 이 전투로 카르타고는 2만이 넘게 전사하고 4만에 가까운 부상자와 포로가 생겼으며 로마군은 약 5천가량의 손실을 보게 됩니다.

 이 전투는 두 명장이 맞부딪힌 전투이지만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데 그 이유는 로마군은 정예병력으로 구성하여 병사와 기병의 질이나 수에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한니발은 할 수 있는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죠. 프로가 아마추어를 상대로는 몇 수 접어두고도 상대할만하지만 둘다 프로인 경우에는 접어주는 쪽이 급격하게 불리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죠.

 이 패배 후에 카르타고는 결국 강화를 맺게 되는데요, 3단 갤리선 10척을 제외한 모든 카르타고 해군의 해체 및 제해권의 포기, 카르타고는 앞으로 로마의 허락 없이는 카르타고 영토 바깥에서 전쟁할 수 없음 등으로 거의 카르타고의 생사여탈권을 로마에게 쥐어주는 수준이었습니다.

5. 한니발의 망명과 죽음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집정관 자리까지 오르나 결국 정적들이 한니발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음을 로마에 알려 지원을 받아 자신을 목숨을 노리자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로 망명을 하게되는데 이후로도 로마는 한니발을 놔두지 않았기에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어진 망명길이 이어지다 결국 비티니아에서 반지에 숨겨둔 독으로 자살하게 됩니다.

 일화로 시리아에서 망명 중이던 한니발이 스키피오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때 이 둘은 마치 친구 처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스키피오 : "가장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 하십니까?"
 한니발 :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지요,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무찔렀고 인간이 일찍이 가보지 못했던 
세상 끝까지 갔으니까."

 스키피오 : "두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 하십니까?"

 한니발 "피로스 입니다. 진영을 잘짜는 방법을 처음 생각해 냈지요. 지형에 따라 군대를 운용하기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지원을 잘 받아내었고 이탈리아 땅에 침공했을때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지원을 받았어요. 그들이 그 땅에서 잘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스키피오 : "세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 하십니까?"

 한니발 "저라고 생각합니다."

 스키피오 : (웃음을 터뜨리며) "당신은 저에게 패배하지 않았습니까?" 혹은 "만약 당신이 자마전투에서 
나를 패배시켰다면 어떻게 말했겠습니까?"

 한니발 " 그때는 내가 알렉산드로스, 피로스, 세상의 모든 장군들 중에서 첫번째가 됐을 것입니다."

 한니발 때문에 만들어진 라틴어 속담으로 "한니발이 문 앞에 있다(Hannibal ad portas)"라는 말이 있는데 적이 바로 코 앞까지 와있다는 뜻이었다고 하며 로마 여인들은 이 말로 우는 아이들을 달래었다고 합니다. 로마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적이었음에도 로마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그 무용은 경외심으로 남아 후대엔 한니발의 이름을 딴 "한니발리아누스"라는 이름을 왕족에게 붙일 정도였습니다.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강대국 로마를 누란(累卵)의 위기까지 몰아넣은 명장 한니발. 한니발의 유언으로 한니발 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노인의 늙은 죽음을 기다리지 못하겠다면
 내가 직접 로마를 그들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