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최강의 전차 티거(Tiger)Ⅱ 전차

입력 : 2014.01.01 11:24

1944년 서부전선에서 돌격 훈련 중인 티거 Ⅱ
 1944년 서부전선에서 돌격 훈련 중인 티거 Ⅱ

제1차 세계대전이 절정기로 치닫던 1916년, 고착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영국이 현대적 의미의 전차를 처음 데뷔시켰지만 그때는 단지 보조적인 수단으로만 취급되었다. 비록 일부 전투에서 효과를 보기도 하였으나 툭하면 고장이 잦았고 장갑도 쉽게 뚫려 일선에서는 그다지 신뢰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뒤뚱거리며 등장한 전차가 전선의 새로운 주역으로 자리 잡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집단화 된 기갑부대를 앞세운 독일이 불과 7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한 후부터 전차를 대하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후 전선의 주역은 전차가 되었고 전쟁 내내 수많은 종류의 전차들이 탄생하여 맹활약하면서 바야흐로 지상전의 왕자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그렇게 등장한 전차 중에서 ‘6호 전차 B형(Panzerkampfwagen Tiger Ausf. B, 이하 티거 Ⅱ)’은 가히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강이었다.


 

(좌)뮌스터 전차박물관에 전시 된 티거 Ⅱ와 전차포탄 (우)보빙턴 군사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티거 Ⅱ
 (좌)뮌스터 전차박물관에 전시 된 티거 Ⅱ와 전차포탄 (우)보빙턴 군사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티거 Ⅱ

티거 Ⅱ는 다양한 별칭을 가진 전차로도 유명하다. 독일군에서는 티거 B(Tiger B), 쾨니히스티거(Konigstiger) 등으로, 연합군 측에서는 킹타이거(King Tiger), 로열타이거(Royal Tiger) 등으로 불렀다. 피격 당하면 워낙 화재가 잘 발생하여 유명한 라이터 상표인 론슨(Ronson), 지포(Zippo) 등의 치욕적인 별명으로 불린 미국의 M4 전차와 비교하여 본다면 이러한 자칭 혹은 타칭의 별명만으로도 티거 Ⅱ의 강력함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정도다.


 

1944년 10월 부다페스트에서 촬영된 503 중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Ⅱ
 1944년 10월 부다페스트에서 촬영된 503 중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Ⅱ

독일 기갑부대에 대한 오해


독일 국가대표 축구팀을 흔히 전차군단이라 할 만큼 전차의 제작과 기갑부대의 운용에 있어서 독일이 세상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특히 2차대전 당시에 독일군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전격전(Blitzkrieg)은 전차를 떼어놓고 설명하기 힘들다. 이에 더해 독일이 만든 다양한 전차들은 매니아들이나 모델러들에게 최고의 인기 소재가 될 만큼 멋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종종 벌어지는 오해가 있다.


많은 이들이 티거 Ⅱ를 비롯하여 빛나는 명성을 남긴 티거 Ⅰ, 판터(Panther) 같은 전차들을 전격전의 주역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독일이 쇠퇴기에 접어들었을 때 등장한 전차들로, 전쟁 초기에 있었던 전격전과는 관련이 없다. 독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전차들은 그 이전에 탄생한 1~4호 전차들이었는데, 특히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전에서 활약한 1, 2호 전차는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전차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다.


엄밀히 말해 독일 기갑부대가 전쟁 초기에 이룬 업적은 하드웨어적 성능 때문이 아니라 전차와 기갑부대를 운용하는 측면에서 탁월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주변국과 달리 독일은 전차를 보병부대에 분산하지 않고 별도의 제대로 편성하여 집단 운용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오히려 1942년 이전에 교전을 벌였던 프랑스나 소련에 비해 전차 전력은 양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뒤졌을 정도였다.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503 중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Ⅱ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503 중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Ⅱ

시대 상황이 만든 탄생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독일의 전술을 연합국이나 소련군도 알게 되자 더 이상 상대보다 빈약한 전차로 전투를 벌이기 곤란하였다. 특히 그 동안 한참 아래로 보고 내심 깔보던 소련의 T-34전차나 KV중(重)전차는 독일군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직접 교전을 벌이던 전차병들은 물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이나 클라이스트(Ewald von Kleist) 같은 당대 최고의 기갑부대 지휘관들도 공개적으로 성능의 차이를 인정할 정도였다.


이러한 위기감에서 부랴부랴 개발에 착수한 전차가 티거 II였다. 그 동안 성능이 부족한 기존 3, 4호 전차를 대체할 차원에서 이전부터 개발이 진행되었던 티거 I(6호 전차) 그리고 소련의 T-34를 벤치마킹 한 판터(5호 전차) 등도 있었지만,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이보다 더 좋은 전차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1943년을 기점으로 전쟁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구조적으로 물량 대결에서 소련군이나 연합군을 이길 방법이 없어서 뛰어난 질로써 양을 제압하여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발로 적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강력한 화력과 적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뛰어난 방어력을 갖춘 전차가 필요하였다. 장갑을 두텁게 하면 어쩔 수 없이 기동력이 떨어지는데, 1943년 이후부터 독일은 수세로 몰리고 있던 중이어서 기동력은 그 다음의 고려사항이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티거 II가 탄생하였다.


