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나

 뺨을 스치는 미풍, 옷자락을 흔드는 산들바람. 소나는 황금빛 바람에 휩싸인 채 눈을 감고 선율을 음미했다. 그녀의 손이 에트왈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팔랑개비처럼 경쾌하게 현을 뜯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곡, 처음 연주하는 곡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랫동안 능숙하게 연주해왔던 곡처럼 정겹게 느껴지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름답고 신비한 곡이기도 했지만 놀라운 곡이기도 했다. 곡을 구성하고 있는 음표 하나하나가 마치 마법진의 마법 문자처럼 제각기 뜻과 질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청나게 정형화된 규칙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운 색채를 지닌 곡이었다. 

 연주하면 연주할수록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되는 곡이었지만, 그녀의 황홀경은 맨발이 차가운 돌바닥에 닿는 느낌과 함께 끊겼다. 소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주변은 어둡고 넓었다. 그녀를 감싸던 황금빛 바람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아직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방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소나는 곡의 여운에 잠겨 잠깐 동안 멍하니 어둠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휘휘 저었다. 곡의 여운이라니, 마음 편한 소리도 정도가 있었다. 지금 여기에 놀러온 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녀는 재빨리 에트왈을 더듬어 찾았다. 에트왈은 그녀 앞에 얌전히 둥둥 떠 있었다.

 ‘그 분…잭스 님을 찾아야 해.’

 그녀의 손이 에트왈의 현을 한 번 퉁 하고 튕기자 소리가 파문처럼 퍼져나가며 음파로 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곳은 천장이 넓은 돔으로 덮인 원형의 방이었다. 넓었고…주변이 군데군데 부서져있었다. 바닥이 심하게 움푹 파이거나 박살난 곳이 있는 걸로 보아 아주 심한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엄청난 흔적에도 불구하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소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번엔 좀 더 세게 현을 퉁겼다. 

 그러자 이번엔 아주 기묘한 느낌이 그녀에게 전해져왔다. 이 넓은 방 안 대부분의 장소는 파악되었으나 딱 한 부분, 저 멀리 있는 부채꼴 모양의 범위에서만 아무런 파동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에트왈의 신비한 음은 아무리 소리를 잘 흡수하는 부드러운 섬유라 해도 튕겨져 돌아오는데……. 소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소리로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이 더 두려웠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소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트왈이 그녀의 바람을 제대로 들어줬다면 잭스는 분명 이 곳에 있을 터였다. 이 원형의 방 다른 곳에 잭스가 없다면 분명 남은 곳은 저기뿐이었다. 소나는 대낮의 햇살 속을 걷듯 파편과 파인 곳을 자연스럽게 피하며 그곳으로 걸어갔다. 타박타박 맨발로 대리석 위를 걷는 소리가 넓은 조용한 방 안을 울릴 뿐, 사위는 고요했다. 

 하지만 소나에겐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 

 지지지지직

 ‘귀가…귀가, 아파. 이 이상한 잡음은 대체 뭐지? 이런 소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는데…….’

 처음엔 막연하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잡음, 뇌를 직접 찌르는 듯 날카로운 송곳 같은 이 소리가 에트왈의 음을 흡수해버렸던 것이었다. 소나 같이 예민한 청력의 소유자에게 이 잡음은 거의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귀를 막는 것 따위로는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머리가 두 쪽이 날 정도의 두통이 작렬하자 그 고통에 못 이겨 소나는 등을 활처럼 구부렸다. 집중력을 잃자 에트왈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보통이라면 경악을 하면서 에트왈의 상태를 확인할 소나였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 정도도 사치였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그녀의 두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에트왈을 질질 끌면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에선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가겠다는 의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힘을 낼 때였다. 잭스를 만나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얼마나 갔을까. 온 몸의 힘을 짜내 걸음을 옮기던 소나의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감돌기 시작했다. 소나는 이 냄새를 알았다. 피 냄새였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양의 피. 가뜩이나 기괴한 잡음에 머리가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는데 피 냄새까지 풍겨오자 속이 뒤집어지는 소나였다. 결국 그녀는 에트왈을 주기적으로 튕기는 것도 잊은 채 비틀거리며 걷다가 무언가에 걸려 볼썽사납게 뒹굴었다. 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건 차가운 바닥이 아니라, 끈적하고 비릿한 피 웅덩이였다.

 ‘꺅!’

 찰팍

 피의 감촉은 섬뜩했다. 동시에 두통을 유발하던 그 잡음이 씻은 듯 사라지자 소나는 간신히 수면 위로 부상한 잠수부처럼 크게 숨을 헐떡였다. 그 잡음을 겪었던 시간은 기껏해야 5분이 채 안 되었을 터였지만 그녀에겐 마치 5시간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해 소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 잡음을 듣지 않게 된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지, 그리고 이 피가 누구의 피일 것인지에 생각이 미치기까지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위치상으로 여기는 그 무음지대이자 동시에 잡음지대의 중심부라 할 수 있었다. 이른바 태풍의 눈. 소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손을 뻗어 에트왈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에 닿은 건 에트왈의 유려한 몸체 대신 거칠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소나는 어둠속에서 손을 더듬어 그 무언가를 만져보기 시작했다. 소매……? 거친 가죽 느낌의 소매에서 통나무처럼 두껍고 단단한 팔뚝, 그리고 팔뚝 끝에 달린 손까지 그녀의 여린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손에는 두꺼운 손가락이 세 개 달려있었다. 손가락이 세 개, 거친 가죽옷, 그리고 피 웅덩이…….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그리고 그 하나를 깨달았을 때, 소나는 다른 의미로 머릿속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잭스 님!’

