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자들

 

 

 

 

, 이봐. 아트록스! 왜 갑자기 이러는 거냐?”

당연한 거다. 가학과 폭력을 고귀하다 생각하지 않는 너희는 우월한 다르킨으로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지. 권위에 잠식당하고, 탐욕을 뒤집어 쓴 채 자신들이 고결하다고 믿는 자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평화는 언제나 지켜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 썩어빠진 무늬만 있는 평화지. 그런 게 지속될 바엔 차라리 모두 전쟁으로 본능을 찾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다. 그런데, 너에게서는 그 고결한 자들과 비슷한 의지가 아주 많이 느껴진다. 라아스트.”

전부 네가 벌인 짓이었나? 여기 있는 모든 무기가 다르킨이냐는 말이다. 저기 놓인 활, , 철퇴까지 전부 다.”

저들 역시 다르킨의 근본인 영원한 전쟁의 삶을 원하지 않아 내가 친히 봉인시켜주었지. 평생을 함께한 자신들의 무기와 함께 영원히 쉴 수 있도록.”

미쳤군. 자네, 재정신이 아니야.”

“‘미쳤다……? 글쎄우리 선조들의 행적을 본 적이 있나 라아스트? 전쟁의 현장에 항상 나타나 패색이 짙었던 쪽을 승리로 이끌었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들을 말이야. 우린 그들의 후손이다. 하지만 어떤가? 지금의 다르킨은 어찌 된 영문인지 인간 꼬맹이들 패싸움에도 간섭하지 못할 만큼 평화에 취해있다. 그리고 너 역시 그 부류에 포함되지. 난 선조들의 사상을 따르지 않는 반역자들을 처단한 것뿐이니 자네가 뭐라고 할 처지는 못 되지 않나?”

네 사상은 썩어빠졌어. 그래. 네 말대로 우리는 전쟁의 상징이다. 어떤 상황에도 무모하게 뛰어들지. 앞뒤도 가리지 않고 말이야. 하지만 넌 보지 못했나? 그런 우리의 본성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과거 대 전쟁 당시, 우린 유능한 전사들을 모두 잃었다. 네가 그렇게 강조하는 그 본성 때문에. 우리의 본성이 우리를 파멸로 이끈 길이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거냐? 왜 우리 다섯만 현세에 남았는지 정녕 모르냔 말이다!!!! 내가 널 막을 것이다, 아트록스. 네가 한 짓이 무슨 짓인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고,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주겠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보라고.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단 생각은 안 드나? 이미 넌 네 무기와 동화되고 있는 중이다. 그게 너의 마지막 단말마라면 잘 귀담아 들어두지.”

스스로 무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자만하지 마라. 아트록스. 널 막는 건 반드시 이룰 것이다. 언제가 되었든 몇 날, 며칠 아니, 몇 세기가 지나도 난 반드시 깨어나 널 찾을 것이다!!!”

…… 기대하지.”

흐으……!!! 크아아아아아악!!!!!!!”

철걱!

다시 만나게 될 때를 기대하지. 라아스트.”

 

·

 

그래…… 그래서, 이걸 내게 보여준 이유가 뭐냐?”

, 별 감흥이 없나보군. 하긴, 이 기억이 너한테 무슨 영향을 주겠나.”

그 말 말고 다른 할 말이 있지 않나? 나와 네가 같이 있는 동안에는 나에게 하나라도 무언가를 숨겼다간 낫 채로 싸매서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있다.”

눈썰미 빠른 게 이럴 때만 도움 되는 건 참 뭣 같군, 시이다 케인.”

오늘은 왜 그렇게 분위기 잡나 했더니만, 평소에도 그랬던가. 아무튼 목적이 있으면 빨리 말해라. 어딘가로 던져버리기 전에.”

하지도 못할 소리는 꺼내지도 말라고, 그래 말해주마. 난 지금 네가 본 기억 속에 나온 아트록스라는 다르킨을 찾고 있다. 현세까지 나와 함께 살아남은 다섯의 다르킨 중 한 놈이지.”

왜 그 녀석을 찾는 거지?”

내가 지금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다르킨은 나를 포함해서 세 놈이다. 아트록스, , 그리고 또 한 명의 다르킨.”

혹시 그 다르킨도 네 기억 속에 나왔나?”

바닥에 내동댕이 쳐있던 활, 그 다르킨이다. 지금 녀석의 기운도 느껴지고 있다.”

그러냐…… 근데 난 말이야, 언제까지고 죽치고 앉아서 이야기만 듣고 있는 건 영 적성에 안 맞는단 말이지. 결론적으로 넌 내가 뭘 해줬으면 하는 거냐?”

하찮은 너 따위에게 도움 따위 구할 이유는 없다. 지금 당장에라도 네 녀석의 몸을 빼앗아 아트록스를……

케인은 앉아있던 곳을 박차며 일어나 라아스트를 들고 일어났다.

