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전장의 안개 에필로그(1)

#. 잭스, 소나, 베사리아

 과연 맨드레이크는 약속을 지켰다.

 진두지휘부터 시작해 망가진 마법진과 설비의 수복, 부상자의 이송에 얽히고설킨 국가 외교 문제까지, 정말 모든 일을 도외시한 채로 마법 연구에 미쳐 지내던 그 맨드레이크가 맞나싶을 정도의 저력을 보여주며 일처리를 진행했다. 

 의외로 종합적인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시설 쪽에서도 학회의 가장 핵심적인 시설이라 할 수 있는 학회 기록 보관소나 협곡 아이템 원본 보관소* 등은 상임의원 한 명의 권한으론 어찌할 수 없는 몇 겹의 보안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무사했고, 피해를 입은 건 학회 바깥쪽의 각 도시 국가와 연결되어 있는 마법진 정도였다. 그마저도 맨드레이크의 손길 아래 순식간에 고쳐졌다. 입으로 ‘더 효율적인 진이 얼마든지 있는데’라거나 ‘팔자가 사나워서 말년에 이딴 잡일이나 해야 하다니’라고 하는 등 쉴 새 없이 구시렁구시렁 거리면서 마법진들을 척척 고쳐나가는 그의 모습에선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어찌나 그 모습이 인상 깊었던지 당시 그의 모습은 주변에 있던 하급 소환사들 사이에서 ‘마치 고장 난 마법 공학 제품에 발길질 하는 것처럼 거칠면서도 놀랍도록 정교한’ 작업이라 칭송 받으며 꽤 오랫동안 회자될 정도였다.

 소나의 연주로 인한 집단 후유증도 다행히 죽은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학회에 남아있던 견습 소환사나 사무 쪽 직원들이였기에 인명 피해로 인한 업무 차질 문제도 심각할 정도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죽어나는 쪽은 뒤틀린 숲이나 캘러멘다, 칼바람 나락에 대거 투입되었다가 귀환한 중상급 소환사들이었다. 몇 주간 오지에서 바쁘게 일하고 귀환했더니, 맞이하는 것은 따끈한 욕조와 풍성한 식사가 아니라 엉망이 된 학회와 그보다 더 엉망이 된 소환사의 협곡이었으니 말이다. 힘든 작업을 마치고 귀환하는 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잔뜩 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맨드레이크의 활약으로 인해 전쟁학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모든 것이 정상 궤도에 돌입했고 학회 내외부로 그의(겸사겸사 같은 상임의원인 베사리아도) 주가는 엄청나게 치솟았다. 전쟁학회의 위기를 재빨리 수복한 영웅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헤이완 렐리바쉬 전쟁학회장과 원로 소환사들은 이번 사건 처음부터 끝까지 상임의원 둘이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닐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학회 내부 언론의 몰매란 몰매는 모조리 맞아야 했다. 

 일이 그런 식으로 풀린 건 다 맨드레이크의 발 빠른 조치(?) 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오자마자 소나에게 뺨 맞아 기절하는 잭스를 뒤로 하고 렐리바쉬와 원로 소환사들의 반나절 분량의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맨드레이크가 조종당해 회랑에서 그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감행했던 기억도 깔끔히 사라져버렸고, 맨드레이크는 천연덕스레 그들의 기억 상실을 학회를 습격했던 정체불명의 무리들의 탓으로 돌리며 의심의 눈길을 유유히 피해갔다. 다만 이 사건을 일으킨 원흉으로서 양심의 가책은 있었는지 어느 정도 그들의 편을 들어 언론의 비난을 무마시켜줄…리가 없었다. 예로부터 맨드레이크는 그 더럽게 꼬인 성격 탓에 렐리바쉬 전쟁학회장이나 원로 소환사들과 무진장 사이가 안 좋았다. 오히려 ‘자신을 지배하던 놈들이 왜 원로 소환사 놈들과 렐리바쉬 놈을 불구덩이에 처넣으란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한탄할 정도니 말 다한 셈이었다.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챔피언들과 관련된 각 도시국가들과의 외교 문제 따위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일단 전쟁학회가 괴멸된다는 최악의 위기만은 넘긴 셈이었다. 챔피언들의 피해가 가장 큰 데마시아와 녹서스는 이번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 학회에 가장 큰 불만을 표출했지만, 그들 수뇌부 역시 전쟁학회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학회의 치부가 될 만한 정보를 외부로 유출시키는 멍청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쟁학회에 새겨진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

 사건으로부터 몇 주 후.