 소나는 경악하며 머리가 있음직한 부분으로 손을 올렸다. 예의 그 강판 같은 가면이 느껴졌다. 확실히 잭스였다.   

 ‘잭스 님……. 제가 왔어요.’

 소나의 두 눈에서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지독한 잡음도 견뎌내며 참았던 눈물이었다. 하지만 잭스의 곁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그 모든 참을성의 방벽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있었다. 

 ‘제가 왔어요, 잭스 님.’

 드디어 만나고자 했던 그와 만나니 수많은 감정이 엉켜 북받쳐 오르는 소나였다. 마침내 도달한 것이었다, 마침내……. 협곡에서 원망의 감정을 담아 그가 밉다고 했을 때부터, 몇 번의 좌절과 몇 번의 기적을 거쳐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잭스를 만나면 전하고 싶은 감정이 너무 많았다. 오래 전부터 그를 동경했고, 협곡에서 구해줘서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쌀쌀맞은 태도가 원망스러웠고 미웠다. 하지만 그러한 쌀쌀맞은 태도가 자신이 자초한 결과라는 점에선 미안했다. 협곡에서 나가면 챔피언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 것에 대해선 야속했고, 엉망진창으로 지치고 부서진 모습이 되어도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점에선…슬프고 가엾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올곧기만 하는 그의 메마른 내면이 너무 불쌍했다. 그녀의 내면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어둠에 눈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근처에 있던 에트왈의 현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 나오면서 잭스의 처참한 상태가 드러나자 그 감정의 폭풍은 이내 절박함으로 변모해갔다.    

 ‘아아, 어떻게 이런…이렇게까지…….’ 

 잭스의 상태는 슥 훑어보기에도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군데군데 그을린 채 누더기가 다 된 겉옷에서부터 피딱지가 눌어붙은 채 심한 화상을 입은 왼팔, 할퀴고 찢긴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피범벅이 된 전신……. 귀로 들어보면 훨씬 더 심각했다. 몸 안의 흐름이 엉망진창으로 뒤틀려있었고 가느다란 호흡마저 불규칙했다. 되는대로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그의 머리를 받쳐주는 소나의 손길이 점차 다급해져갔다. 

 잭스를 기점으로 하는 이 기괴한 잡음의 공간은 안팎의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소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눈치 챌 겨를이 없었다. 잭스 근처에 쓰러져 있는 멘드레이크나 렐리바쉬 학회장도 저 뒤쪽에 짐짝처럼 널브러져 있는 원로 소환사들도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청각으로도 시각으로도 잘 파악되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지금 소나의 머릿속에는 온통 잭스에 대한 걱정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야 해.’

 그녀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며 에트왈이 알려줬던 두 번째 곡의 악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번에는 듣는 이를 진정시키고 치유를 해주는 마법의 음악이었다. 첫 번째 곡도 무사히 성공했으니 이번이라고 실패할 리가 없었다. 소나는 다급하게 악보를 훑어봤다. 본래대로라면 첫 번째 곡처럼 충분히 곡의 흐름을 이해하고 음표 하나하나의 의미를 이해해야 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연주자로서의 자존심과 양심은 잠시 접어둬야 할 때라 여긴 소나는 에트왈 위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어서 곡을 연주해야해. 제발 이 곡이 잭스 님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기를…….’

 연습이 좀 부족한 건 사실이었으나 곡 자체를 연주하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곡의 구성을 이루는 마법적인 지식을 이해하는 점이 문제지, 기교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는 소나였다. 에트왈은 그녀의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악기라면 모를까, 에트왈에 한해서만큼은 그 어떤 처음 보는 곡이라 해도 훌륭하게 연주할 자신이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손가락이 현을 퉁기며 곡의 첫 소절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화창한 봄날의 들판처럼 청명하고도 활기가 넘치는 선율이 에트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에메랄드빛 녹색 선율이 잭스의 몸을 부드럽게 휘감기 시작했다. 곡의 마법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자 소나의 마음속에선 기쁨이 샘솟았고, 곧 그 기쁨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변모해갔다. 현을 뜯는 그녀의 손에 점차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자신감이 오만이었다는 걸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전쟁학회

 소환사의 회랑 쪽으로 통하는 거대한 석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단순히 닫힌 것이 아니라 강력한 주문으로 봉인되어 있었기에, 안쪽에서 먼저 연락하지 않는 이상 회랑 바깥에선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전쟁학회는 고위 소환사들에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권력과 권한이 집중된 기관이었다. 왜 이렇게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터이지만, 어쨌든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러한 체제는 회랑 바깥에 있는 인원들을 엄청난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하필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중간급 소환사들이 전부 뒤틀린 숲이나 칼바람 나락 등 리그의 전장 복구 문제로 자리를 비운 상태라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는 상태였다.

 “밴들 시티 쪽 마법진 상태 어때요? 복구됐어요?”
 “끊겼습니다! 완전히 차단됐어요!”
 “그럼 자운이나 필트오버…….”
 “자운도 필트오버도 전부 끊겼어요! 다른 국가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기랄, 그럼 결계 쪽은요? 안에 계신 소환사님들은 대체 뭘 하고 계신거야?”

 이렇게 말이다.

 고위 소환사 없이 남은 직원들이나 견습 소환사들이 뭘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전쟁학회가 어떤 곳인가? 마법학문의 산실이며, 모든 마법의 시작과 끝이 있는 곳이 바로 전쟁학회였다. 학회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장거리 이동용 마법진이나 통신 마법 같은 것도 그 정교함과 복잡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하물며 외적 침입용 결계 같은 전시(戰時)급 술식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들 딴에야 어떻게든 통신만이라도 복구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마법진의 구조 일부를 이해하는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벅찰 지경이었다. 

