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올렸던 것과 추가 내용을 첨부해서 다시 올립니다.


어느분이 베트남전 자료라고 올린 글이 있더군요






보고나면 누구나 한국군이 잘못했구나 라고 생각만 하지 진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이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학살에 대한 반박기사가 존재하는군요.

반박기사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1. 고자이 마을 회랑에 그려져있는 무서운 한국군이란 그림에 나오는 한국군의 모습 자체가 틀렸다.

ⓒ2007 김효성.
먼저 증거의 하나로 제시된 위령탑 뒤편 회랑에 그려진 '무서운 한국군의 모습'부터가 틀렸다. 기자가 아는 상식으로 그 병사의 부대마크는 맹호부대가 아니라 남베트남의 레인저부대다. 

맹호부대의 마크는 이름 그대로 호랑이가 크게 포효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도 차이가 많다. 그리고 부대마크를 오른 팔에 붙이는 것 역시 남베트남 부대의 특징이다. 아군의 경우에는 왼팔에 붙인다. 그것은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면 상식에 속하는 것이며, 한국군이라는 병사가 입은 군복 역시 남베트남의 복장이다. 일단 외면적인 고증 부분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2. 마을에서 주장한 학살 방법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것인가?

다음으로 학살의 방법에서도 문제가 발견된다. 목표물의 공중에서 폭발하여 살상효과를 높이는 지연신관 포탄과 헬기를 대규모로 동원하여 펼치는 헬리본 등은 논외로 해도 '독약을 먹여 죽였다'는 주장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독약을 먹여 죽이는 방식은 가해자가 소수이며 은밀하게 침투하는 경우에 제한된다. 그런 만큼 독살은 주로 암살에 적합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독약을 먹이려는데 얌전히 받아먹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은 발버둥치며 저항할 것이 뻔하다. 학살을 작정하고 들어간 부대가 그렇게 번거로운 방식을 사용할리가 없다. 그런 각도에서 접근하면 학살이라는데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기사 내용에 덧붙이자면 단순히 마을 주민을 몰아넣고 죽였다고 하는데 가난뱅이 한국군이 포탄과 대규모 헬기를 동원해 학살을 하였다? 당시 한국군은 가난뱅이라서 거의 모든 무장을 미국한테서 뜯어왔었고 한국에서 보내주는 전투식량이라고 오는 물자는 캔내부에 녹물이 차있는 등 시궁창인 상황에서 민간인 430명을 죽이려고 돈을 쓴다? 그냥 한 곳으로 몰아넣었으면 총을 쓰는게 더욱 상식적이고 있을 만한 방법 아닙니까?

3. 교차검증의 유무

정작 문제는 가장 중요한 교차검증이 없다는 것이다.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베트남의 '말라이 학살'이나 이라크의 '하디타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하다. 6·25 당시 노근리의 경우도 그렇다. 

그런데 고자이는 가해 측이 분명하지 않다. 기사를 보면 당시의 작전일지 등의 결정적 증거는 고사하고, 그때 학살에 가담했던 사람과의 인터뷰 같은 정황근거조차 없다. 

가해 측의 근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면 기사로서의 순도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학살보도가 전부 그렇다. 피해자들을 만나기 위해 베트남까지 달려갔던 것은 매우 가상하다. 

그러나 당시 맹호부대로 복무했던 사람을 수소문하여 찾아가거나 지휘관 급 인사들을 만나보려는 노력은 하였는가? 그렇게 발로 뛰는 것은 고사하고, 국방부에 공식적인 자료 요청이나 하였는지조차 의문이 간다. 지금까지 기사화된 학살이 전부 사실이었다고 해도 교차검증이 없으면 기사로서 인정받기 어렵다. 경우에 따라서는 좋지 않은 목적을 위해 대중을 미혹하는 행위로 지탄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4. 덧붙여

학살사건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존재하고 그 피해자가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고 말한다면 진실규명을 통해 피해자에게는 사과와 보상을 가해자에게는 벌을 내리는게 옳은 일입니다.

허나, 진실로 해명 되지도 않은 일에 휘말려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을 떠안게 되는 것은 거절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고자이 마을에서 학살 사건이 있다고 주장한 구수정 기자는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린선사 스님 학살 사건을 자신이 밝혀냈다고 주장하지만

그 스님 학살사건이란 것이 이미 수십년전에 베트공의 계략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걸로 밝혀진 사건입니다.