 “안될까요?”
 의문.
 “안되네.”
 단정.
 “안되네요…….”
 탄식.

 데마시아 왕립 병원, 한 병실에선 약간 강한 햇살이 병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싱그러운 미풍이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병실 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 듯 불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좀 해보시오, 베사리아.”
 “안 돼요, 전혀 안 돼. 외부에서의 간섭부터가 먹혀들지 않는다고요. 술식 해제고 뭐고 연결부터 안 되는데 뭘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싱그러운 날씨와는 달리 병실 안의 분위기는 썩 밝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쪽은 일이 안 풀려서 곤란해 하고 있고 한 쪽은 짜증내고 있고 나머지 한 쪽은 기쁜지 아닌지 모를 아주 기묘한 분위기였다. 한 공간 안에 이렇게 상반된 분위기가 모여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긴 했다. 

 꽤 넓고 고급스런 병실이었다. 안에 있는 인물들이라곤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 하나와 휠체어에 앉아 있는 금발 벽안의 여자 하나, 그리고 침대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청명한 하늘빛 머리칼의 아가씨가 전부였다. 바로 얼마 전 일어났던 ‘소환사의 협곡 및 전쟁학회 테러 미수 사건(가칭)’에서 곤욕이란 곤욕은 있는 대로 치룬 상임의원 베사리아 콜민예와 챔피언 잭스, 그리고 소나 부벨르였다. 

 환자복 차림의 잭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베사리아와 소나는 배경과 어우러져 문자 그대로 그림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약간 파리한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베사리아나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얌전히 앉아 있는 소나는 상당한 미인들이었다. 특히 소나는 별다른 치장 없이 단아한 외출용 드레스 차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평상복이라는 점이 리그에서의 모습과 차이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매력으로 승화되고 있었다. 그런 미녀 둘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곳이 병상이든 어디든 남자라면 입에서 벙긋벙긋 미소가 떠나지 않아야 정상이겠으나, 잭스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모종의 이유로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은 난감함과 약간의 짜증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이제 두 말하면 입 아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연하게 베사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당신이 내 소환을 맡았으니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것 아니오? 챔피언 간의 소환 마법이 얽혀 서로의 정신이 이어진다니, 내 리그 설립 때부터 죽 챔피언으로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오. 하필 그 대상이 나라는 것도 어이가 없고. 아, 미안하오 미스 부벨르. 악의는 없었소. 당신의 목소리가 듣기 싫다는 건 아니오.”
 -아뇨,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잭스 님. 

 잭스가 소나를 향해 사과를 하자 소나가 빙그레 웃으며 약간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잭스의 머릿속에서는 그녀의 목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보통 사람, 그러니까 옆에 있는 베사리아가 보기엔 그냥 도리질 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실정이었다. 베사리아는 돋보기 같은 마법 도구를 테이블에 던지고선 푹 한숨을 쉬었다.

 “아니, 물론 나도 미안하긴 해요. 그런데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되었길래 이 정도로 꼬인 건지…….”
 “그렇게 복잡한 거요?”
 “복잡하죠. 그러니까…….” 베사리아가 휙 소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잭스 당신은 소나 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그녀가 혼자 생각하는 건 들을 수 없다고 했고요. 그럼 대체 생각과 말이 무슨 차이죠?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게다가 둘의 증상은 또 달라요. 소나 양은 당신의 마음 속 소리나 생각 같은 건 들을 수 없다고 했으니까요. 차라리 서로 증상이라도 같았다면 그나마 나았을 거예요. 게다가 이건 정신과 연결된 주문이라 엄청나게 조심해야 하고요. 휴, 말로 하자면 끝도 없어요.”