그게 진심인거냐? 넌 지금 두려워하고 있어. 뭐가 문젠 거냐? 너답게 그냥 확확 내던지란 말이다!”

내가 왜 네 장단에 맞춰줘야 하는 거지? 그리고 이건 나뿐만 아니라, 너도 위험한 일이다! 관련도 없고 나약한 인간을 다르킨의 힘 싸움 사이에 낄 정도로 내가 바보는 아니란 말이다!”

이거 왜 이러실까? 내 몸을 잠식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던 다르킨은 어디로 사라지셨나?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난 흔쾌히 도와줄 수 있다. 물론 공짜로 해주는 건 나도 원치 않지만 말이다.”

넌 착해빠진 거냐? 멍청한 거냐? 네 녀석은 항상 예상하지도 못한 답을 내놓는다고. 시이다 케인!”

분풀이 할 대상이 나 밖에 없다면, 그걸로 됐다. 그렇게 나마 버림받은 녀석의 한을 풀 수 있다면 된 거야. 너도 동족에게 잊힌 다르킨이고, 난 비록 지금은 그림자단 소속이지만 지난날의 녹서스가 전쟁 뒤 죽어가는 사냥개를 아무렇지 않게 버리듯 내팽개친 한낮 소년병일 뿐이다. 우리 말고 또 누가 우리를 동정해주고 도와줄 것 같나? 서로 미래가 밝지 않다면 개척해 나가면 되는 거다. 우리 둘 중 누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장악할 때까지 난 너를 동료라고 믿고 도와줄 것이다. 혹시나 그게 지금 당장이 될지라도 말이다.”

진심이라면, 내가 자주 하는 말은 아니지만 한 마디 더 얹지.”

 

고맙다.”

 

·

 

네가 말한 다르킨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고 있겠지?”

정확한 위치는 우리의 유대만으로는 알 수 없다. 유대가 느껴지는 곳의 대략적인 위치는 알 수 있지만 말이지.”

그런데, 내가 알고 있기로는 다르킨이란 종족은 본디 무기가 본체라고 했다. 네가 낫인 이유도 그것일 테고. 그럼 그 아트록스라는 다르킨도 무기가 본체일 텐데녀석이 형상을 가지게 된 이유는 뭐지?”

누구인지 몰라도 아트록스의 봉인을 풀어준 누군가가 있었다. 다르킨들은 혼자서 무기 밖으로 나올 수 없다. 꼭 몸을 만들어 줄 재료가 있어야 하지. 인간이든, 동물이든 무엇이든지 말이다. 처음에는 녀석 스스로 무기에서 빠져나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더군.”

그럼 그 녀석이 아트록스의 봉인을 푼 뒤에 너희도 풀어준 게 아닌가?”

물론이지. 녀석은 애초부터 남은 우리 다섯을 전부 해방시키는 게 목적이었나 보더군. 봉인이 풀리는 시간은 개체 차이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이 소요된다. 우리의 봉인이 풀리는 동안 먼저 세상으로 나온 아트록스는 그 녀석을 죽여 놓고, 바깥세상으로 나가 영겁의 세월이 지난 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아마 다시 살육의 광기에 사로잡혔겠지. 녀석이 말하는 고결한 폭력에 말이다.”

한 마디로, 살상에 미친 전쟁광이라는 소리군.”

, 요약은 참 맛깔나게 잘하시는군그래.”

케인은 라아스트의 날을 한 번 쓱 훑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라아스트가 감지했다는 다르킨의 흔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케인은 몰라도 라아스트에게 있어서는 아트록스를 제외한 살아남은 다르킨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힘을 합쳐 아트록스의 잘못된 행동을 저지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주는 이 다르킨의 흔적은 현세의 봉인이 풀리고 지냈던 그 어느 날보다 가장 가슴 벅찬 날이 아닐 수 없었다. 아트록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다르킨들과는 모두 초면인 사이이기에 라아스트 자신의 목적과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모두가 한 편이 되어 일족의 배반자를 처단하는 것에 동참할 것이다.

난 왠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데?”

네가 알든 말든 난 상관없다. 이건 내 일생일대의 목표이자, 네 명의 다르킨들을 위한 혁명이니까.”

갑자기 기분 팍 상하네? 다시 돌아가?”

.”

 

미안하다.”

 

·

 

여긴……

이 아래에서 다르킨의 기운이 느껴진다! 드디어 동족을 찾은 것이다! 하하하하!!!!!”

케인과 라아스트가 멈춘 곳은 이미 오래전 녹서스 침공에서 희생양이 되었던 아이오니아의 한 마을에 있는 신전이었다. 라아스트는 그저 다르킨의 흔적을 찾았다는 것에서 기뻐하고 있었지만, 케인은 신전을 보자마자 주먹을 쥐고는 이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형체가 있었다면 아마 기쁨의 춤이라도 추고 있었을 라아스트는 케인의 변화에 들뜬 마음을 잠시 누르고 조심스레 케인을 불렀다.