베트남 신문인 띠엔 뚜엔 신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이 사건 후 베트콩 공작대장 구엔 베가 이 사건 공작 성공으로 표창을 받았으며 베트콩측이 녓 노파를 통해 한국군 소행이라고 교사한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작임이 드러났는데도 정정기사나 사과 한마디 안하고 있습니다.


추가내용

현재 확실하게 법정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사건은 김종수 소위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6명을 살해한 사건 단 하나 뿐 입니다.

링크한 파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시면 김종수 소위 외에도 10여명이 더 있었다고 하지만
법정까지 가서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로 엄중한 처벌을 받은 심한 사건이 6명 사살입니다.
물론,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논할 수는 없는 거지만 흔히 떠돌아다니는 수 천명을 학살했느니 하는 소리는 단순한 찌라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의욕을 꺾어버리고 철수 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불리는 미라이 학살 사건 같은 경우에도
추정 민간인 피해는 약 300 ~ 500명 가량으로 최대 500명을 학살한 사건 하나만으로도 미국은 세계와 자국 군민들의 지탄을 받고 베트남에서 철수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도 300 ~ 500명을 학살한 사건을 틀어막지 못하고 전쟁의 패배를 감내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제대로 된 장비도 없어서 미군한테 구걸하고, 보급조차 열악해서 한국에서 건너온 녹물 섞인 김치캔 따먹던 한국군이 조직적인 학살을 은폐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 하실 수 있으십니까?

학살을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구수정 기자와 한겨레는 조작이 유력한 기사들로 유명하죠.

구수정의 병크

1. 위에 나온 고자이 마을 학살 사건.

한국군이 쓰지도 않은 독가스와 헬기까지 동원한 헬리본으로 대규모의 조직적인 학살이 있었다는 구라는 조금이라도 당시 한국군에 대한 군사지식이 있다면 바로 알 수 있는 겁니다.

2. 린선사 스님 학살 사건.
구수정이 밝혀 냈다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인데요. 

링크에 나오 듯 이미 옛날에 베트공에 의한 조작으로 밝혀진 사건입니다.

과거 기록조차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본인이 밝혀냈다고 말하고 다니고 있죠. 근거요? 스님 한 명 + 목격자 한 명이 증언을 한게 다 입니다. 재대로 된 목격자인지 확인은 제대로 했는지 궁금하군요.

3. 허무맹랑한 피해자 숫자.

2번 링크에 있는 내용입니다. 
당시 응웬탄퐁의 보고에 따르면 66년 1월23일부터 2월26일까지 약 한달 동안 맹호부대 3개 소대, 2개 보안대대, 3개 민간자위대에 의해 이 지역에서만 모두 1200명의 주민이 학살됐고, 그중에는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한 가족이 8가구나 됐다. 또한 1535채의 가옥과 850만t에 이르는 양식이 불태워졌고, 649마리에 이르는 물소가 총탄에 맞아 죽거나 불태워졌다.

1200명 학살? 그것도 전체 학살 숫자도 아니고 한 지역에서만 있었던 한 사건에서만? 850만t에 이르는 양식?

가장 큰 학살 사건인 미라이 사건이 최대치 500명입니다. 미국도 500명 학살한 사건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한국군이 1200명을 죽이고 묻는다?

850만t의 양식은 더 웃기죠.
링크를 보시면 14년 베트남 총 쌀 수출량이 650만t입니다. 베트남 전 지역에서 모아서 한 해 동안 수출하는 쌀의 총 양이 650만t 인데 현재의 발달된 농업기술도 아닌 60~70년대의 낙후된 베트남 농업 기술로 한 지역에서만 850만t에 달하는 양식을 쌓아두고 있었다? 수확철이 지나고 나서라면 혹시나라고 생각이라도 해보겠는데 연초 입니다. 겨울 다지나고 나서에요. 

농부는 가을 수확 후에 필요한 만큼의 양만을 남기고 작물을 팝니다. 한 지역에서 추수 끝나고, 팔건 팔고, 겨울동안 소비하고 나서도 남은 곡식의 양이 현대 기술로 무장한 14년 베트남 총 쌀 수출량보다 200만t이나 많네요.



그럼 퐁니 퐁넛 사건도 알아보도록하죠.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작성한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보고서의 공개와 관한 보도자료” (문서번호 베트남 00-11-14).

