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버리는 일본 풍습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에다 버렸던 고려의 풍속이라고 한다. 

孝를 으뜸으로 여긴 우리민족이라지만 예나 지금이나 '영 아니올시다'의 부모자식지간이 많았을 것이라는 점은 간과하기 어렵다. 

과연 늙은 부모를 산에다 버리는 짓이이 법령으로 공식 입법이 되었을까?

고려시대 까지 병사자를 유기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노인을 버렸다는 기록은 없다. 

더군다나 고려대에는 불효죄를 반역죄와 더불어 매우 엄하게 처벌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사』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호적과 재산을 달리하고 공양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징역 2년에 처한다”

고 하였다. 

또한 국왕이 효행이 있는 사람과 80살 이상 된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선물을 주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이렇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고려장이란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조작했다는 설과 불교경전인 『雜寶藏經)』의 棄老國緣조의 설화와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고려장으로 와전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일본의 나가노현에는 노부모 유기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오바스테山의 전설이 그것이다.
옛날 옛적 신슈(信州:나가노현)에 있는 어떤 번국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많은 군사들을 에미시로 보내야 했다. 

이 전쟁이 오래갈 것임을 직감한 번주는 무사들의 식량을 비축하기로 결정한 후 즉시 영지 곳곳에 포고령을 내려 이렇게 알렸다. 

“오늘부터 60세가 넘은 노인이 집에 거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노인을 산속에 버려야 한다”

이후 모든 촌락에서는 비극적인 이별 장면이 연이어 연출되었다.

 

어제는 강건너 사효에(左兵衛)네가 울면서 노모를 업고 산으로 들어갔고, 오늘은 이웃동네 우효에(右兵衛)네가 늙은 아비의

손을 끌고 고개를 푹 떨 군 채 산길로 접어들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노인들을 버린 그 산을 오바스테산이라고 불렀다.

가쿠타로란 사내에게는 늙은 노모가 있었고 곧이어 자신의 노모를 오바스테산에 버려야 할 차례가 왔다.

그의 가족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모두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록 노모가 계단처럼 된 논밭을 오랜기간 오르내리느라 등이 일찌감치 굽어있었지만, 그런 노모의 행동이 굼뜨다고 싫어하는

식구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노모는 가족들에게 포근함을 안겨주는 그런 존재였다.

 

가쿠타로의 노모를 오바스테산에 버리는 날, 그 날 며느리는 새벽일찍 일어나 주먹밥을 만들고 물통을 준비했다.

 

그리고 가쿠타로는 노모를 업고 오바스테山을 오르기 시작했다.(등에 업힌 노모는 줄곧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꺾어놓았다.)

산 위로 올라온 가쿠타로는 샘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노모를 내려놓았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있어 서두르지 않으면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지 못할 수 있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가쿠타로를 보며 노모는 아무일 없다는 듯 말했다.

 

“가쿠타로야 고생이 많았구나. 날이 저물기 전에 어서 돌아가거라. 오는 동안 내가 나뭇가지들을

꺾어 표시해놓았으니, 그 표시를 따라가면 산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게야.”

 

노모의 이 말을 들은 가쿠타로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지엄한 번주의 명령이라지만 자신을 낳아준 노모를 산 속에 버릴 수 없었다. 가쿠타로는 노모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집으로 돌아온 모자를 본 며느리는 아무 말 없이 집 뒷켠에 구덩이를 팠고 그 안에 노모를 숨기며 봉양했다.

하지만 이 일은 곧 발각되었고, 이 사실을 안 마을 촌장은 마을에 해가 올까 두려워 관청에 이 사실을 고발했다.

번주는 가쿠타로를 불렀고, 이미 죽음을 가고한 가쿠타로는 사실대로 고했다.

 

“너는 네 어미를 버릴 수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네 어미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냐?

좋다. 내 너에게 문제를 낼테니, 만일 너와 네 어미가 문제를 푼다면 너희들의 목숨을 살려주마”

 

번주가 낸 문제는 이러했다. ‘재를 꼬아 밧줄을 만들어라’

가쿠타로는 머리를 쥐어짰으나,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와 노모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노모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간단하지. 밧줄을 태우면 될게 아니냐” 

번주는 밧줄 모양의 재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어서 두 번째 문제가 제시되었다. 