 여러 인원들이 발바닥에 땀나도록 돌아다녔고, 주문이며 마법진이 그려진 양피지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바닥에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다. 정작 발로 뛰는 고생에 비해 성과가 미미하긴 했지만……어쨌든 이들도 이들 나름대로 정신없는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이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회랑 쪽 거대한 석문을 뚫고 희미한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금만 더 이들이 빨리 알아차렸어도, 조금만 더 이들에게 정신적인 여유가 있었어도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언제나 지나간 다음에 만약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보다 부질없는 짓은 없는 법이었다. 

 선율은 밤안개처럼 낮게, 스멀거리며 사람들 발 사이사이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속삭임처럼 조용하게, 가지를 기어오르는 덩굴처럼 은밀하게 사람들의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누군가 뭔가 노랫소리 비슷한 것이 들린다고 어렴풋이 눈치 챘을 때는 이미 정체불명의 선율이 학회를 가득 메운 뒤였다. 하나 둘, 사람들이 하는 일을 멈추고 그 선율에 넋이 나간 듯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속삭이는 듯한 작은 소리가 어떻게 이 소란 속에서도 똑똑히 들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선율, 차마 수식어조차 붙이기 부끄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속삭임이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은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맹독과도 같았다. 

 그렇게 비극은 시작되었다.

 “컥…….”

 비극의 시작은 석문 근처에서부터였다. 회랑 쪽 석문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하급 소환사 한 명이 쓰러졌다. 처음엔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한 사람쯤이야 발이라도 헛디뎠나보다 하고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는 노릇 아니던가. 하지만 그 소환사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마치 도미노 쓰러지듯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기 시작하자 혼란과 공포가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숨, 숨이…….

 여기저기서 목이나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다 쓰러져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마치 썩은 고목 넘어가는 듯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비명을 지를 시간도 당황할 시간도 없었다. 당황할 시간이라도 있는 게 여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제발, 그마안……!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그런데 왜 귀를 막아도 계속…….”

 선율은 계속해서 그들의 귓가에 속삭임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귀를 막아도 머리를 땅에 짓찧어도 그 소리는 끊임없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독처럼 농밀하게 들려왔다. 선율은 아름다웠고, 그것은 독이었다. 생기를 빼앗는 달콤한 독. 스멀스멀 기어올랐던 선율은 마치 뱀이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듯 확하고 그들의 숨결을 낚아채갔다.
 
 서있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쓰러진 사람들의 몸에서 붉은 빛 도는 안개가 스르르 솟더니 석문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노래가 들려온 바로 그곳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선율이 모종의 이유로 이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이 보였다. 거의 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안개는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 안개가 몸에서 빠져나가면 빠져나갈수록 사람들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기괴한 선율은 누가 중간을 칼로 잘라버린 것처럼 뚝 하고 끊겼다. 붉은 안개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때였다. 희미한 신음소리마저도 잦아들 무렵 예닐곱 명 정도의 인원이 유령처럼 벌떡 일어섰다. 얼핏 보기엔 옷차림도 생김새도 평범해 보이는 학회 말단 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생명력을 갈취당한 것 치곤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두꺼운 양털 속에 감춘 예리한 날붙이처럼, 그들에게선 은연중 무언가 범접하기 힘든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쾌활하게 웃으며 오른손으로 악수하면서, 가볍게 인사라도 하듯 왼손의 만년필로 상대방의 목을 찔러 죽일 것만 같은 불길함……. 만일 잭스가 그들을 봤다면 이렇게 평가했을 터였다. 자신만큼이나 닳고 닳은 암살자, 라고 말이다. 그들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폐하께서 예견하신대로다. 소나 부벨르는 두 번째 연주에 실패했어. 선율은 제대로 녹음했나?”
 “이상 없습니다.” 다른 한 명이 붉은 무언가가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마법석을 안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으며 말했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너는 먼저 출발해라. 달과 별이 세 번 떨어지고, 전갈의 두 번째 꼬리가 빛나는 날 제 2 지점에서 다시 합류하도록 하자.”

 하지만 남자의 명령을 받은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불가능합니다. 소나 부벨르의 연주로 생명력을 상당 부분 빼앗겼으니 그 전에 제 목숨이 다할 겁니다. 적어도 두 명은 더 필요합니다.”

 그가 품고 있는 마법석에는 예의 그 생명을 빼앗는 연주가 들어있었다. 연주가 마력을 잃게 하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순수한 에너지를 공급해야 했다. 이 경우, 그 에너지는 사람의 생명이었다.

 “좋다. 너와 너는 저자와 함께 가라.”

 남자가 지시를 내리자 곧 두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의 사람들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학회 바깥으로 쏜살같이 질주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뛰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넓은 홀에는 발자국 소리 하나 울리지 않았다. 남은 자들은 다음 명령만을 기다리는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처음 명령을 내렸던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디 우리는 이 저주스러운 학회와 같이 산화됨으로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허나 폐하의 예언이 맞았고 우리가 틀렸다. 우리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폐하의 계획이라도 망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이다. 이 일에 우리 전갈자리 일족의 명예가 걸려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12성좌 놈들에게 이 이상 업신여김을 받는 건……사양이야.” 

 남자는 마지막 한 마디를 말할 때 역겨운 것이라도 씹은 듯 얼굴을 구겼다. 짤막한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말했다. “이곳을 떠난다. 흔적을 지워라.”