 베사리아는 전문 마법 용어 따위를 써서 설명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지만, 낌새를 눈치 챈 잭스가 재빨리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걸 막았다.

 “그럼 언제쯤 고칠 수 있다는 거요?”
 “어…밀린 학회 일도 처리해야 하고, 제 공방(works)도 점검해야 하고, 과거 비슷한 일이 없었나 사례도 찾아보고 조사도 해봐야 하니까…….” 베사리아가 손가락을 꼽으며 뭔가를 중얼중얼 거렸다. “한 반년 정도?”
 “반년?” 잭스의 입에서 아주 어이없다는 투의 불평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반년이나 걸릴 수 있소? 당신 상임의원 아니었소?”
 “상임의원‘이니까’ 반년 정도로 끝나는 거라고요, 잭스! 소환 마법이 무슨 어린애 장난인 줄 알아요?” 
 “당신 말대로 어린애 장난이 아니니까 이러는 거 아니오. 방금 당신이 했던 말, 전에 맨드레이크가 찾아왔을 때도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소? 서로의 정신이 연결되는 건 대단히 위험한 거라고. 자칫하다간 둘의 정신이 섞여버리거나 백치가 될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소!”
 “윽, 하지만 아직 불안 증세는 보이지 않으니까 괜찮…을지도…….”
 “그게 언제 터질지 어떻게 안다는 거요!”

 잭스가 으르렁거리자 살짝 반항을 하던 베사리아가 고개를 서서히 수그리고야 말았다. 사실 잭스의 말에 틀린 거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잭스는 이번 사건 해결의 가장 큰 공로자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학회가 있는 이 자리엔 커다란 구덩이만 덩그러니 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보상 따윈 없었다. 아니, 오히려……. 베사리아는 기분이 울적해지는 걸 느꼈다. 사실 데마시아가 잭스에게 선뜻 왕립 병원의 고급 병실을 내준 것도 말이 챔피언들을 구해 준 사례지 실제로는 협곡에 있던 챔피언들 중 가장 신원이 불분명한 그를 감시하겠다는 의도가 뻔했다. 잭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지만 그녀도 눈치 챈 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평소의 습관이라 할까 말싸움을 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잭스에게 너무 미안한 베사리아였다. 하지만 그녀의 힘으로 해줄 수 있는 게 별달리 없었다. 심지어 소나와의 정신이 얽힌 이 마법 사고에 대해서도 말이다. 베사리아가 평소와는 달리 정말로 풀이 죽자 그제야 아차 하는 잭스였다. 너무 몰아세웠다고 느낀 그였지만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디리리링

 그때였다. 맑고 투명한 현의 소리가 성난 폭풍 뒤의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나가 뒤에 놔뒀던 에트왈을 들고 연주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듣고 있노라면 괴로운 감정도 잊을 만큼 말이다. 짧은 연주가 끝나자 소나는 베사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콜민예 의원님. 잭스 님도 악의가 있으셔서 그런 건 결코 아닐 거예요. 설령 잭스 님게서 말씀하신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나도…전 괜찮아요. 절대 의원님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전 지금 저와 잭스 님 사이에 일어난 이 마법 사고에 정말 감사하고 있으니까요. 비록 정말 말하는 게 아니라 해도, 이렇게 누군가가 제 목소리를 들어준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요. 그러니까 두 분이 너무 감정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

 소나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정말로 감사하고 있었다. 이 인연에,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준 분에게, 이 기적과도 같은 일상 전부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소나는 자신의 진심이 베사리아에게 전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깜빡 잊고 있었다.

 “어…소나 양, 죄송한데 지금 뭔가 말하신 건가요? 저기, 잭스?”
 “후우.”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잭스에게만 들린다는 것 말이다. 