‘소라로 실을 꿰어라’ 

카쿠타로가 집으로 돌아와 노모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노모는 웃으며 말했다. 

“개미 허리에 실을 묶어 소라 안으로 들여보내라.

그 다음에 소라 안으로 연기를 불어 넣으면 될게 아니냐” 

그러나 번주는 여전히 흡족해 하지 않았고, 다시 세 번째 문제를 냈다. 

‘6척 길이의 방망이가 있는데, 어디가 머리쪽이고 어디가 꼬리쪽인가?’ 

노모는 역시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방망이를 물에 띄워 가라앉는 쪽이 머리이지” 

가쿠타로는 이번에야말로 번주가 크게 탄복하리라 여겼지만, 뜻밖에 번주는 또 다른 문제를 냈다. 

‘종이로 불을 싸보아라’ 

종이로 어떻게 불을 싼단 말인가? 번주가 우리 모자를 죽이려하는 구나 하며 낙담한 가쿠타로에게 노모가 이렇게 말했다. 

“등롱 안에 불을 켜면 될게 아니냐” 

이윽고 번주는 등롱(燈籠:대오리나 쇠로 살을 만들고 겉에 종이나 헝겊을 씌워 안에 촛불을 넣어서 불을 켜는 등)을 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쿠타로, 내 이제야 깨달았네 자네 어머니는 노인의 지혜라는 것을 가지고 계시네.

그것은 인생의 오랜 경험을 통해서만 비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이지.

난 여태껏 노인들을 밥벌레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내 앞서 내린 포고령을 거두어들이도록 하겠네” 

이리하여 가쿠타로와 그의 노모 뿐만 아니라 온 번국의 남녀노소 모두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이것이 오바스테스산의 전설이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고려장 전설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런데 이런 오사스테의 전설은 나가노현 치쿠마시의 오바스테산 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고루 퍼져있다고 한다.

어쩌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자신들의 지역에 전해지는 오바스테산의 전설을 우리나라로 들여와

우리민족이 옛날에는 노인을 버리는 풍속이 있었다고 날조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모로미야, 『전설일본』, 일빛, 2010 ※ 姨(おば:할머니)捨(すて:버리다)

 

 

  

고려장은 일제강점기 일본 우익들의 조작

 

  高麗葬은 늙은 부모를 산속 구덩이나 바위굴 속에 버려두었다가 죽은 뒤에 장례를 지냈다는 고려시대의 풍습이라고

전해지는데,  고려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믿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시대부터라고 생각한다.

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까지의 여러 문헌 어디에도 노인을 산 채로 내다 버리는 고려장에 관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대 1919년 평양고보 교사를 지낸 적이 있는 일본인 미와 다마끼三輪環의 <전설의 조선>이란 책에

‘不孝息子(불효자식)’이란 제목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것이 문헌에 있는 최초의 고려장 이야기이다.

또 192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에서 발간한 동화집 <조선동화집>에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민담을 모아 놓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어머니를 버린 남자’ 가 바로 고려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동화집은 편찬 동기와 의도가 식민통치와 결부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장례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주로 화장을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절에서 스님의 인도 아래 화장하여 유골을 절에 모셔두었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항아리나 작은 돌관에 담아 땅에 묻기도 하고, 산이나 강에 뿌리기도 하였다.


화장이 아닌 매장을 하기도 했는데, 특히 왕들은 매장을 주로 하였다.

제대로 장례를 치를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은 구덩이를 파고 묻거나 풀 등으로 덮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고려시대 법률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그 자손이 호적와 재산을 달리하여 공양을 하지 않거나,

부모나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는 자는 법으로 엄격히 처벌하는 등 효孝를 매우 강조하였다.

 

실제로 고려장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장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의 이야기는<耆老傳說>이라는 설화에,

- 70살이 된 늙은 아버지를 아들이 지게에 지고 산중에 버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함께 갔던 손자가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면 지고 온다며 그 지게를 다시 가져오려고 하자,

아들은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셔 지성으로 봉양했다.


 그 이후로 이런 풍습이 없어졌다.

