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음 때문에 감수성 폭발해서 니들 좋아하는 3줄요약 못해준다.

 

 

"탈권위문화는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반드시 추진하고 싶은 방향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의 모든 말중에 이 말을 가장 좋아한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초래 했다고 믿고

그이유는 단 한가지 '탈권위' 때문이다.

 

이 탈권위는  정치인과 일반시민의 관계에서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난 사실 노무현의 탈권위주의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에게서 직접 들은 것은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들린 게 전부다.

그러나 분명 그가 지향하는 탈권위주의는 보다 광의의 탈권위였을 것이다.

 

내가 왜 이 탈권위를 대한민국 역사에 가장 큰 전환점으로 보냐하면

 

권위주의란 것은 사실 국가가 일반 시민을 통제하는 매우 효율 적인 체제를 형성하게 해준다.

이는 과거 유교 사회에서 孝를 강조했던 이유,

군국주의 시대 일본에서의 가장의 권력이 강했던 이유.

모두 이와 상통한다.

 

쉽게 말해서, 가족 구성원이 아버지에게 거역하지 못하면

국가는 가장인 아버지만 통제하면 그 밑에 있는 모든 구성원을 통제할 수 있다.

조선후기 양난 이후, 예학이 강조되고 보다 가부장적 사회로 탈바꿈 한 것은

이런 정치 이데아가 존재 한다.

 

가장의 권위가 늘어나고 실력이 강해질 수록,

그리고 그 가장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록,

국가는 국가 구성원을 통제하기가 쉬워진다.

 

국가, 체제에 대한 불만을 위해 투쟁의 깃발을 들기전,

그들은 먼저 아버지를 넘어야만 한다.

사실상 구체적인 형태가 존재하지 않고

심리적으로도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 국가와 달리,

아버지는 인간, 가족으로서 느끼는 애정과

피부로 와닿는 실체적인 권위가 작용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많은 운동권의 학생들, 제국주의에 투쟁한 개인에게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서 국가는 부모와의 대면을 시킨다.

 

이는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단위인 가족을 예로 들었을 뿐이지만,

회사나 학교로 예를 옮겨가면 마찬가지가 된다.

교사나 선배, 상사의 권위를 강하게 만들면

국가는 교장과 사장만을 컨트롤하면 예하의 대부분을 컨트롤 할 수 있다.

 

이는 군대의 조직 운용과 마찬가지다.

분대장-소대장-중대장-대대장 등등으로 이어지는 체계에서

각 부대를 컨트롤 하는데에는 부대 개개인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가정에서 학교, 사회 까지 지속할 경우,

'나이'는 정말 벼슬이 된다.

'아버지' '학교선배' '교사'

사실상 정상적인 루트라면  성장과정 상에 권위의 상징이 가진 공통점은 곧 연장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꼰대'라는 존재들이 성장한 것이다.

 

 

노통이 그토록 탈권위를 부르짖은 것은 이러한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함이다.

학생인권 신장(교권추락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지만)

병영선진화 등이 이러한 고리를 끊어 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우리가 일본 애니메이션, 미국드라마, 헐리웃 영화, 온라인게임,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가 발달한 시초가

노통 때인 이유역시 이와 상통한다. 

권위주의의 작동원리는 조직을 개인의 상위, 우선으로 여기게 하는,

어려운 용어로 사회성이 독립성을 억누르는 정신 구조에 기반한다. 

 

따라서 탈권위는 인간을 조직에서 개인으로 분리하는 작업,

사회성에 매몰된 독립성을 깨우는 작업이 필요했다.

 

개인용 PC의 보급률, 초고속 인터넷 네트워크의 형성,

다양한 의사소통 경로가 탄생하자.

기존의 사회 조직단위가 가진 권위는 퇴색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조직의 수반인 아버지, 교사, 선배, 상사의 권위 역시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온갖 사회생활에서 몸소 체감한 우리들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세대간, 직급간, 여러 표현을 쓰지만,

상하간上下間 , 수직 관계에서의 많은 갈등들이 있던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ㅇㅂ나 ㅁㄱ처럼 수평적으로 총질 하는 등신들도 존재했지만)

 

사실 그동안 회사와 대학교 군기문화 같은 것들이 이전 시기에 이렇게 이슈화 되고 문제시 된적이 있던가?

어느 순간 부터 문제시 되기 시작했다. 문제시 되었다는 것은 곧 이것이 부당한 것이란 사실은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는 노무현의 위대한 유산이 성장할 무렵부터였다. 그전에는 이런 것을 문제시 할 경우 가장 먼저 등을 돌리던 것이 동기였고

이런 것이 무서워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동기들이 배신을 때려도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 사연을 올리면 수많은 이들이 나를 지지해준다.

싸움에서 패배하더라도, 나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전과 다른 용기가 생긴다.

이는 노무현 시기 가속화된 인터넷 세대의 성장이, 전통적인 커뮤니티와 오프라인 네트워크를 약화 시킨 결과물이다.

 

이것을 이슈화시킨 해당 세대는 대부분 노무현 시대의 교육을 경험한 이들,

노무현 시대부터 폭발적으로 생겨난 수많은 온라인 세대들이 아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은 인격적인 모독조차 받아들였고

거리낌 없이 대통령을 모욕하던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는 더이상 정치인을 욕하는데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는 온전히 부당한 모욕조차 스스로 다 맞아주던 어떤 바보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긴 기억의 유산이었다.

 

촛불집회를 나갈 때 아버지 눈치를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추락했다고 까지 이야기 되는 교권이나,

실질적으로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게 된 학교 선후배 관계에선 더더욱 그럴 것이고

권위주의는 해체되었다. 

 

우리가 정당한 비판을 하면서도 코렁탕, 마티즈 등의 드립을 치면서도

솔직히 진짜로 두려워하지는 않았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부당한 비난을 감내했던 어떤 바보같은 남자가 우리에게 그 위화감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노통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정권이 교체되고 9년동안 정치가 표류하는 동안,

정치 바깥 영역에선 그가 그리던 세상이 9년동안 꾸준하게 만들어지고 있어왔다.

역설적으로 권위주의적 대통령의 등장으로

이 바보 대통령의 탈권위적 행보와 대조되며

정치외적 영역에서의 탈권위 경향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그의 정책 중에 실패한 것, 시도되지 못한 것들은 있었을 지언정,

그의 지향점 자체는 그가 만들어낸 시민사회가 꾸준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박근혜 탄핵은 이런 정치와 사회 영역에서의 괴리가 극에 달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감히 '국가원수'가 된 '반신'의 딸에게 대항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4.19, 5.18 혹은 그 이전 역사에서 부터의 모든 '저항'이

노무현에게 와서 '탈권위'란 이름으로 귀결되며 만들어낸 위대한 결과였다.

 

한 진보어용지식인이 땅을 치고 후회하던 그때의 그 메시지처럼,

노무현이 없는 노무현의 시대가 왔다.

그를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를 성공한 대통령으로 부를 수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그를 성공 시킬 기회를 그의 친구를 통해 부여받았다.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고 과제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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