 명령이 하달되자 남은 인원들은 흩어져 각자 학회에서 썼던 신분의 인적 사항을 모두 바꾸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름도 출신도 모두 거짓이었다. 그 거짓을 다시 거짓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흔적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짓을 지우는 게 아니라 거짓을 다시 거짓으로 덮어버리면 된다는 것을, 이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눈치를 채고 제아무리 기를 쓰고 추적해도 엉뚱한 곳으로 빠질 터였다…여기가 ‘평범한’ 기관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여긴 전쟁학회였다. 안전장치는 아무리 해도 모자람이 없는 법이었다. 남자는 신속하게 움직이던 인원 두 명을 불러 세웠다.

 “멈춰. 너와 너는 여기 남아야 한다. 빠르든 늦든 우리들의 존재는 탄로난다. 이쪽에게 당한 상임의원 두 명이 눈에 불을 켜고 찾을테니 말이야. 너희는 남아서 우리들의 모든 행적을 전부 너희들에게 연결해라. 절대 우리들의 정체가 놈들에게 탄로 나면 안 돼. 특히 그 두 명의 상임의원에게는 절대로.”

 요는 그냥 여기서 미끼가 되라는 소리였다. 정체가 탄로 나는 즉시 죽을 터였다. 아니, 곱게 죽으면 그걸로 감사할 일이었다. 학회는 절대 한 번 잡은 미끼를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 구차하게 손가락 조이는 틀이나 달군 인두 따윌 쓰지 않아도 마법으로 더 고통스럽고 끔찍하게 고문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남자도 지목 받은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걸 잘 알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털끝만치의 자비심도 없이 이들을 죽으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지목된 두 명의 얼굴에선 절망은커녕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희열의 미소였다. 섬뜩한 광기로 번들거리는 웃음이었다.

 “이제 불길이 솟는 것입니까?”

 그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래. 이제 곧 불길이 솟는다. 이 대륙을 집어삼킬 정도의 거대한 불길이. 그 선율이 기록된 마법석이 바로 그 불씨다.”

 남자의 말은 그들에게 있어 거룩한 성자의 말씀과도 같았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났고, 남자를 필두로 하여 학회 바깥으로 다시 인원들이 빠져나갔다. 주위는 다시 정적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은 쓰러진 채 일어날 줄 몰랐다. 약하게 내쉬고 있는 숨만이 그들이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남은 두 명은 전쟁터의 참상과도 같은 이 광경을 슥 하고 훑어봤다. 이들을 전부 죽이는 건 아주 쉬웠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좀 더 위에 있었다. 남자는 상임의원들이 늦든 빠르든 그들의 흔적을 추적할 것이라 했다. 그들은 반드시 발각될 터였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아직 이 학회에 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들은 쓰러진 사람들 틈에 웅크렸다. 그들은 에스트렐의 12성좌 일족 중 전갈자리의 암살자들이었다. 단 한 번 있을 때를 노리는 전갈들은 자신의 맹독을 갈무리하며 기회를 노렸다.

 시체와도 같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눈이 검디검은 독액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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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나

 그녀의 손이 에트왈 위를 춤추듯 내달렸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이슬 맺힌 이끼를 밟는 듯 청명한 느낌의 곡이 에트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숲을 연상케 하는 엷은 에메랄드빛 선율이 회랑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소나는 연주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보다 더 열을 다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어째서?
 왜?

 부드럽고 청명한 곡조와는 달리 그녀의 마음속은 온통 새까맣게 물들어있었다. 분명 열심히 연주하는데, 열과 성의를 다해 연주하고 있는데 잭스의 상처는 조금도 나을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곡은 그녀가 협곡에서 연주하던 ‘인내의 아리아’와는 그 궤가 다를 정도로 강력한 마법의 곡이었다. 그렇다면 잭스가 치유되지 않는 이유는 분명 모종의 이유가 있을 터였다. 

 실제로 잭스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그 상처들이 전부 ‘푸른 불꽃’에 의해 만들어진 상처였다. 그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이유도 외부의 공격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푸른 불꽃을 유지한 탓에 육체가 버티질 못하고 안쪽부터 터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푸른 불꽃은 모든 마법의 근본이 되는 마력 자체부터 태워버리는 힘이었다. 소나의 마법 연주라 해서 예외가 있을 리 없었다. 

 지금 그에게 더 효과적인 치료는 이런 마법의 연주보다 붕대를 감고 상처를 꿰매는 외과적인 조취였다. 하지만 그녀는 푸른 불꽃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거니와 지금 주변에 붕대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다. 있다 해도 그런 방식의 치료엔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소나였다. 아니, 애초에 소나는 지금 와서 다른 방식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침착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지쳐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소나는 잭스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봤다.

 곡이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호흡만은 종전에 비해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종전에 비해 나을 뿐이지 연주를 멈추면 상태는  또다시 악화될 것이 뻔했다. 슬픔과 자괴감이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에트왈에서 나오는 에메랄드빛이 점차 붉은빛 도는 칙칙한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에트왈이 말하지 않았던가. 연주를 통해 소나의 감정과 기억이 흘러들어온다고.
 
 숨이 막혀왔다. 연주를 하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두꺼운 무게추가 올려져있는 것처럼 한 소절을 칠 때마다 힘이 배로 빠졌다. 소나를 지탱하고 있는 유일한 힘은, 이 연주를 멈추면 잭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녀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 연주를 계속했다. 연주의 색은 이미 검고 붉게 변해,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부분은 잭스의 근처가 유일했다. 소나의 정신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일보 직전이었다.

 -계속 연주할거야? 그에겐 아무런 효과도 없을거야.
 ‘누구……?’

 속삭임. 얕은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 했다. 소나는 속삭임인지 환청인지 모를 그 소리를 들으며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기를 썼다. 달콤한 목소리였다. 꿀 같이 달콤한 독액과도 같은, 독이란 걸 알면서도 맛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향기로운……. 확실한 건 에트왈의 목소리는 아니란 점이었다.

