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우, 일단 녹서스를 벗어나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하지?"
 주민들의 추격과 르블랑의 자비로 살아남은 엘리스는 이 나라의 영토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있었다.

"일단 3년동안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주변의 위치를 알아보자."
 그녀는 눈을 감은 뒤 보이지않는 무언가를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엘리스의 기억에 의하면 세계의 지도는 단 1번밖에 보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자신의 종교활동의 본거지를 삼기위한 계획의 첫단계에 지나지않았다.

"내가 녹서스에 도착한 날짜가 7월 6일. 해안가에 머물러있었으니 사실상 영토의 끝부분이라 여겨도 무방하군. 문제는 내가 부상을 입고 얼마나 누워있었는지를 모른다는거야. 르블랑이 있었던 방에 달력은 없었고, 나는 챔피언 자격도 박탈당해서 '디바이스'도 없고... 알수가 없단 말이지."

 등 한가운데에 창이 꽂혔고 팔다리에 화살들이 박혔으며 무릎을 자유로이 쓸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다. 그녀의 등뒤에 달라붙은 말라붙은 거미다리에도 상처가 남았을테고, 옷도 베어지고 피에 더렵혀지고 구멍이났을법한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의 몸을 포함해서 옷까지 말끔한 상태였다. 르블랑이 치료에 도움을 준것은 틀림없으나 어떻게 치료했는지, 그 치료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없다. 엘리스는 자기 머리 앞에 놓여진 길만을 따라서 걷다가 자세히 생각해보기위해 옆에 있는 조그만 돌을 찾아서 의자인양 그 위에 앉았다.

"르블랑이 내게 준것은 챔피언 등록증. 그 등록증이 먹힐만한 가장 유력한 장소는... 전쟁 학회."

 

 그녀가 자운과 그림자 군도에서 활동했던 바에 의하면 챔피언 등록증이 실질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없었다. 그저 가지고있어도 그만이었고 혹여 소지하고싶지 않다고 말하면 소환사가 가지고있는 신분증에 지나지않는다.

 그런데 르블랑은 엘리스의 여정에 도움이 될것임을 확신했기에 자신의 등록증을 그녀에게 넘겼고, 다른 나라에서는 챔피언임을 인증해서 이득을 볼 경우는 거의 없다. 식당에 가서 등록증을 내민다고해도 할인이 적용되는것도 아니니까.(*가장 낮은 랭크 C 챔피언들도 챔피언 수입은 타 직종에 비해서 월등히 높다.)

"그런데 딱봐도 전쟁 학회는 챔피언이냐 비챔피언이냐에 따른 대우가 다를수밖에 없지. 동시에 랭크에 따른 혜택이 증감되기도 할테고."

 예상이 맞다면 엘리스가 다음으로 향해야 할곳은 그곳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해야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지 도움이 된다는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엘리스는 자신의 가슴골에 르블랑의 챔피언 등록증을 끼워넣었다. 예전에 그 비좁은 공간에는 자그마한 잔이있었을 법한 자리였지만 청문회 이후로 그것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깊숙하고 비좁은 자리에는 아무것도 끼워져있지 않았다. 그래도 무언가를 섹시하게 보관하기에는 제격인 자리임에는 이견이 없다.

 사실 그림자 군도에서 챔피언 복장 달랑 하나입은상태로 나온참이라 다른 저장공간이 없어서 그렇지만...

 그녀는 눈에 힘을 준채 자신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찾아보았다. 그래봤자 갈림길도 없는 한방향길이고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도 없기에 아무런 감흥도 없고 답도 나오지 않았다.

"젠장할..."

 자기가 피신한 곳이 녹서스의 어느쪽인지도 모르는 상태라 혼자서는 찾을 수 없는 질문에 지나지않았다.

 그 때, 엘리스가 걸어온 곳에서 수레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수레소리는 점점 커지면서 그 수레를 이끄는 사람의 모양새도 보여줬다. 수레에 담긴 물건들에 비해 옷차림이 남루한것을 보아 영락없는 떠돌이 상인이었다.

'저 사람이라면...!'

