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자리에 앉아 인벤을 둘러본다.

특별히 찾는 것이 있는건 아니다. 
무언가 정리 하는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커뮤니티에 끼여 놀려고 하는것도 아니다
로그인도 자주 안해 암호도 깜박거린다.
그냥 멍하니 이곳저곳을 두루 둘러본다.


문득 궁금하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을까?...


트오세를 시작한지는 꽤 전이였다.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아기자기한 화면과는 다르게 생각이상으로 어렵고 지겨운 게임이였다.
재미는 있었다. 다른 게임에서는 찾을수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하다 말다를 반복하며 각종 버프나 보상이벤트를 할때마다 한번씩 들락거리며
트오세를 했다. 그렇게 꽤 되었다. 얼마나 한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왔다갔다 연어같은 생활을 하면서 주케릭터 같은 건 없었다.
화면에 오래 붙들고있는 성직자는 있었지만 특별히 애정이 가거나 좋아서
그런것은 아니였다. 그저 쉽고 편해서 였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처럼 멍하니 게시판을 둘러보다
한 분이 올린 전사의 영상을 보게되었다.
창과 방패를 들고 연보라 이펙트를 뿌리며 몹을 도살하는 펠도무이였다.
흔히말하는 성능에 특화된건 아닌거같지만 충분히 강하고 재미있어보였다.


그리고 이상한 열이 가슴 속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금껏 트오세에서 이런 기분이 든적이 있었을까? 
인벤을 보는 나에게는 활기가 있었고 게임 속 전사에게는 애정이 있었다.
염색을 하고 코스튬도 맞추고 닉네임도 고민하며 2번이나 교체했다.
오타 닉네임도 그냥 방치한 다른 케릭터에는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드나
이 펠도무 녀석에게 들이는 TP가 아깝진 않았다. 

그래서 결정하였다. 나의 주케릭터로 정하기로!
내 모든 것을 투자하여 이녀석을 강하게 해주기로!
공백이던 홈피 대표케릭터에 당당히 펠도무의 닉네임이 박혔다.

나에게 있어서 처음 있는 물딜전사케릭이기에
전사 아이템 투자를 위해선 준비해야할것이 많았다.
결국, 지금껏 키운 4개의 케릭터가 가진 모든 걸 처분해야 했지만
지금껏 해온 트오세가 이순간을 위한것이였나 싶을 정도로
많이 부족하지도 풍족하지도 않게 딱 들어맞았다.

처음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높은 수준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투자 만큼 성능도 나왔다. 무엇보다도 애정이 갔다.
지금껏 몰이사냥도 단일 보스전도 어느정도 해보았지만
연보라 퍼니쉬를 뿌리며 호쾌한 전투를 하는 이녀석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일을 마치고 컴퓨터를 켤때면 괜시리 콧소리가 났다. 



그러길 며칠 후...



인벤이 시끌거린다.매주 목요일쯤이면 항상 그랬기에 그리 이질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게시판에 자주 등장 않던 단어가 반복된다. 그리고 그게 신경이 쓰인다.
펠도무, 도펠, 퍼니쉬...

글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이전과 같이 항상 비슷한 논조와 격앙으로 물들어있던 그 글들이...
나도모르게 절로 한번씩 더 읽어 보게 된다. 결국 퍼니쉬 테섭 영상이 화면 속에 나온다.
이전에 보던 영상과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너프의 폭은 작지 않았다.
걱정에 불안해 하며 게시판을 뒤적이던 머리속의 혼란은 사라지고 뚜렷해 졌다. 
머리는 조용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놀랍고 당혹스럽다.
이런 일이 일어날거란것은 알고있었다.
트오세는 원래 그래왔으니...

그래서 펠도무를 키우기전 많이 고민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시작한 일이다.
내가 한 예상이 맞아야 하는건 아니다. 하지만 너무 의외였다.
그저 쌩뚱맞다는 표현만이 떠오른다.

혹여나 버그를 빙자한 너프가 시노비에게 있을줄만 알았던 내게
예상치 못하게 퍼니쉬가 버그로 매도되어 너프를 받았다.
기존의 사용방식으로는 쓸수없는 퍼니쉬가 되었다. 

조용하던 머리속이 다시금 빠르게 돌아간다.
여러글들을 통해... 며칠 안되었지만 나의 경험을 통해...
나의 펠도무에게 퍼니쉬 말고도 다른 대체 스킬은 있었다.
그 대체 스킬들이 버그픽스를 통한 버프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 중요치 않다.


내가 필요로했던 스킬이 이제 없다. 
아니 얼마간의 시간 후 패치로 없어진다.

그 스킬을 중심으로 준비해 오던 전사녀석이 길을 잃어버렸다.


매일 기쁘게 마주한 숙소의 녀석이 오늘은 반갑지 않다.
수녀원 앞에서 로그인 된 펠도무를 바라본다.
멍한 눈으로... 
안될걸 알면서도 애꿎은 수녀원 매칭을 몇번 시도해본다.
몇번의 팅김 후 다시 인벤을 본다.



BGM 음량0인 트오세가 윈도우 작업표시줄 밑에 깔려있다.
감춰진 화면에는 수녀원 앞에 덩그러니 서있는 펠도무가 있으리라...


그렇게 오늘 나는 예전과 같이 멍하니 인벤을 둘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