 -그가 죽기를 원해?
 ‘아뇨……. 전 잭스 님이 살기를 원해요.’
 -그는 생명력이 부족해. 지금의 연주로는 그를 채울 수 없어. 그의 속에 있는 불꽃이 선율을 태우고 있어. 그 불꽃을 뚫기엔, 네 연주는 약해.
 ‘그럼 어떻게 하면 되죠?’

 소나는 애원하듯 물었다. 목소리는 귀부인의 그것처럼 침착하고 평온했다. 하지만 어딘가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는, 기계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불꽃이 선율을 태운다면, 불꽃이 태우지 못할 정도로 강한 선율을 연주하면 돼. 여기에는 생명이 많아. 그것들을 이용하면 그를 살릴 수 있어.

 목소리는 속삭이듯 말했다.

 -너만 원한다면, 도와줄게.

 그를 살릴 수 있다, 소나에게 의미가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솔직히 그녀는 이 목소리가 무엇인지, 이 목소리가 말하는 생명을 이용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엔 그녀의 정신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나는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는 건지, 목소리가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곡을 조금 바꿔야겠네.

 그 순간, 소나의 머릿속에 있던 악보가 스르륵 바뀌었다.

 상쾌하고 청명한 가락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에트왈은 상상조차 해본적도 없는 어둡고 음산한, 마치 불길한 밤안개와도 같은 음을 내뿜고 있었다. 방금 전의 그 아름다운 곡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곡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끔찍한 곡이었다. 마치 심연의 구렁텅이와도 같이, 주변의 생명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끔찍한 곡이었다. 그제야 소나는 주변의 ‘생명을 이용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연주를 통해 소나에게 전달되는 학회의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뜻이었다! 소나는 경악했다.

 ‘이게, 이게 대체……? 난 이런 걸 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자를 살리려면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나는 이 방법밖에 몰라.
 ‘아냐, 아니에요. 이런 건 잭스 님도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소나는 연주를 멈추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팔목 아래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손은 연주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거두려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여전히 그 끔찍하기 그지없을 정도의 평온한 어조였다.

 -난 네 바람을 들어주려 하고 있어.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여기서 멈출 순 없어.
 ‘난…이런 방식은 원하지 않았어요! 도와주세요, 아무나, 제발! 에트왈, 에트왈! 제발 도와주세요, 전 이 연주를 하고 싶지 않아요……!’

 소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에트왈을 불렀다. 이건 아니었다, 이건……. 아무리 잭스를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건 살인과 다를 바 없었다. 소나는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제발 에트왈이 자신을…….

 짝!

 소나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짝!

 [야, 이 멍청한 새끼야!]

 다시 그녀의 고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의 자의가 아니라,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에트왈의 예의 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있었다. 이전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소나의 멱살을 잡고 연거푸 따귀를 때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째 잘 하다 싶더니만, 내 이럴 줄 알았어. 멍청하게 곡에게 휘둘리기나 하고 말이야! 내가 이러라고 네게 이 곡을 가르쳐 준 줄 알아? 이딴 꼴이라 보려고 이 곡을 가르쳐 준 줄 아냐고?]

 에트왈의 불같이 화난 목소리가 소나의 머릿속에서 천둥치듯 울리고 있었다. 그는 현에서 소나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 그녀를 내동댕이쳐버렸다. 선율은 멈춰 있었다. 에트왈이 땅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왜 그래? 나는 가장 합당한 방법을 취했을 뿐이야.
 [잔말 말고 들어가 있어, 이 빌어먹을 노래야. 제기랄, 널 꺼내는 게 아니었어. 넌 아직 저 애가 감당하기엔 너무 위험해.]

 그 목소리는 소나에게만 들리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에트왈은 형체 없는 목소리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넌 내게 명령할 권리가 없어. 넌 우리들의 관리자이지, 주인이 아니야. 주인은 저 아이야.

 [저 애가 자격을 갖추기 전까진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야. 좋게 말할 때 들어가. 한 번만 더 입을 놀렸다간  그 잘난 관리자의 권한으로 네 악보를 찢어버릴테니.]

 에트왈이 거칠게 내뱉듯 말하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뒤 소나는 무언가가 곁에서 슥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에트왈(악기)의 현에 서려 있던 붉은 기운도 스르르 사라졌다. 에트왈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소나는 숨을 할딱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트왈의 따귀에 입 안이 터졌는지 찝찔한 피 맛이 느껴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에트…….’
 [고맙다고?]

 소나가 운을 떼자마자 에트왈이 확 돌아서며 으르렁거렸다. 도끼눈을 뜬 채 그녀를 노려보는 눈길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소나는 자기가 맞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에트왈이 쿵쿵거리며 다가와 손가락을 세워 그녀의 가슴팍을 마구 찔렀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기나 해?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저기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거야! 대체 너 제정신이야? ‘사계절’ 중 ‘봄’의 노래를 그토록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연주하다니! 네가 얼마나 호구 같았으면 곡이 제멋대로 변주를 하겠냐, 엉?]
 ‘…죄송해요.’

 소나가 순순히 사과하자 에트왈은 딱딱거리면서도 낮게 한숨을 쉬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지 처음부터 저자세로 나오는 판국에 더 소리쳐봤자 피곤한 건 자신 쪽일 터였다. 에트왈의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자 소나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대체 그 목소리는 뭐죠? 말할 수 있는 건 당신만이 아니었던가요?’