케인.”

닥쳐.”

?”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

무슨…… 뭔가 네게 아픈 추억이 있는 곳이냐?”

과거의 기억을 더는 꺼내기 싫었다. 하지만 네가 여기로 데려다 줄 줄 몰랐으니…… 그래, 여긴 내 과거가 아주 굵게 뿌리내린 곳이다. 이루 말할 수가 없지. 날 개처럼 부리던 녀석들이, 여길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거니까.”

케인은 오른쪽 벽면이 전부 날아가 안쪽이 훤히 다 보이는 신전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녹서스 놈들이군. 맞나?”

그래.”

벽의 잔해를 넘으며 케인이 대답했다. 다리가 부러져 완전히 박살난 나무 책상과 그 위에 있던 유리병의 잔해들, 그리고 케인의 눈앞엔 구덩이 안의 한 궁수가 눈에 들어왔다. 현실에 있는 형체는 아니었다. 다만, 과거의 악령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항상 이 신전에 오면, 내 눈엔 저 수호자가 늘 보인다.”

망령이라도 되는 건가…… 그 자가 뭘 하고 있지?”

보라색구덩이 속의 무언가와 정신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 같다. 괴로워하고, 절망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의 기운에 잠식당했다. 오른손에 들린 그의 활이 점점 커진다. 보라색과 검은색이 섞인 흉측한 모습으로…… 그의 눈도……!!!!”

뭔가?! 왜 그러는 거냐?!”

, 이건 말도 안 돼…… 어째서 이 구덩이 속에! 라아스트! 네가 맨 처음으로 그 다르킨의 존재를 알아차린 게 언제였나?!”

지금 당장에 와서 알아차린 건 아니지만 적어도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기운은 느끼고 있었다. 단지 그 위치가 너무나도 멀어서 지금의 형태와 똑같았던 내가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제 서야 온 것뿐이다.”

방금방금 구덩이 속에 있던 녀석의 말을 들었다. 분명 이랬어. ‘너의 가족을 파멸로 이끈 녀석들을 복수하길 원하는가? 내 힘을 쟁취해라. 나는 다르킨’, 널 도와주겠다.’라고 말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이 구덩이 속에 다르킨이?!”

케인은 구덩이 속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갑자기 구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리 없이 조용히 착지한 케인은 구덩이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돌무더기에서 보라색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유기물 즉, 살아 있었다.

유감이지만, 본체는 없어도 증거는 찾은 것 같은데.”

이런! 몇 년이나 지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녀석의 파편인 것 같군. 이런 걸 흘리고 다니는 걸 보니 조심성이라곤 없는 녀석 같은데?”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찾아볼 테냐?”

말투가 꽤 확신에 차 있군. 뭐 짐작이라도 가는 곳이 있나?”

있고말고. 이 발로란 대륙에서 모든 이들이 가장 집중하는 곳. , 전쟁 방지 구실을 하고자 했지만 이제는 그저 모두가 즐기는 문화가 되어버린 곳.”

케인은 구덩이를 한 번 더 쓱 보고는 만족한다는 듯이 씩 웃었다. 가벼운 발걸음이 그 뒤를 따랐다. 어느새 케인은 아이오니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라아스트가 케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냐?”

아마 네가 가장 좋아할 거다. 계속되는 전투가 기다리니 말이다.”

! 다르킨이 전부 다 전투에 환장할 거라고 생각하지마라! 난 아트록스와는 다르단 말이다!”

그 녀석은 그나마 품위라도 있어 보이더군. 네가 싸우는 건 완전 싸움에 미친 녀석이었고.”

케인……! 날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 그래그래 미안하다. 조금 전에 너무 화난 걸 풀어보려고 하다 보니 타겟이 네가 되었군. 분풀이는 그곳에 가서 하라고. 아마 내 생각엔 그곳에서도 너와 내가 이 몸을 가지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그거 마음에 드는군! 아주 재밌겠어!”

네가 찾는 그 다르킨도 그곳에 있다. 바루스라는 이름으로 참가하고 있지. 혹시나 아트록스도 참가하고 있을지도.”

아아…… 그래서 날 데려가는 거군. 동료와 적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기화라!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겠나? 케인?”

딱히 알고 싶지 않아. 그리고 표정을 지으려면 먼저 얼굴부터 만들라고.”

제길! 됐다! 얼굴이야 나중에 네 몸을 잠식해서 온갖 표정을 다 지어주마!! 그것보다 네가 가는 곳의 이름이 대체 뭐냔 말이다!”

전설의 리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그 오브 레전드라고 부르는 곳이다.”

왠지 불타오르는군. 이 본성을 깨울 시간이 언제까지고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래, 가자. 그곳에서 우리를 보여주는 거다.”

 

어느새 해가 지고 비가 어지간히 내리고 있었다. 푸른빛의 눈동자는 멸시와 오만함으로, 붉은빛의 눈동자는 살기와 광란으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