<노모의 지혜>라고 불리는 설화는,

- 한 관리가 늙은 어머니를 풍습대로 산에 버리려 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봐 가지를 꺾어 표시를 했고,

관리는 차마 어머니를 버리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리고 어느 날 중국의 사신이 노새 두 마리를 가져와 어미와 새끼를 알아 맞히라고 하여 모두 풀지 못했는데,

관리의 어머니가 노새를 굶긴 뒤에 다시 여물을 주어 먼저 먹는 것이 새끼라고 알려 주었다.

그 뒤로는 늙은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없어졌다.

 


장사익의 노래 중에 <꽃구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려장에 대한<노모의 지혜>라는 설화를 바탕으로 쓴

시인 김형영의 시집 [다른 하늘이 열릴 때]에 실린 <따뜻한 봄날>이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덴데라>에 나오는 '나이 70살 때 산에다 버린다'는 내용이 설화 <기로전설>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의 이야기를 우리나라의 이야기로 꾸며 우리 민족을 비하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참고 : 박은봉 /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무덤 파헤쳐 고려청자 도굴하려고…일제 ‘고려장’ 날조 “서프라이즈”

http://news.donga.com/Enter/TV/3/0901/20110904/40055358/4

 


일본의 부모버리기 풍습을 영화화한 '나라야마 부시코'

http://blog.daum.net/dbsrmsrudal/1509354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ozorba&logNo=20139831028

 


 

日 주간지 '유령 고령자' 문제 부모 버리는 풍습에 비유

 

 

[조선일보 2010.09.03]정성진 기자 sjchung@chosun.com

일본의 한 주간지가 최근 발생하고 있는 '유령 고령자'문제를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에 비유해 기사화했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나이 많은 노인을 산에 버린다는 전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런 시각은 우리 입장에서 주목할 만한 접근이다. 국내 학자들은 "일본인들이 강점기에 '한국에는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고려장이라는 관습이 있다'며 없는 문화를 있는 것처럼 날조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8월26일자 슈칸신쵸(週刊新潮)는 '100세 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증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부제는 '행방불명이 드러낸 세계 최고 장수 국가 일본의 실태'였다.
잡지는 일본 도쿄에서 살고 있는 111세의 최고령 남성이 알고 보니 30년 전에 죽은 것으로 밝혀진 사건 등을 전하면서, "나라야마 부시코에서는 죽는 나이가 70세지만 현재 없어진 노인들의 나이는 100세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7월 28일 111세이며 도쿄에 살고 있던 것으로 기록돼 있던 노인이 실제로는 30여년 전에 사망했었던 것으로 밝혀진 것이 유령 고령자 사건의 시초다.

이후 비슷한 사례가 확인되기 시작했다. 수십년 된 시체가 발견된 경우는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50년간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말하자면, 행방불명인데 행정 서류상으로만 살아 있던 것.

슈칸신쵸는 이런 행방불명자가 8월 14일 현재 242명에 달한다고 했다.
기사에 거론된 나라야마 부시코는 1983년 만들어진 영화다.

부모를 부양하지 않고 버리는 '우바스테야마(�n捨山)' 전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식량이 부족해 70세가 되면 나라야마라는 산에 노인을 버리는 풍습이 있는 산골마을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를 듣고 "우리 고려장 풍습과 비슷하네"라는 생각을 했다면, 국내 사학계의 얘기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고려장 풍습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많이 사실(史實)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학계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의심받고 있다.

부경대 사학과 강인욱 교수는 "한국에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내용은 문헌 근거가 희박하다"며 "현재 학계 다수설은 고려장은 실재하지 않았던 풍습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명시적인 기록이 19세기 말 이후에 일본인이 쓰거나 다른 외국인이 쓴 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당시 성행하던 일본인에 의한 도굴을 쉽게 하기 위한 여론전(戰)이었다는 설도 있다.

( 펀주 : 저 무덤은 고려시대에 부모를 버린 불효자의 무덤이니 도굴해도 된다는 식으로 도굴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날조였다는 뜻.)

반면, 일본에서 유령 고령자의 문제를 나라야마 부시코에 비유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이 실제로는 일본인에게 내려오는 문화임"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사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03/20100903013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