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름다운 숫자를 보라.



중공군의 인해전술.

사실 인해전술을 구사한건 중공군만이 아니지만 여기선 중공군만 언급합니다







인해전술이라고 하면 대부분 "인민의 바다에 적을 수장" 같은 끝도없이 몰려오는 인간의 파도를 연상하는데.


한국전쟁 자료에서는 1950년 12월 유엔군은 30만인 반면에 공산군은 47만에 불과. 

1952년 중반에는 유엔군은 60만, 공산군은 70만이였고 1953년 7월에는 유엔군 90만, 공산군 180만.








돌격중인 중공군 40군단




위에 언급한 숫자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병력 숫자에 꽤 차이가 보이죠

하지만 끝이 없다고 느낄만큼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었습니다


북한군은 인천상륙에서 병력을 잃은 뒤로 보조 역할밖에 못했고 공산군은 지리산 무장공비 숫자도 포함된 것.


자유진영과 공산군의 장비와 화력차이, 제공권 장악을 감안하면 

도저히 항거할수 없을정도의 전력차는 아니었을텐데







그럼 왜 밀렸을까....






문제는 중공군의 지원은 수만명에 불과할거라는 미정부와 맥아더 사령관의 오판도 있었고,


북으로의 지나치게 빠른 진격으로 인해 부대간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겨울이 오면서 부대들의 기동력에 문제가 생기죠


결국 부대단위로 고립되기 시작하고 숫자를 바탕으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에게 차례차례 각개격파.








또한 일반적으로 알려진것과 달리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냅다 전 전선에 걸쳐 병력을 계속 밀어넣는게 아니었습니다.
(이러면 천만명은 필요할듯;;)


인해전술이란 어디까지나 "작전지역에서 적보다 숫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니.

전 전선에 걸쳐 상대보다 많은 숫자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거죠.


자신이 공격하고 교전이 벌어질곳에서만 상대보다 압도적인 물량을 유지하면 되는거.








낙동강 전선 미 제24 보병사단 예하 34 보병연대 소속 M1919A4 사수와 부사수




중공군은 교활하게도(전쟁에도 치사한게 있다면;;) 

막강한 화력을 가진 미군부대는 되도록 피하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무장의 국군을 향해 파상공세.


안그래도 지나치게 빠른 진격과 추위로 고립된 부대들에게 병력을 집중시켜 중공군이 들이닥치니,

버틸수가 없다ㅠ


국군은 중공군의 꽹과리와 나팔소리만 들어도 노이로제가 걸리기 시작.









중공군의 4선 12파(四線十二波)전법



적 진지 돌파와 적 섬멸에 중점을 둔 밀집대형의 파상적 공격전술.

해당 전장에서 상대보다 높은 숫자의 이점을 살려 공격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며,

그로인해 상대의 견고한 진지를 돌파해 붕괴시킨다는 전술.



알려진 바와는 달리 중공군은 수십년간 계속된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을 치르며 상당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휘관들도 노련했다죠






그리고 이어지는 후퇴. 후퇴....후퇴


1951년 이후부터는 강력한 수비로 전선이 정리되기전까지 끊임없이 밀려내려옵니다



정리하자면 단순히 병력을 많이 동원하는 것만으로는 인해전술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국지에서 상대보다 수적우위를 유지한 중공군의 전술적 승리라고 봐야할듯
(물론 병력을 갈아넣었다는건 부정할수 없지만-_-)













용병술에서는 병력의 집단운용이 기본이며 전력의 분산을 금기시 하죠




하지만 중공군은 뭉치고 우린 다 흩어져 고립되어있었으니 패배는 기정사실.




다만 화력차이가 워낙 심했고 제공권을 완전 내준상태였기때문에 중공군의 피해도 막대.








간단해보이지만 간단하지 않은 인해전술이었습니다



중공군 2월공세간  증언 (안용현, 한국전쟁비사(3), 1992년, p.375, p.436) 
"쏴도 쏴도 그대로 올라온다. 저것들이 인간인가. 나중에는 도리어 우리가 소름끼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