 소나의 물음에 에트왈은 입맛이 쓴지 쯧 하고 혀를 찼다.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내 안에 있는 몇몇 강력한 노래들, 예를 들어 ‘사계절’ 급 노래 정도 되면 노래 스스로가 자아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어. 방금 네게 말을 걸었던 그 목소리는 ‘사계절’ 중 ‘봄’이고. 그나마 다행이지. 그 녀석은 온화하고 순수하거든. 지나칠 정도로 순수해서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겨울’보단 나아. 만약에 ‘겨울’이 폭주했으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곡의 제목이나 그런 건 안 말해 주셨잖아요.’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랬지, 이 계집애야. 설마 네가 이렇게 일을 크게 벌릴 줄 알았냐? 아니 근데 이게 지금 뭘 잘했다고…….]

 다시 에트왈의 손이 올라가자 소나는 부루퉁했던 마음을 재빨리 구석으로 처박고선 잭스를 바라봤다. 어찌어찌 최악의 상황만은 에트왈의 도움으로 막긴 했지만  그 외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그의 치료는 아주 미약하게 됐을 뿐이었다.

 ‘잭스 님…….’

 소나는 무릎걸음으로 기다시피 해서 다시 잭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째서 잭스 님은 전혀 치유되지 않으시는거죠? 잭스 님, 제발…제발 죽지 마세요, 제발…….’

 그의 여전히 숨소리는 가늘고 불규칙했다. 소나의 여린 두 손이 그의 손에 포개어졌다. 잭스의 손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소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안타까움과 자괴감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트왈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소리쳤다.

 [이제 그만해!]

 하지만 소나는 잭스의 손을 가슴에 꼭 품은 채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넌 충분히 했어, 이제 그만해! 애초에 네가 ‘봄’을 제대로 연주했어도 될까 말까했어. 겨우 ‘봄’ 하나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해서 곡의 마법을 뒤집어버린 주제에 뭘 더 하겠다고? 그 녀석의 몸속에 있는 게 어디 보통 불꽃인 줄 알아?]

 소나는 불꽃이라는 단어에 에트왈을 휙 하고 바라봤다. 그랬다. 그 목소리도 분명 ‘불꽃’이라고 했다. 소나의 머릿속에 협곡에서 나가기 직전 잭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불구덩이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시커멓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이들은 그 불꽃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불꽃이라는 게 대체 뭐죠? 그 목소리도 말했어요. 잭스 님 안에 불꽃이 있다고. 분명 선율을…맞아, 선율을 태우는 불꽃이라고요.’

 에트왈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자 소나가 재차 물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지금의 제 연주로는 잭스 님의 회복시킬 수 없다고 했어요. 불꽃이 태우는 것보다 더 강한 선율이 있다면 할 수 있다고요. 에트왈, 당신은 알고 있죠? 분명 당신이 말한 그 봄이라는 곡 말고도 분명 잭스 님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을 거예요. 당신은 제 바람에 반응해서 나타난다고 하셨잖아요. 당신이 나타났다는 건, 분명 당신을 통해 잭스 님을 회복시킬 수단이 아직 남아있다는 거예요, 그렇죠?’

 […없어.]

 에트왈은 부정했지만,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리는 마당에 설득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거짓말 하지 말아요!’ 소나가 버럭 소리 질렀다. ‘여기 오기 전에도 말했잖아요,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잭스 님을 구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짓 따위 하지 않고, 제 힘으로 잭스 님을 구하고 싶단 말이에요!’
 [빌어먹을, 말로는 뭘 못해!]

 에트왈이 으르렁거리며 역정을 냈지만 이번에는 소나도 물러서지 않고 똑바로 그의 눈을 바라봤다. 잭스를 사이에 두고 소나와 에트왈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길 정도로 강렬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에트왈은 소나의 눈을 바라봤다. 강인한 의지가 그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저 아이가 언제부터 저런 눈을 가지게 된 것인가. 에트왈은 한탄했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멈춰있을 뿐인 악기에 불과한 자신과는 달리 사람이란 눈 깜빡할 새에 금방금방 성장했다. 먼저 시선을 내린 쪽은 에트왈이었다. 그의 말에는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진한 염려와 슬픔이 배어있었다.

 [소나, 나는 네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해. 나를 불러냈을 때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염려스럽기도 했어. 그건 네 방에서 곡을 가르쳐 줄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래. 후회하고 있어. 차라리 나오지 말 걸, 차라리 네게 곡을 가르쳐주지 말 걸……. 하지만 난 그렇게 행동하도록 묶여 있는 존재야. 바퀴의 윤활유는 바퀴가 잘 굴러가도록 하는 역할일 뿐이니까. 거친 길로 바퀴가 향한다고 해서 윤활유가 그걸 막을 순 없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도…그래도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자, 소나.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어. 어떻게든 내가 다시 방까지 되돌아가게 해줄게. 그러니 제발…….]

 에트왈은 화를 넘어 그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소나는 그의 말 속에서 염려와 슬픔을, 그리고 양어머니나 자매와도 같은 메이드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진한 사랑을 들을 수 있었다. 평소의 소나라면 여기서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이 진한 사랑의 소리를 듣고서 그들을 슬프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소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제 각오는 변하지 않아요, 에트왈.’ 

 에트왈은 세상 다 잃은 것처럼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소나를 바라봤다가, 이를 득득 갈며 발을 구르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다가 정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소나의 앞에 섰다. 그 모습에 소나는 무심코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의 표정은 어린 시절 심한 감기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쓴 약만은 절대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자신의 표정과 꼭 닮아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한쪽으로 휙 손짓을 하자 에트왈(악기)이 허공을 가르며 부드럽게 날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나에게 악보를 써주는 대신 현을 한 번 퉁 튕겼다. 현을 튕긴 그의 손에는 에트왈(악기)의 은빛 현이 들려있었다. 소나는 그가 현을 끊은 건 아닌지 깜짝 놀랐지만 악기의 현은 멀쩡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하긴 기이하기로 따지자면 에트왈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있는 것부터가 문제이긴 했다.