본 자료는 2000년 6월 1일자로 기밀해제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조사보고서로 미국사료관 문서관리소 (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에 RG(Record Group) 472로 소장된 문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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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 2302735, 미군 해병 연합행동소대 Delta-2 소속 본(J. Vaughn) 상병의 증언

2월 12일 월요일 13시 30분 경 CAP D-2 해병대와 Sylvia 대위 그리고 Seacrest 하사관은 CAP D-2 서쪽의 제 루트를 통해 Phong Nhi 마을에서 작전 수행을 하고 있는 한국 해병대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한국군은 마을에 포격을 가한 다음 자동화기로 습격을 시작했다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집이 불타고 마을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민병대원 하나가 부상당한 소년과 여자를 소대로 데리고 왔을 때 비로소 나는 한국군이 마을의 민간인에게도 총을 겨누고 있고 따라서 더 많은 부상자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5시 경 우리는 Phong Nhi와 Phong Nhut으로 들어가 도와주라는 허락을 받았다우리의 경비대는 5명의 미해군과 26명의 민병대 그리고 S-3로 구성되었다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사진 연구를 위한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우리는 동쪽 경로의 잠복을 고려해 Phong Nhi 근처의 넓은 루트를 선택했다우리가 발견한 것은 사진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 A: 처음으로 간 집

사진 B & C: 타버린 집들

사진 D: 재더미에 뭍힌 채 죽어 있는 마을 주민

사진 E: 마을 주민 두 사람이 이 불에 타 숨진 채 이 집에서 발견되었다

사진 F & G: 가슴이 도려진 채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

사진 H: 가장 큰 여자들과 아이들의 집단거의 모두 죽었음오른쪽 위의 여자와 아이들은 아직 살아있음사진 F & G에 있는 여자도 이 집단에 찾았음

사진 I & J: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은 여자와 아이아이의 머리에 난 총상이 증거

사진 J1 & J2: 사진 I & J에 있는 여자와 아이가 발견된 집단

사진 K & G: 볏짚에 가려진 채 도랑에서 발견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

사진 M: 이 아이는 몸 어느 곳에도 상처가 없다근처 연못에서 익사된 것으로 보임

사진 N: 총에 맞은 채 연못에서 발견됨사진 가운데 임신한 여자는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에 총을 맞음 (머리 앞이 날라감). 왼쪽 위의 아이는 사진 M과 동일 인물

사진 O & P: 20대 초반 여자 두 손 모두 손가락이 찢어지고 왼쪽 팔에 부상 당함미군 병사가 치료하고 있음

마을을 돌며 사진을 찍을 때 발견한 이상한 점 중 하나는 시체 더미 주위에서 총알자국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이는 마을 주민 모두가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았거나 총검에 찔렸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진술서는 1968년 2월 17일에 미군해병 J. Vaughn 상등병에 의해 작성되었다.

J.M. Campanelli, 미군해병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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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1968년 2월 18일에조사보고사가 해병 제3상륙전부대의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TAB G)

(1) 미해병대와 민병대원의 진술에 기초한 자체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a) 1968년 2월 12, 1중대, 1 대대부관한국 해병2사단은 진 군 도로1의 북쪽 으로 이동하였다그리고 CAP D-2를 통과하였다그리고 CAP D-2의 북쪽에서 400m 떨어진 곳으로 10시 30분경 이동하였다부대는 서쪽에서 움직였다한줄로 전개되어 Phong Nhi 촌을 통과 Phong Nhut(2)를 향해 편대가 적진신속비행함.

(b) Phong Nhut(2)로부터 전투가 들려왔음그리고 오두막들이 타기시작하는 것이 보였음

(c) 13시 경촌락근접한 곳에서의 포병대의 사격 후 보병중대는 Phong Nhi 촌 으로 돌아옴사격총성에 이어 타오르는 연기가 관찰되었음. 1330분경 민병대 봉사 자들은 단도에 찔려 부상당한 어린 소년과 소녀를 이송해 왔음

(d) 13 30분이 지나자 마자, CAP D-2에 도착한 연합작전중대의 사령관인 Delta

무전기에 의존 USMC 연락사무국에서 한국 해병제2산단에 접선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Call Sign : Past 6).................................................