 -아…….

 잭스의 한숨 소리와 함께 소나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잭스와 함께 있으면 자꾸 자기가 말할 줄 아는 것처럼 착각해버리는 소나였다. 그런 소나를 대신에 잭스는 그녀의 말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했다.  

 “미스 부벨르는 고맙다고 하고 있소.”
 “뭔가 아주 엄청 생략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기분 탓이겠지.”
 -아하하…….

 잭스의 시큰둥한 태도에 소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예의바르게 입을 가리고 가볍게 미소 짓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잭스의 머릿속에 산들바람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러자 소나가 웃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베사리아가 잭스를 향해 부럽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소나 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어떻게 보면 참 부럽네요. 운 좋은 줄 알아요, 잭스. 당신은 대륙 최초로 소나 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거라고요.”
 “무슨 소리요? 소환사는 연결된 챔피언과 정신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것 아니었소? 내 기억으론 미스 부벨르는 이번 리그 말고도 예전에도 몇 번 정도는 리그에 출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잭스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나와 정신이 연결된 자가 그가 처음은 아닐 터였다. 그는 단지 소환마법이 모종의 이유로 꼬여 소나와 정신이 연결된 것에 불과할 뿐,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던 소환사는 그 말고도 몇 명 정도는 있을 터였다. 아무리 출전이 드물었다 하나 소나의 소환은 이전에도 몇 번 정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난감한 듯 머리를 살짝 긁적이는 베사리아와 어색하게 미소 짓는 소나의 모습은 그의 의문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가중시킬 뿐이었다.  

 “아, 하긴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겠죠. 당신은 챔피언이지 소환사는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죠. 아니다, 아니에요. 그냥 직접 보여드리는 게 낫겠네요. 그게 당신 취향이잖아요. 괜찮죠, 소나 양?”

 소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미안함이 깃들어있는 것만 같은 미소였다.

 -죄송해요 잭스 님. 숨기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숨기다니, 뭘 말이요?”
 -그러니까…….

 라라라라…….

 “됐네요. 들려요, 잭스? 이게 다른 소환사들이 듣는 소나 양의 목소리예요. 어머, 미안해요 소나 양. 말하는 도중이었나요?”

 본의 아니게 소나가 말하던 도중 불쑥 끼어 든 모양새가 된 베사리아가 미안한 듯 소나에게 사과했다. 소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산들바람 같은 목소리가 잭스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괜찮아요.

 라라라라…….

 하지만 이번엔 그녀의 목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베사리아가 잭스의 얼굴 쪽으로 불쑥 내민 조그마한 수정 구슬에선 잭스의 머릿속에 소나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에 맞춰 어떤 악기의 울림 같은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잭스는 조금 당황한 듯 베사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소환사들에겐 이렇게 들린단 말이오? 당신에게도? 이거 아주 의외로군.”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당신과 소나 양 사이의 소환마법이 아주 복잡하게 꼬인 것 같다고. 소환사들 사이에만 알려진 챔피언 음성 정보 같은 것들도 전부 마법으로 만든 가짜 목소리에요. 원래 챔피언 대사 관련 정보도 3급 기밀이라 외부로 유출하면 안 되는 것이긴 한데…뭐, 상관없겠죠. 당신이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성격도 아니고. 아참, 하지만 대사 자체는 소나 양이 원하는 걸로 했어요. 그건 필담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거니까요.”
 -아, 저기…그건 그러니까, 챔피언으로서의 포부 같은 걸 밝히는 각오 같은 걸 써달라고 말씀하셔서…….

 라라라라라…….

 챔피언 선택 대사 얘기가 나오자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지는 소나였다. 머릿속에선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눈앞의 수정구슬에선 악기의 울림소리 같은 게 들리니 챔피언 선택 대사가 부끄럽다는 소나에게 공감하는 것과 별개로 기분이 묘해지는 잭스였다. 그런 소나를 향해 베사리아가 놀리듯 빙글거렸다. 