 그녀가 원하는 답이 어려운것도 아니니 사람만 잡는다면 쉽게 알수있을거라는 기대를 하고 남자에게 다가가자,

"뭐요."
 낮은 목소리와 동시에 째려보는듯한 인상이 엘리스의 얼굴을 향해 쏘아댔다.

'지... 진정하자.'

 초면부터 자신을 째려보는 시선에 그녀는 녹서스의 주민들에게서 나타난 공포를 떠올렸다.

'일단 말을 건네려면 상대방에 대한 적대심을 없애야하지. 그동안의 나라면...'

"수레에 있는 물건, 판매용인거 맞으신가요?"

"그래요."
"저것든은 어떤 물건인가요?"
"사실상 잡화요. 물약이든, 표창이든, 아니면 간단한 수납품도 있으니까."
'수납품...!'

"음, 혹시 가방 있나요?"
"있습니다만..."
"무엇무엇을 갖고있는지 좀 보고싶습니다."
 '이대로 잠시 상인의 시선을 돌려놓고선 가방을 늘어놓는 도중에 위치나 날짜, 길을 물어본다!'라고 생각하며 말을 건넨 엘리스지만...

"살거요? 돈은 있습니까?"

'아...'

 조용히 입을 벌리면서 엘리스는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않았음을 직감했다.

 

 챔피언들에게도 전장이외의 활동이 존재할수밖에없고 특히 그 챔피언이 인간형이라면 경제활동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그렇기에 소환사들은 인간형 챔피언들에게 봉급을 준다.

 하지만 타 직종과는 달리 소환사들은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챔피언에겐 만국 공용의 예금 계좌를 만들어주는데, 이것은 간단한 인증단계만 거치면 등록증이나 통장없이도 돈을 넣고 뺄 수있다. 어떤 나라의 지폐를 넣어도 인식할 수 있으며, 출금을 할때에도 어느 화폐로 인출을 할지도 고를수 있으나...

 알다시디피 엘리스는 빈털터리로 그림자 군도를 나온 몸이고 녹서스에서 현금인출기를 이용하긴는 커녕 생사의 기로에서 죽어라 도망쳐온 몸이다. 그래서 차마 상인의 말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저... 저기..."
"...뭐요, 여보세요, 지금 돈도없는주제에 나보고 물건을 보여달라는겁니까?"
'으...'

 엘리스에게 있어선 지금 이순간이 보이지 않는 땀을 절찬 . '이게 아닌데...', '지금이라도 물어보자.'라는 결심은 머리가 내린 결정일뿐,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웃기는군. 돈도없이 상인에게 접근하는건 또 뭐야?"

"아... 그, 저기..."
"돈없으면 저리 꺼져!"
"아 네..."
 이전의 엘리스같았다면 바로 상인에게 신경독을 날린뒤 발등에 힐을 꽂으면서 '호호호. 다시 한번 말해보렴~ 감히 누구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거니?'라고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을테지만 지금은 쥐죽은듯 움츠려든채 고개를 숙일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다. 스킬도 못쓰고, 돈도 없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상인에게 말을 걸수있는가. 동시에 처음보는 사람에게 쓴소리를 들은 사실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좋을 리가 없는 기분'은 단순한 화나 분노보다는 더욱 소심하고 답답한 부류였다. 그런 미묘한 이질감은 잔뜩 움츠려든 엘리스도 의아해했다.

'기분이 안좋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의 얼굴을 소리지르기는 커녕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겠어. 그래도 나에겐 저 사람한테 물어볼 거리가 있단 말이야. 하지만, 저런 말을 들으니까 저 사람을 볼 낯이 없어졌어.'

 

 시원하게 '큭'이라고도 말할수도 없게만드는 기분, 그 기분속에는 그녀가 오랫동안 느끼지 못한 감정이 있었다.

<계속>

 

<글쓴이의 말>

 

수정판에 드디어 보강차원의 오리지널스토리를 넣어봤습니다. 힘없고 돈없으면 아무리 거미여왕님이어도 깨갱할수밖에 없겠죠... 얼굴까지 붉어졌다는 묘사까지 넣으면 왠지 귀여울것 같다는 망상이 들어서(...) 그건 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