(72 하단에서 멈춘 것번역안됨)

e) 약 1500시경 미해병지방군이 CAP D-2로부터 퐁니햄릿(Phong Nhi Hamlet)로 진입해 들어왔다미해군중 하나가 그들의 발견에 대해서 촬영을 해놓았다. (그 사진들은 TAB G 6번 동봉물에 첨부되었다. MAF III에 의해서 공급되었던 그 사진들은 공문에는 확인되지 않았다확인작업은 사진작가에 의해 행해진 사진검증 작업과 관련있는 macig에 의해 확인되었다본문에서 명시되지 않은 다른 여분의 사진들도 발견되었다이러한 사진들은 본문에서 명시된 사진들의 목록과 관련이 있다). 퐁니(PHONG NHI)의 주민들은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사살되었다몇몇의 피해자들은 칼에 찔렸고한 젊은 여인은 가슴이 도려내어졌다. 69명의 시민들이 퐁니(PHONG NHI)와 퐁넛촌(PHONG NHUT)에서 죽임을 당했고 퐁니는 불에 의해 파괴되었다.

F) 이 작전은 촌장이나 관리들에 의해 허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화임무에 대해서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G) 한국해병제2여단의 여단장은 그 사건 이후에 해당마을의 촌장을 방문하여그러한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으며 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30포대의 쌀을 주었다.

H) 검사관은 그날의 한국해병제3상륙전부대의 전투상보에 대해 조사했다한국해병은 퐁넛에서 제1중대가 작전을 수행한 것에 대해그리고 115분에서 1530분까지 소총공격을 받아 한명의 부상자를 낸 것에 대해 비난했다상대편의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2) 주석 누가 퐁넛에 갔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D. 1968년 2월 20일에 사령관과 한국해병 제3상륙부대에 대한 보충조사에 내용이 보내졌다이 자료들은 특별한 주석없이 1968년 212일 한국해병 중대와 함께했던 2개의 미해병의 보고서에 보내졌다. (TAB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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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진술서의 요약

a) 9:30분에서 10:30분 사이에 한국해병중대는 CAP D-2과 CAP D-1 사이에 있는 1번 동로에서 빠져나와 서쪽으로 이동

b) 퐁넛과 안탄(An Than)(에서 소총사격을 받았고 한명의 해병이 부상을 당했다후에 두번째의 한국해병이 소총사격에 의해 부상을 당함

c) 박격포가 퐁누 마을을 향해 설치되어 발사되었고 25-30명의 주민들이 그 곳으로부터 달아났으나 그 중의 몇명은 파편에 의한 상처를 입었다.

d) 한국해병은 그 마을을 지나쳐 갔다. (불명확)

e) 약 12시간동안한국해병들은 지휘그룹과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그들은 작은 연못과 대나무밭에 있는 시체들을 보았다.

f) 그 중대는 4번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던 퐁니 북쪽 600미터 근교에서 하루밤을 보냈다.

g) 이른 밤한명의 해병대원이 past1-4로부터 무전교신을 받았는데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기때문에 어떤 누구와도 낮의 작전에 대해 논의하지 말것을 지시받았다.

(2) 주석

a) 작전에 투입되었던 한국해병들의 진술의 진의가 의심된다그들이 지휘그룹과 마을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12시간동안 1번 도로에 남겨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아무도 중대의 이동이 여러 마을과 관련해서 구분짓지는 않는다.

b) 중언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의 가치를 갖는다.

1. 한국해병은 소총과 포를 발사했다.

2. 한국해병 중대는 민간인학살이 행해졌던 그 지역에 있었으며그리고 그일이 있었던 밤동안 퐁니 북쪽 600미터 인근에 배치되었었다.

3. 한 해병에게 침묵을 지키라는 경고는 미해병 연락부대로부터 제2한국해병여단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c) 조사보고서나 또는 추가보고서에 포함되었던 미해병연락부대의 장교로부터의 증언이 없음

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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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1968년 4월 16사령관한국해병제3상륙부대의 공문 :

주제 : 1968년 212일 한국해병에 의해 행해진 전쟁범죄 보고서가 주월미군사령관에게 조사보고서와 추가보고서가 전해졌다. (TAB 1)

(1) 보고서의 요약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그 보고서는 한계가 있다.

(b) 전쟁범죄가 저질러졌다는 가능성이 있다.

(c) 한국해병 제2여단 김연상사령관은 마을의 촌장에게 그가 조사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으며 사상자들은 포병과 베트콩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고 말했다.

(d) 베트남 정부 관리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으로 간주되어진다.