 “어머,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요 소나 양. 소나 양다운, 잘 어울리는 대사라고 생각하는 걸요?”
 “놀리지 마시오, 베사리아. 하여간 그 짓궂은 성격하고는…….”
 -아니에요. 의원님께서 편하게 대해주시는 편이 저도 좋은 걸요. 정말 좋은 분이세요. 정숙하시고, 쾌활하시고, 그리고 책임감도 강하셔서 이렇게 잭스 님과 제 문제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기까지 하시잖아요.

 라라라라…….

 “…….”
 “어머 소나 양, 방금 나 칭찬해준 거 맞죠? 맞나요? 호호, 기뻐라.”

 정숙하고 쾌활하고 책임감도 강하다, 라. 하나부터 셋까지 차근차근 지적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좀 전에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든 죄도 있고 해서 입을 다무는 잭스였다. 그는 소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 좋게 얼굴에 철판 깔고 웃는 베사리아를 보며 훗날을 기약했다. 왜냐하면…….

 “몇 주씩이나 병가를 내길래 슬쩍 걱정했더니 기우였군, 콜민예 의원. 아주 건강해보여. 당장에 타곤 산을 맨손으로 등반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말이야.”

 왜냐하면 그를 대신해서 베사리아에게 심판을 내려 줄 저승사자가 도착했으니까. 

 등 뒤에서 조용조용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에 베사리아는 웃는 채로 흡사 가고일 석상마냥 굳어버렸다. 잭스는 구경거리라도 찾은 듯 본격적으로 침대에 등을 기댔다. 소나만이 어머나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손을 가져갈 뿐이었다. 
 베사리아의 뒤에는 상임의원용 보라색 로브를 입은 초로의 노인, 키얼스타 맨드레이크가 입가를 씰룩이며 서있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베사리아의 동작이 어찌나 부자연스럽던지 잭스는 끼기긱하는 소리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매,매매매맨드레이크. 어어어, 어떻게? 어떻게? 분명 경보 안 울렸는데? 세 개나 설치해놨는데? 나름 회심의 역작이었다고요!”
 “아, 과연 쓸데없는 곳에서 잔머리 굴리는 데에 비상한 재주가 있는 콜민예 의원답게 아주 교묘히 숨겨진 경보였소. 모종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번에도 들켰겠지. 그럼 내가 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즈음엔 당신은 또 다 죽어가는 환자 연기를 여우주연상 감으로 하고 있었을테고 말이야.”
 “모종의? 모종의 도움? 누가? 누…….” 베사리아가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잭스를 돌아봤다. “설마…….”
 “그만하면 충분히 쉬지 않았소, 베사리아.” 잭스가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맨드레이크에겐 저번 주에 왔을 때 귀띔해줬소. 당신이 꾀를 부려 더 쉬고 있으니까 알아서 현장을 검거해보라고 말이오.”
 “어, 어떻게요? 저번 주라면 분명 맨드레이크가 와서 하루 종일 와인에 대해서 떠들고 간 바로 그때 말하는 거잖아요! 저 그때 모든 대화 똑똑히 들었어요, 분명히 마법 얘기는 눈곱만큼도 안 나왔었단 말이에요!”
 “뭐, 설마 당신 앞에서 대놓고 말하겠소. 바보도 아니고.” 잭스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냥 그런 암호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시오.”
 “이런이런, 등을 맡긴 아군에게 칼침을 맞은 격이로군. 그러니 평소에 잘해주지 그랬소, 콜민예 의원.”

 잭스가 말하고 맨드레이크가 이죽거리자 베사리아는 완전히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소나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얌전히 꼬리를 내리면 베사리아가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맘만 먹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수발을 받을 수 있는 이곳 병실 생활에 거의 중독되어 있었으니까. 휠체어에 앉은 채로 어린애 떼쓰듯 팔걸이만 탕탕 내려치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나잇값 못하는 어른 그 자체였다. 