 

1944년 서부전선에서 촬영 된 티거 Ⅱ
 1944년 서부전선에서 촬영 된 티거 Ⅱ

무서운 칼 그리고 강력한 방패


육군의 소요 제기에 따라 헨셸(Henschel)과 포르쉐(Porsche)가 개발 경쟁을 벌였는데 양측 모두 크루프(Krupp)가 설계한 포탑을 사용하였으므로 차체만 차이가 있었다. 헨셸은 판터와 비슷한 경사 장갑을 채용하였고 엔진을 후방에 탑재한 반면 포르쉐는 엔진을 차체 중간에 설치되었다. 여기에 더해 동력 및 현가장치가 제작사별로 차이가 있었는데, 각종 실험결과 헨셸의 모델이 좋은 것으로 판단하여 계약자로 선정하고 1943년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티거 II는 이미 실전에서 뛰어난 전과를 보여주고 있던 티거 I의 명성을 이어받아 이름이 정해졌으나 엄밀히 말해 전혀 다른 전차였다.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채택한 경사장갑 때문에 외형에서부터 전혀 달랐다. 56구경의 88mm포를 탑재한 티거 I과 달리 티거 II는 같은 구경이지만 길이가 늘어나고 포구 속도가 더욱 증가 된 71구경의 KwK 43 L/71 포를 채택하여 파괴력을 증가시켰다. 덕분에 122mm포를 장착한 소련의 IS-2전차보다 뛰어난 공격력을 보여 주었다.


이와 더불어 경악할 만큼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하였다. 경사장갑에 150~180밀리미터의 전면 장갑을 채택하여 방어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 미국의 M26이 티거 Ⅱ를 격파하려면 약 1,300m이내로 접근하여야 했는데, 그나마 이것도 200m까지 다가와야 공격을 할 수 있던 IS-2보다 좋았다. 반면 티거 Ⅱ는 당시 존재하던 대부분의 전차를 2,500m 거리에서도 격파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원거리에서 마주치면 싸움이 되지 않았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인 1944년 7월에 촬영 된 503중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Ⅱ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인 1944년 7월에 촬영 된 503중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Ⅱ

어쩔 수 없던 약점


티거 Ⅱ의 결정적인 약점이라면 기동력이었다. 방어력을 늘리다 보니 무게가 거의 70톤에 육박하였는데 이는 현재 미군의 주력 전차인 M1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써 최고 수준인 12기통 마이바흐(Maybach) 엔진도 700마력 밖에 힘을 낼 수 없어 최고 속도가 도로에서 시속 40킬로미터에 불과하였는데, 거기에다가 가솔린 엔진이어서 연비가 최악의 수준이었다. 더불어 복잡한 구조도 야전에서 정비하고 부품을 조달하는데 애를 먹게 만들었다.


하지만 물자 부족과 연합국의 전략 폭격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제작될 수 없었던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공식 기록으로 총 492대가 생산되었는데, 이는 2차 대전 당시에 의미 있게 활약한 전차로써는 상당히 적은 수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특히 서부전선의 미군이나 영국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독일의 쇠퇴기에, 그것도 그다지 의미도 없는 적은 생산량만으로도 티거 Ⅱ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전차라는 소리를 들었다.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내용이지만 티거 Ⅱ와 1대 1로 전차전이 벌어질 경우 후퇴하더라도 군법 회의에 넘기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질 정도다. 그만큼 티거 Ⅱ와 정면으로 교전하여 이길 수 있는 전차는 당시에 없다시피 했다. 티거 Ⅱ의 가장 큰 적은 공군이었다. 대부분의 티거 Ⅱ는 전쟁 말기 제공권을 장악한 공군의 공습으로 격파되었다. 여기에 더해 연료 보급 등이 되지 않아 유기된 수량도 다수였다.


 

부다페스트 공방전 당시에 촬영 된 티거 Ⅱ의 포탑과 승무원들의 모습. 보병의 자기흡착식 지뢰에대응하기 위한 찌메르트 코팅이 인상적이다.
 부다페스트 공방전 당시에 촬영 된 티거 Ⅱ의 포탑과 승무원들의 모습. 보병의 자기흡착식 지뢰에대응하기 위한 찌메르트 코팅이 인상적이다.

패자의 전차


1944년 7월 18일, 503 중전차대대가 노르망디 전투에 투입되면서 티거 Ⅱ는 처음으로 전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부전선에서는 1944년 8월 12일 비스툴라 강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 티거 Ⅱ를 보유한 501 중전차대대가 참전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독일은 별도의 중전차대대를 운용하였을 만큼 티거 Ⅱ는 전쟁 말기에 가동할 수 있었던 독일군 최고의 전투 자산이었는데, 수량이 적다 보니 꼭 필요한 곳에만 선별적으로 투입하였다.


특이하게도 티거 Ⅱ가 공세에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독일의 마지막 공세로 기록 된 1944년 12월의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였다. 야심만만하게 준비한 작전에서 티거 Ⅱ는 돌파의 주역을 담당하였지만 미군의 격렬한 저항과 후속 보급 문제로 목표한 곳까지 진격하지 못하였다. 4년 전 같은 곳에서 있었던 독일군의 승리를 재현하고자 당대 최강의 전차를 집중 투입하였지만 기동력이 부족한 티거 Ⅱ에게 공세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대 최강의 티거 Ⅱ는 1945년 5월 베를린 전투에 등장하여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였지만 승자가 아니라 패자의 위치에서였다. 티거 Ⅱ는 후세까지 두고두고 전해질 만큼 뛰어난 성능의 전차였지만 500대도 못 되는 수량으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는 없었고 독일이 패배한 현장에서 처절하게 싸우다가 산화한 주인공으로만 주로 전사에 기록되었다. 결국 시대를 잘못 타고난 최강의 전차였던 셈이다.


 

제원
중량 69.7톤 / 전장 10.26m / 전폭 3.75m / 전고 3.09m / 승무원 5명 / KwK 43 L/71 88mm 전차포 / MG42 기관총 1정, MG34 기관총 1정 / 항속거리 170km / 최대속도 38km/h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http://blog.naver.com/xqon1.do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