 [이거 들고 있어.]

 에트왈은 솜씨 좋게 은빛 현을 꼬더니 둥글게 말아 소나의 손에 꼭 쥐어줬다. 그리고선 소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바짝 갖다 대었다. 소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에트왈이 자신을 헤칠 일은 없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진한 사랑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에트왈이  그녀를 해칠 리 만무했다. 그러면서도 말이나 행동은 거칠다니…소나는 조그맣게 쿡쿡 웃었다. 말과 속마음이 다른 게 잭스와 판박이였다.

 […뭐야, 왜 웃는거야?]
 ‘후후, 당신이 귀엽게 느껴져서요.’
 [뭐, 귀여워? 조금 오냐오냐 해주니까 아주 기가 살아서는……. 됐고, 나 믿지?]
 ‘물론이죠. 전적으로 믿고 있어요.’
 [좋아. 넌 잠깐 자고 있어. 네가 눈을 뜰 때 즈음엔 이 빌어먹을 용병 놈을 두들겨 패서라도 깨워놓을테니까.] 
 ‘저기, 빌어먹을 용병이 아니라 잭스 님…….’

 소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트왈이 놀라울 정도로 확 빛났다. 진한 황금빛, 아침햇살의 여명과도 같은 은혜로운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그대로 빛을 느낄 수 있는 소나였지만, 종전과는 다르게 아픈 곳은 하나도 없었다. 에트왈의 배려 덕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마치 부드러운 비단 이불에 푹 파묻히듯 소나의 전신에 온기가 감돌았다. 그녀의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에트왈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황금빛은 사라지지 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녀의 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확 뜨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진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에트왈의 눈동자와 꼭 같은 빛이었다. 아니, 지금은 에트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에트왈이고, 동시에 소나였다. 단지 지금은 소나 쪽이 잠시 잠들어있을 뿐이었다.
 에트왈은 손을 움직여 좀 전에 그녀에게 쥐어줬던 꼰 은빛 현을 꿀꺽하고 삼켰다. 잠시 목을 톡톡 두드리며 뭔가를 조절하던 그녀는, 이윽고 부드럽게 숨을 들이켰다.

 “유사 성대 기능, 이상 없음.”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소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나가, 그 소나가 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악기의 울림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에트왈로 손을 뻗자 에트왈이 어린 새처럼 그녀의 위로 둥 떠올랐다. 에트왈도, 그녀도 아스라한 황금빛에 물들어 있었다. 

 “에트왈, 아스트라시온 시스템(Astrasion system) 가동.”

 소나의 입에서 울림이 퍼지는 순간, 에트왈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음매라곤 전혀 없었던 몸체에서 이음매가 생기더니 마치 작은 나무 조각처럼 팡 하고 작게 터졌다. 수많은 조각들로 나뉜 에트왈은 하늘을 떠다니는 별들처럼 빙글빙글 돌며 다시금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통 하고 울리는 나뭇결 어우러짐이 작은 타악기들의 축제와도 같았다. 은빛 현이 수천 갈래로 나눠지며 표면을 안으로 빨려 들어감으로서 마침내 에트왈의 변형은 끝났다. 소나의 머리 위엔 작은 태양처럼 둥글고 고풍스런 장식이 새겨진 구형의 물체가 둥둥 떠 있었다. 표면에는 별과 달을 형상화한 듯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문양 사이로 보이는 안쪽에선 종전의 현의 뭉치로 짐작되는 은빛 달이 천천히 돌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아브릴(avril, 봄). 네 도움이 필요하니까.”

 소나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에트왈 속에서 에메랄드빛이 확 하고 퍼지더니, 예의 그 귀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락한 동굴 속에서 퍼져 나오는 것처럼, 목소리는 깊고 부드러웠다.

 -방금 전에 쫒아놓고선 무슨 일이야? 우리 귀여운 주인의 몸까지 빌려서, 게다가 아스트라시온까지 펼쳐서 말이야.
 “이 용병을 다시 치유할거야. 이 아이의 목소리와 네 선율을 이용해서. 현으로 만든 유사 성대이긴 하지만, 한 곡 정도라면 버틸 수 있어. 그러니 도와줘, 아브릴. 이 아이가 제 바람을 이룰 수 있도록.”
 -나는 이 아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힘을 빌려줄거야. 내 사랑스러운 주인이니까. 이 아이가 첫 목소리로 부를 곡이 나로 정해진 건 무척 기쁘지만…한편으로는 조금 아쉽네. 기왕이면 진짜 목소리로 불리고 싶었는데.
 “꿈도 꾸지 마.” 소나가 표정을 조금 찡그렸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기필코 그것만큼은 막을 거야.”
 -널 싫어할 수도 있는데?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아브릴이라 불린 목소리가 쿡쿡 웃으며 놀렸지만 황금빛으로 빛나는 소나의 표정은 진지했다.

 “시작하자, 아브릴. 첫 소절은 네가 시작해. 좀 전처럼 괴상하게 변주했다간 네 악보 다 찢어버릴거야.”
 -어머, 날 뭘로 보고 그러는거야?

 아름다운 구형의 에트왈 속에서 에메랄드빛이 짙어졌다. 휘파람새 지저귀는 소리가 흘러나오는가싶더니 어느새 부드러운 아리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에 맞춰 소나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따스한 바람 같고, 푸르른 숲과도 같고, 푸른 하늘의 은혜로운 햇살과도 같은 하모니가 울려 퍼졌다. 소나의 목소리가 마치 산들바람처럼 한 소절 한 소절에 부드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라라라라…….