 “재애애애액스으으으으으! 너무해! 너무해요!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같이 전쟁학회에서 죽을 고생 살 고생 다 한 사이면서 이렇게 배신을 때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어디이이!” 
 “그야 이러다간 맨드레이크가 과로사할 것 같으니 그렇지. 쉬는 것도 적당히 쉬어야하지 않겠소, 베사리아.”
 “저 아직 중환자란 말이에요! 잊었어요? 여기 맨드레이크가 조작해놓은 골렘한테 당해서 배에 바람구멍 났단 말이에요! 저 정말 중환자에요, 믿어줘요 맨드레이크! 저 정말로 아파요!”

 그렇게 울부짖으며 맨드레이크에게 매달리는 베사리아는 어느새 휠체어에서도 발딱 일어서 있었다. 

 그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예상 못했던 상황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는 맨드레이크의 말대로 맨손으로 타곤 산 등반도 해낼 만큼 건강해보였다. 그것도 매우.

 -어머…….
 “…….”
 “허어.”
 “어머나?”

  베사리아 본인도 당황한 모양인지 그녀는 일어선 그 모양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의 표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망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얄밉게도 얼마나 잘 먹고 지냈는지 그녀의 얼굴에선 윤기까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눈 밑으로 짙은 음영을 드리운 채 바짝 마른 그루터기 꼴을 한 멘드레이크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휠체어까지 꾀병이었단 것은 잭스도 예상 못한 사실이었는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하물며 소나는 어떻겠는가.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귀부인 같던 베사리아의 태도와, 지금의 이 비굴하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한 베사리아의 태도에서 보이는 엄청난 차이에 거의 패닉 상태였다. 그녀 마음 속 어딘가에 있었던 베사리아 콜민예라는 상임의원에 대한 환상이 프라이팬 위에 올려둔 버터마냥 우수수 녹아내리고 있었다. 영겁과도 같은 짧은 침묵 끝에 가장 먼저 입을 연 자는 맨드레이크였다.

 “과연 내 예상을 아주 의외의 방향으로 뛰어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콜민예 의원답군. 어쩐지 이상하다 했네. 분명 자네에게 쓴 내 특제 엘릭서가 두 병이 넘는데 올 때마다 골골거리는 것이 영 수상쩍었거든.”
 “잠깐, 엘릭서요? 지금 당신의 ‘그’ 특제 엘릭서 말하는 거예요?! 분명 오우거 피인가 뭔가로 만든……. 그걸, 그걸 나한테 썼다고요?”
 “이번엔 오우거가 아니라 트롤 피일세. 트롤 피로는 아직 실험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내가 지금 재료 물어본 건줄 알아요?!”

 베사리아는 지금 자신의 처지도 잊고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이미 들킨 거 배 째라는 건지, 아니면 질색하는 맨드레이크의 특제 엘릭서를 먹어서 상황파악이 안 되는 건지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건 그녀가 완전히 정상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분명해보였다.  

 “그 건으로 약간의 양심의 가책 정도는 있었네만 지금 당신 모습을 보고 싹 사라졌네. 아니, 오히려 괘씸하기까지 하구먼. 어떻게 자네보다 나이가 갑절은 많은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꾀병이나 부릴 생각을 하는 건가? 노인 공경이란 말도 모르나?”
 “휠체어까지 꾀병이었다니 좀 심했소, 베사리아. 맨드레이크가 불쌍하지도 않소?”
 “자네도 조용히 하게, 잭스. 학회에서 자네에게 묶인 자리가 지금도 욱신거리니까.”
 “…….”

 괜히 한마디 끼어들었다가 맨드레이크에게 면박만 맞은 잭스였다.  

