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모습을 봐선 상상하기 힘들지만, 의외로 여성부는 국민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97년 대선 당시 여당(이회창)과 야당(김대중) 후보가 모두 여성부를 공약으로 내걸었을 정도로 시대적 요구가 강했죠.

김대중 정부는 '여성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양성평등 관련 업무를 보게 하다가, 규모나 예산 면에서 한계에 이르자

2001년에 이를 중앙부처로 승격시켰습니다. 이것이 '여성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지요.


초기의 여성부는 여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사안들을 담당했습니다. 특히나 여성이 피해자가 되는 각종 범죄

(성폭력, 가정폭력 등)의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구요. 이 당시만 해도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한심한 수준(특히 가정폭력은 '내 마누라 내맘대로 할거다!'라는 인간들이 많았죠)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업무만으로도 제법 바쁘게 돌아갔습니다.


4년 뒤, 노무현 정부에서 보육 관련 업무를 여성부로 넘기면서 여성부는 '여성가족부'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 시기의 주된 성과로는 역시 호주제 폐지를 들 수 있겠네요. 호주제란 가정의 대표자(즉 '호주')를 두어

나머지 구성원들을 호주의 밑으로 등록하는 제도인데, 이 호주가 원칙적으로 남성에게 승계되었기 때문에

호주제는 남성(즉 아버지)을 우두머리로 하는 가부장적인 가족질서를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온갖 망언들이 터져나왔습니다만(한나라당의 혈통의 순수성 드립 등),

결국 2005년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호주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보육 업무를 주관하게 되면서 성폭력 피해 아동들을 위한 종합시설인 '해바라기 아동센터'를 만들었는데,

이게 현재까지도 여성부의 주된 업적 중 하나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사건이 일어나도

피해자에 대한 보호가 미흡하여 웃기지도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었는데, 이 아동센터가 전국에 설치되면서

피해자 지원의 수준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도가니'로 유명한 인화학교 사건의 피해자들도 이곳의 보호를 받았죠.


이외에도 재혼 여성의 자녀에 대한 차별을 줄일 수 있는 친양자제도를 지원하는 등, 초창기 여성(가족)부의 활동은

제법 본연의 목적에 부합되는, 바람직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비극은 이 뒤에 일어났지요.


이명박은 대통령 후보 시절 '여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사실 이것 자체에 크게 무리는 없었지요.

2007년 시점에선 양성평등에 위배되는 제도들이 대개 수정되거나 폐지된 상태였으니까요.

실제로 당선된 뒤 이명박 정부는 보육 업무를 다시 보건복지부로 돌리면서 여성가족부를 여성부로 환원합니다.

그런데 2년 후에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갑자기 다시 주관 영역을 늘려 여성가족부로 되돌려놓았는데,

이때 여성부로 넘어간 영역이 바로 청소년다문화 정책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됐습니다.


본래 여성부는 여성 관련 업무, 그 중에서도 특히나 '피해자 보호' 를 주된 업무로 삼는 기관이었습니다.

청소년 문제는 복잡한 사춘기 특유의 심리와 그러한 청소년들간의 역학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접근해야하는데

그러한 식견과 역량이 여성부에는 없었던 것이죠. 사회문화적인 문제까지 얽힌 다문화는 말할 것도 없구요.

아는건 없는데 뭔가 하긴 해야하는 애매한 상황에서 여성부는 청소년을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미지의 '적'인

'게임'으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며 만들어낸 것이 바로

셧다운제입니다. 게임과 청소년의 관계를 강간범과 피해자의 관계 수준으로 인식했기에 가능했던 발상이죠.

뭐 '문제가 있어? 뿌순다!'는 이명박 정부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했지만요.


뭐 그냥 삽질만 하는걸로 끝났으면 그나마 나았겠지요. 게임이라는 새로운 밥통을 찾아서 그런것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턴가 여성부는 본래의 목적인 '피해 여성 보호'에 상당히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8년의 조두순 사건, 2013년의 윤창중 사건 등 굵직한 성범죄 사건에 대해 여성부가 한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오히려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사건의 해결을 촉구하고 범인을 규탄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죠.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역대급 성범죄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꽤나 미적지근합니다.


결국 현재의 여성가족부는 본연의 업무에선 손을 반쯤 놓은 상태로, 자신들이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다른 분야

(주로 게임, 음악, 영화등의 문화컨텐츠)에 대고 감 놔라 대추 놔라 하고있는 상당히 웃기는 꼴이 됐는데요.

골때리는 점은 이러한 여성부의 예산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011년의 2190억에서 불과 2년만에 5370억.

두 배 이상이 오른 셈입니다. 물론 이 예산 중 태반은 상기한 전문성이 없는 분야에 훼방놓는 데에 쓰이고 있구요.

게다가 무슨 말 못할 일이 그리 많은지는 몰라도 정보 유출에 상당히 민감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013년 기준 여성부 문건의 40%가 비밀문건인데, 이는 노무현 정부 시절의 5배에 달하는 비율입니다.

변질된 것은 업무 영역만이 아닌 셈이지요.


사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양성평등에 위배되는 정책과 제도들은 2000년대 중반 시점에서 거의 정리되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역차별이 우려되는 제도(여성전용좌석 등)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시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여성을 전담하는 '부서'가 필요한지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많습니다.

물론 끊임없이 터지는 여가부의 삽질이 이러한 회의를 부추기고 있는게 현실이구요.


개인적으로 '여성'과 '가족' 부분의 분리는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나 청소년 관련 업무의 경우

관여할 자격도, 능력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가부 자체가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초창기 여성부처럼 여성 관련 업무에만 집중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독립된 부서가 아닌 하나의 위원회로서

다른 기관(보건복지부 등)의 업무를 감시, 조언하도록 하는 쪽이 지금 시대의 요구가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