 종전에 소나와 연주한 곡과 분명 같은 곡일진대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 완성도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소나의 연주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독주라면 이것은 경쾌한 합창이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얼음도 사르르 녹일 것만 같은 따스함, 그 속을 휘감아 도는 경쾌함, 이것이야말로 봄 그 자체를 노래한 곡이었다. 

 노래는 계속되었다. 은혜로운 황금빛과 에메랄드빛의 선율이 잭스를 비단 이불처럼 덮어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엷은 장막의 표면 군데군데가 불타듯 구멍이 났지만 구멍이 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장막이 덮이고 있었다. 빛이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모니는 곡의 종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소나는 눈을 떴다. 한잠 푹 자고난 것처럼 개운했다.

 […이 잠꾸러기야, 이제 깼냐? 까닥하면 인사도 못 듣고 사라질 뻔 했네.]
 ‘에트왈? 아아…….’

 소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잭스가 누워있었고 그 옆에 에트왈이 지친 표정으로 서있었다.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이었다. 에트왈(악기)는 원래의 형태로 돌아온 채 잭스 옆에 얌전히 뉘어 있었다. 악기 에트왈이나 사람 에트왈이나 고생을 바가지로 한 하루였다. 하지만 소나가 발딱 일어나 미소를 짓자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조금 위안이 되는 에트왈이었다. 그녀는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날 듯이 다가왔고, 그리고…….

 ‘잭스 님! 잭스 님은 어떻게 됐나요? 괜찮나요? 아아, 잭스 님……. 몸속의 소리가 안정되어 있어요. 심장 소리도 괜찮고, 숨소리도…아아, 다행이에요. 정말로 다행이에요, 잭스 님…….’

 그리고 마치 슬라이딩하듯 바닥에 찰싹 엎드려 잭스의 몸 이곳저곳에 귀를 대며 사랑스럽게 얼굴을 붉혔다. 그 광경을 보는 에트왈의 얼굴도 붉어지기 시작했다.

 [……………………………….]

 조금 다른 의미로 말이다.

 [야, 지금 이 용병 살린 건 난데 말이야. 내게 고맙다고 먼저 말하는 게 예의 아닐까? 아니, 딱히 네게 감사 인사를 받는 거에 그리 연연하는 건 아닌데 이거 모양새가 좀 그렇잖아.]
 ‘고마워요, 에트왈! 정말로…….’
 […….]

 에트왈은 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그냥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눈을 보며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듣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 계집애는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용병 떨거지 하나에 매달려서 징징거리기나 하고! 잭스를 바라보는 에트왈의 눈에 얼마나 날이 서있던지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두셋은 죽어나갔을 법할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이 고생을 한 게 죄다 이 용병 놈팡이 때문 아니던가. 얼마나 화가 났던지 에트왈은 그 귀여운 외모에 걸맞지 않게 마디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선 잭스의 명치 부근을 향해 분노의 일격을 날렸다.

 퍼억!

 “커흑?!”
 ‘에, 에트왈? 지금 뭐하는 거예요?’

 잭스가 흡사 전기 오른 개구리마냥 꿈틀거리자 소나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에트왈을 쳐다봤다. 그 모습에 배알이 더 뒤틀리는 에트왈이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활화산이 열댓 개는 터지고 있는 속마음과는 달리 따뜻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뭐하긴, 명치를 가격하면 정신을 더 빨리 차릴 수 있다고.]
 ‘네? 진짜요? 그럴 수가……. 그게 정말이에요?’
 소나는 슬쩍 의심의 빛을 내비쳤지만, 그런 건 에트왈 앞에선 씨알도 안 먹힐 저항이었다.
 [뭐, 정말? 너 지금 정말이라고 했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 나 믿는다고 하지 않았어?] 
 ‘하, 하지만…….’
 [아, 이래서 부모들이 자식 키워봤자 다 헛일이라고 하는구나. 눈에 콩깍지나 쓰여서 말이야, 응? 아주 그 놈팡이 빼고 눈에 뵈는 게 없지? 이건 저…그래, 저기 프렐요드 지방에 내려오는 민간요법이라고!]
 ‘알겠어요…….’ 
 [너 또 의심하고 있지, 이 의심병 환자야?]
 ‘아뇨, 그럴 리가요! 물론 당신을 믿어요, 에트왈. 믿고말고요.’

 에트왈이 확인사살을 하자 긴가민가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소나였다. 에트왈의 입가에 히죽 미소가 걸렸다. 이것은 정당한 복수였다. 이 놈팡이 놈에게 내리는 정당한 복수. 그는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미소를 띠며 친철하게(?) 소나의 손을 잭스의 명치 쪽에 올려주기까지 했다.

 [힘껏 내려치라고, 소나. 힘껏 안치면 영영 잠들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서서히 올라가는 소나의 손을 보는 에트왈의 얼굴엔 흡사 악마와도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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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아브릴(Avril, 봄): 에트왈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노래 중 하나. '사계절'의 노래 중 하나며 치유와 소생의 효과가 있는 곡이다. 아주 강력한 마법의 곡으로 스스로 자아를 가질 정도. 성격은 온화하고 순수하지만, 너무 순수한 나머지 선악의 구별이나 도덕성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

아스트라시온 시스템(Astrasion system): 에트왈 제 2형태. 형태는 안이 빈 구의 형태로, 안쪽에 에트왈의 현들이 뭉친 은빛 구가 들어있다. 에트왈이 연주자의 감정을 노래하는 악기라면, 아스트라시온 형태는 서라운드 오디오에 더 가깝다. 그 외 상세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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