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피로 씻어낸다”
그 날은 먹에 흠뻑 적신 붓을 드리운 마냥 어둑한 하늘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여인의 새하얀 소맷자락엔 진흙이 가득했다.
이제는 희미해진 옛 기억의 공허감을 자신을 끝없이 몰아세우는 수련으로 채워나갔다. 어렴풋이 남은 그리움과 반월추, 이끌리듯 흘러나오는 무예의 동작. 미칠 듯이 궁금한 과거와의 연결고리는 이것뿐이었다. 희뿌연 기억과 답을 낼 수 없는 고민으로, 답답함에 질끈 깨문 입술에 한 가닥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내 흐트러진 발 동작에 쓰러지고 만 여인의 왼쪽 뺨에 진흙 한 방울이 올라탔다. 그 때. 뿌옇게 번진 시야 사이로 두터운 갑주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 땅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신비로운 문양이 새겨진 동방의 신발이었다. 그리고 처음 듣는 것 같으면서도 익숙하고 낮은 사내의 음성이 여인의 귓전을 두드렸다. “부드러운 춤사위에 엮은 내 가르침이 잡념에 흐려지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고개를 든 여인의 눈과 사내의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 시간이 멎은 것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흐름을 멈추었다.
혼이 나갈 듯 요란한 고동 소리가 고막에 메아리 쳤다. 영릉향! 망인이 되어 지하에서 나를 지켜 보고 있을 거라 믿었던 그가, 멀쩡한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나자,
낮은 목소리를 타고 잊고 있던 기억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난초가 이리 슬피 우는데, 혜초가 어찌 곁에서 탄식하지 않겠소?
어디든 내가 함께 하리라는 말을 믿지 않은 것이오?” 한동안 여인을 지긋이 바라보던 영릉향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나라에 충을 다하였건만, 돌아온 것은 등 뒤에 날 선 창 일만 자루였소.
모두가 욕망에 홀려 우리에게 등을 돌렸고 둘만 살아남았소. 이제 혼탁함에 물든 세상을 구하고, 불쌍한 백성들의 삶을 살필 수 있는 것은 마음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은 우리뿐이오.”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사람이 돌아왔다. 여인은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영릉향은 쓰러진 여인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 길은 가시밭길이 될 것이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하면 능히 해낼 수 있소.
당신을 찾아 세상을 헤매다 이 서쪽 땅에 잠든 신물의 힘을 느꼈소. 그 무구의 힘이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자, 나와 함께 갑시다.” 이 외롭던 땅에서 더 생각할 것이 없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릉향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력이 이끄는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수일이 지나 당도한 그곳엔, 낡은 도 두 자루가 땅에 꽂혀 있었다. 평범한 이의 눈엔 쇳덩이 두 조각이었으나, 여인은 도신을 타고 오르다 넘쳐 흐르는 거대하고 강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영릉향의 말대로, 신물이 틀림없었다. 이 무구만 손에 넣는다면, 우리를 배반한 모두를 굴복시키고, 어릴 적부터 배우고 꿈 꿔 왔던 군자의 나라를 세울 수 있으리라! 마침내 여인이 그토록 염원하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에 손을 뻗은 순간.
별안간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 없는 여인의 손가락을 어둠의 형상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여인의 눈동자에 흉악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 영릉향이 비쳤다. “클클클, 우둔하고 어리석은 신녀여, 망자가 돌아온 것을 정녕 믿었더냐?
아니면, 영릉향의 무덤을 파헤쳐 꺼낸 이 갑주가 네 눈을 멀게 했더냐? 놈은 이미 파내어 도성에 효수하였고, 곧 네 목까지 취하게 되었으니 자손 만대까지 누릴 공적이 눈앞에 왔구나!” 간신! 어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으랴!
영릉향이라 믿었던 사내의 육신이 검은 기운으로 점점 녹아내리더니, 괴물 같은 제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반월추를 갖춰잡는 것도 잠시, 여인은 어지러운 시야에 메스꺼운 듯 표정을 구기며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수 천년 간 아무도 이루지 못한 혈류인을 깨우다니. 널 힘겹게 이곳으로 인도한 보람이 있구나!
게다가 욕망에 눈 멀어 도신에 손까지 대었으니, 네 순백의 기운에 탁한 먹이 번지는 것도 시간 문제로다! 네 심신은 곧 타락하고, 배 부른 혈류인은 한동안 나의 것이…” 찰나, 간신의 미간에 고검이 꽂혔다.
어느 샌가, 여인의 얼굴에 검고 낯선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간신은 죽지 않고 히죽 웃으며 품 안에 숨겨두었던 검은 돌을 꿀꺽 삼켰다. “과연. 본관이 사군자의 기재를 얕보았도다. 혈류인을 깨우는 것도 모자라, 그 혼을 집어 삼켰구나!
더더욱 탐 나는 먹이가 되었도다. 으흐흐흐.” 간신의 몸에 알 수 없는 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하더니, 곧 입고 있던 갑주가 찢어지며
우락부락한 근육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때, 여인의 머릿속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저 강해지고 싶은, 무엇이든 파괴하고 싶은 욕구가 세상에 대한 짜증과 뒤섞여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눈 앞의 모든 것을 베자. 걸리적거리는 것은 지우면 된다. 곧 흉측한 괴물으로 변한 간신의 손톱 날과 여인의 고검이 맞부딪치며 굉음을 뿜기 시작했다.
간신은 여인을 한껏 내리깔고, 비웃었지만, 알고 있었다. 혈류인을 집어삼킨 여인에게 이길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모아 온 모든 악한 기운을 여인에게 뿌리며, 처절하게 저주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합 후, 복부에 치명상을 입은 간신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라! 괴물이 따로 없구나! 클클클클. 지금 너와 나의 모습이 무엇이 다르더냐?
혈류인이 너를 선택하였으니, 고고한 척 오만을 떨던 네가 갈 길은, 영릉향 놈과 함께 기다릴 황천뿐이리라! 클클클클.” 그 말과 함께 흉측한 괴물로 변한 간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짧은 시간, 나는 무엇을 했는가? 진정 이곳으로 날 이끈 것은 간신이었을까, 아니면 공허함과 외로움, 그리고 남은 분노가 일그러져 보인 허상이었을까. 짧은 탄식과 함께 여인은 일어섰다. 양손에 혈류인 한 자루씩을 움켜쥔 채로. 악자만 허락하는 혈류인이 수 천년 만에 각성해 대륙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 날은 먹에 흠뻑 적신 붓을 드리운 마냥 어둑한 하늘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숨 죽은 풀숲 뒤로 혼을 잃은 시체더미가 즐비했다. 그곳엔 한 여인의 광기에 젖은 웃음소리가 불 타는 소리와 함께 뒤섞여 울고 있었다. 여인은 자신이 벌인 참상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따스했던 난향이 차갑게 식은 혈향이 되어 땅을 물들이고 있었다.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살려달라며 여인의 도포 자락에 매달렸다.
그녀는 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혈류인을 내려 베었다. 눈꽃처럼 새하얀 뺨에 붉은 피가 올라탔다.
철저한 왕실의 교육과 예법, 주변의 기대에 오랜 시간 가두어졌던 본성이 혈류인의 힘에 이끌려 폭주하고 있었다. 여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날카롭게 찢어진 웃음소리가 계곡에 크게 울려 퍼졌다.
“피는 피로 씻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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