 “당장 떠날 준비나 하게, 콜민예 의원. 2분 주도록 하지.”
 “흥, 싫어요! 난 뭐 할 말 없는 줄 알아요? 평소에 내가 그렇게 도와달라고 해도 의원직 업무에 코빼기도 안  비친 주제에! 당신은 날 비난할 자격 없어요!”
 “아주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놀고먹는 줄 아는 모양이군. 내 의원직 업무에 소홀했던 건 사실이네만 그렇다고 자네처럼 이렇게 자빠져 놀지는 않았네. 학회 전반의 마법 연구는 양피지에 저절로 슥슥 써지는 건 줄 아는가? 학회의 근간을 이루는 대부분의 마법은 전부 내 주도 하에 이뤄진 것들일세.”
 “그래도 안 가요! 5년 동안 한 번도 못 쉬었으니까 1년당 한 주씩 해서 5주 다 채우고 갈 거예요!”
 “할 수 없군. 정말 내 이렇게 까지는 안하려고 했네만.”
 “어머 실력행사라도 하시게요? 좋아요! 나는 무슨 상임의원직 딱지치기로 딴 줄…어머나? 어머나?”

 격렬한 언쟁 끝에 맨드레이크가 마법이라도 쓰려나보다 해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려는 베사리아였다. 하지만 마력은커녕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자 당황하는 그녀였다. 아니, 그것보다 더해서 베사리아는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혹시 몰라서 들어오자마자 자네 등 뒤에 구속의 룬을 그려뒀네만, 결국 쓰게 만드는군. 자넨 참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야, 콜민예 의원.” 

 맨드레이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선 베사리아의 후드를 잡고 곡식 포대 끌고 가는 것 마냥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베사리아는 최후의 발악을 하듯 마구 저항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를 엮은 마법의 룬은 더욱 효과가 강해질 뿐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던지 흡사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죽기 싫어 발악하는 가축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꺄! 사람 살려요! 잭스! 소나 양! 살려줘요!”
 “몸조리 잘 하게, 잭스. 이상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부벨르 양도 안녕히 계시게나. 그대에겐 언젠가 꼭 사례하리다.”
 “잭스! 재애액스! 두고봐요, 두고…….”

 쾅!

 문 밖으로 잭스가 자기에게 이럴 줄 몰랐다느니, 소나 양은 말려줄 줄 알았다느니 하며 징징거리는 베사리아의 소리가 언뜻언뜻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 소란에도 사람들이 없는 걸로 보아 맨드레이크가 미리 사람 쫓는 룬(Lune)을 새겨둔 것이 틀림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사리아의 소리가 사라진다고 여길 쯤, 병실 밖에서 다시 왔다갔다하는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맨드레이크가 베사리아를 데리고 포탈이나 뭐 그런 걸로 떠난 모양이었다. 한바탕 소란을 겪은 소나는 일련의 상황에 따라갈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잭스 님…….
 “왜 그러시오?”
 -세상엔…….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내 대신 사과하리다.”

 잭스는 한숨을 푹 쉬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폭풍이 지나간 병실은 고요했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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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협곡 아이템 원본 보관소: 소환사의 협곡에서 경기 때 사용되는 아이템들의 원본이 보관된 곳. 정확히는 그 중에서도 '악용의 여지가 있을 정도로 강력한' 원본만을 보관해두는 곳이다. 이 중에선 협곡에 구현되지 않은 물건도, 협곡에서 더 이상 사용되어지고 있지 않은 물건도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삭제된 죽음불꽃 손아귀가 그 예이다.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유물들이 잔뜩 있는 곳이기에 전쟁학회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 

장소 자체도 특 1급 기밀이며, 소재파악도 불명. 

일설에 따르면 이 보관소에 있는 유물 중 하나인 죽음불꽃 손아귀 원본은 단순히 상대방이 입는 피해량을 증가시키는 협곡의 열화 카피 따위와는 달리, 상대방의 마력을 연료로 몸을 불태워버리는 저주를 거는 무시무시한 저주의 유물이라 한다. 그 외에도 이 보관소와 관련된 수많은 소문들이 있지만 대부분 도시전설에 가깝다.

-2급 소환사 메리 골드클로버의 <우리가 모르는 전쟁학회>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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