(2) 주석 사령관과 한국해병제3상륙부대는 전쟁범죄가 일어났을거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조사장교의 의견이나 결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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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주월한국군의 사령관은 주월미사령관의 편지에 1968년 6월 4일 응답했다. (TAB K) 그의 편지는 서명되지 않은 한페이지 반 분량의 조사보고서를 동봉하고 있다각각의 편지는 아래와 같이 분류되어 보내질 것이다.

(1) 채 중장의 편지

(a) 베트남 생존자에 대한 관심 표명

(b) 주장되어진 사건이 전체적으로 조사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c) 한국 해병중대가 1978년 2월 12일 퐁넛 마을 주변을 일소했다고 인정되어지나퐁넛마을에 들어갈 아무런 상황이 없었음을 진술되고 있다대신에 11시간 30분에 그 중대는 퐁넛으로부터 완전 반대방향인 북서쪽 방향으로 1시까지 도착해야 했다.

(d) 유니폼으로 위장한 베트콩들이 그 지역 내에서 여러번 작전을 수행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e) 학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음모화되고 무자비하게 행해진 행동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f) 한국해병은 어떤 수단으로도 제네바 협약의 어떤 조약에도 위배되는 어떤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2) 보고서는 다음의 필수항목이 명시된 편지를 동봉하고 있다.

(a) 1968년 212일 퐁넛에서 사격을 받은 직후 한국해병대는 그 마을을 공격했다그 마을에 진입할 때 중대는 적군이 이미 떠났음을 그리고 민간부상자들이 떠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b) 퐁니마을에 무차별사격이 행해졌고 그로 인해 많은 손상을 야기시켰다.

(c) 중대는 퐁넛마을을 11:30분에 떠났고 1시에 다음 목표지역에 도착했다.

(d) 위장한 베트콩들은 한국해병이 떠난 후에 그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그리고 퐁넛마을과 퐁니마을에 무자비한 작전을 행한 한국군을 비난했다.

(e) 2한국해병대대의 장교는 그가 마을에 30포대의 쌀을 줄때 그 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다.

(3) 주석 :

(a) 위의 두 서류에서 제공된 정보는 미해병민병그리고 베트남 민간인들에 의해 제공된 정보와는 견해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b) 두 서류는 모두 한국군해병가 퐁넛마을을 11:30분에 다른 목표지역으로 떠난 것을 제외한 중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나타내지 않고 있다한국해병중대가 북서쪽으로 이동했다고 진술하면서 채중장은 중대가 이동했던 방향을 명시하지 않았던 조사보고서보다는 그가 가진 다른 정보에 기초했다고 말하고 있다.

(c) 두 서류의 작성자는 1시 30분에 퐁넛지역에서 제 1중대가 소총사격을 받았다고 명시한 한국해병여단으로부터의 상황보고서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d) 불행하게도 중대에 편입된 2명의 미해병은 그들이 지휘그룹과 퐁니마을에 들어간 후의 이부대의 이동경로를 따라가지 못했으며 시체들을 보았다그러나 그 중 한명은 퐁니마을의 북쪽 600미터 부근에서 부대가 밤을 보냈음을 명시하고 있다.


확실하게 저질러졌다고 밝혀 진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다고만 나왔을 뿐더러 흔히 한겨례에서 주장하듯이 계획적으로 벌어진 사건 또한 아닌 걸로 보이는데 아닌가요?


덧붙이자면,
학살사건 말하는 분들이 많으신데 과연 자신이 본 기사가 맞는 기사인지 한 번 찾아보시는게 어떨까요? 근거는 제대로 있는 기사인지. 제가 지금까지 봤던 대다수의 학살 관련 내용은 터무니 없이 부풀려져 있거나 제대로 된 근거 자료조차 없는 것들 뿐이었습니다.

기사 외에도 아는 파병군인한테 들었다고 하면서 말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그 아신다는 파병군인 정말 아십니까? 지인에 지인을 통해 들으신건 아니고요? 제대로 본인이 목격하였거나 했다고 말하는 파병군인한테 들으셨습니까?

전쟁중엔 수 많은 루머가 생산됩니다. 아는 사람이~ 로 시작하는 수 많은 루머들이죠. 걸핏하면 사람이 죽어나가고 자신의 공을 부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하는 전쟁에서 단순히 지인한테 들었다고 하며 말하는건 과연 신빙성이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