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아직 떠있었다

LW 블루. 한때, IEM 경기에서 우승했을때, 우리는 세계 최고의 팀이었다. 내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제 그 팀은 뉴욕 엑셀시어(NYXL)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고, 그들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팀이지만… 난 거기에 없다.

지난 8월, 나는 아무런 예고 없이 새벽 4시에 팀에서 방출되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새 계약서에 사인하고 새 유니폼을 위한 사이즈를 잰 지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고, 새 숙소에 들어온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상당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드셋” 지영훈 감독은 팀에 남아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자고 분명히 말했었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를 신뢰했다. 나는 그가 내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더 이상 숙소에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동이 틀 때까지 짐을 쌌고, 아침이 되자 숙소를 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서울에서 3시간 거리에 있는 광주의 부모님 집에 도착해있었고, 내 꿈과는 더더욱 먼 곳에 다다라있었다. 창 밖을 내다봤다. 해가 아직 떠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내 커리어에는 크나큰 타격이었다.에이펙스 시즌4 로스터 마감일이 지난 이후에야 지드셋이 날 방출한 거였기 때문에, 나는 오버워치에서 가장 중요한 토너먼트에서 완전히 제외된 상황이었다. 다른 팀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 몇 달동안 출전할 수도 없는 선수를 영입할 팀은 없으니까. 몇몇 에이펙스 팀들은 내게 마감일 전에 FA가 되었더라면 당장 영입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에이펙스 시즌4는 한국인 선수들이 오버워치리그 계약서를 얻기 위해 자기 어필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지만, 난 이름조차 내밀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심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지난 1년 나는 월급 없이 경기에 출전했고, 종종 자비로 경기장을 오고가야 했으며, 커텐 살 돈이 없어서 골판지 박스를 펴서 창문에 붙여놓은 숙소에 살았다. 진심으로 팀원들과 함께 게임하는 게 좋았기 때문에, 곧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참을 만 했던 상황이었다. 물론, 내 생각은 틀렸었지만.

“내가 지금까지 잘못된 선택을 해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그오브레전드를 접고 오버워치로 갈아타지 말았어야 했을까. 삼성 갤럭시에서 서포터 역할을 했을 때는 일이 그래도 프로페셔널하게 처리되었는데. 이미 너무도 오래 전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다시 게임을 바꿔볼까? 배틀그라운드에서는 상황이 나아질 지도 몰라. 아닐 지도 모르고. 모르겠다. 모든 게 말이 되질 않았다.

불러주는 팀들은 많았다. 오버워치 쪽에서는 코치직 제의, 입단테스트 권유 등이 들어왔고, 배틀그라운드 쪽에서는 도장만 찍으면 프로팀 입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난 완전히 탈진된 상태였다. 나는 결국 오버워치를 몇 달간 쉬면서 내가 정말 프로게이머로서 원하는 게 뭔지 고민해보기로 했다.



우리 아버지는 테레비전에서 스타크래프트를 보는 걸 정말 좋아하셨고, 나도 같이 보는 걸 좋아했다. 어릴 적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다. 그때 네다섯살 밖에 안 됐었지만,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덕분에 이미 브루드워를 볼 줄 알았다. 펜티움 4 데스크탑 컴퓨터가 2대가 있었는데 종종 같이 게임을 하곤 했다.

2003년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가 시작되었을 때, 바로 아버지와 함께 즐겨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프로토스 광팬이셔서, 우리는 항상 강민이나 송병구 같은 선수를 응원했다.) 스펙타클한 광경에 푹 빠져버렸다.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환호하는 관객석, 눈부신 조명 – 이렇게 신날 수가! 보기만 해도 전율이 흘렀다. 그때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고 처음 생각했던 것 같다. 무대에 서고 싶었다. 그 환호를 받고 싶었다.

오랫동안 그것은 꿈에 불과했다. 부모님은 내가 공부에 집중하길 바라셨고, 난 중학교 2학년 까지만 해도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전교 20등 정도는 하는 나름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프로게이밍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져만 갔고, 더 이상 말도 잘 안 듣게 되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몰래 피시방에 가기 시작했다. 걸려서 벌 받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갔다. 그때 나는WCG(WCG라는 것이 아직 존재했을 때)의 공식 이스포츠 중 하나인 로스트 사가라는 게임에 푹 빠져있었었다. 지역구 챔피언십에서 우승해서 새 모니터를 상으로 받고 집에 가던 기억이 난다. 큰 대회는 아니었고, 큰 상도 아니었지만, 대회의 설레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고등학교에 들어서는 프로게이밍에 대해 더욱 진지해졌고, 로스트 사가보다 훨씬 큰 이스포츠였던 스페셜 포스 2로 전향했다. 클랜에 가입하고 준프로 대회에 출전하면서 스페셜 포스 2 프로리그 입성을 꿈꿨다. 10년 전 내가 열광했던 바로 그 프로리그.

막 유명 팀들에게서 관심도 받고 프로리그의 문턱에 다다랐을 즈음, 스페셜 포스2의 프로리그가 폐지되었고 모든 스폰서가 물러섰다. 속상했지만 이스포츠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기에, 다시 리그오브레전드로 전향하기로 했다.

이때 부모님은 내가 고3임에도 불구하고 게임에 몰두하는 것에 분노하신 상태였다. 심하게 싸웠지만 내 마음은 이미 이스포츠에 굳어져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피시방과 장비 비용을 벌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했고, 계속 게임 실력을 키워나갔다.

결국, 아버지와 오랜 대화 끝에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고, 아버지는 엄마를 설득해 내가 전남과학대의 이스포츠학과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해주셨다. 그때부터는 일이 잘 풀렸다. 챌린저를 달고 아마추어 대회에서 이름을 알렸고, 위너스 소속이 되어 챌린저스 코리아에서 준우승을 하고, 결국 삼성 갤럭시에 영입되었다.

롤챔스에 입성했을 때, 그리고 리그에서의 첫 몇 주가 얼마나 행복하고 신기했는지 아직도 생각난다. 내가 우상으로 여겼던 선수들이 이제는 동업자들이었던 것이다. 결과는 좋지 못한 시즌이었다. 그 스플릿 우리 팀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나도 내 경기력에 만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스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아 우리를 보려고, 우릴 응원하려고 온 관객들을 내다볼 때마다, 예전의 그 전율이 느껴졌다.



최근에는 오버워치리그를 많이 보고 있다. 공부하려고 보고 있기도 하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앞으로 내가 뛰고 싶은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뉴욕 엑셀시어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복잡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친구들이 잘 되어서 너무 기쁘지만, 나도 인간이기에, 부럽고 아쉬운 기분도 든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에 머물고 싶지 않다. 나 자신과 솔직해지고 싶다. 내가 팀에 남았더라면, 뉴욕이 지금 이렇게까지나 잘 하고 있었을까. 결국 경험은 거기에서 무얼 얻어내는가가 중요한 거다. 난 그 사건을 나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고 더 열심히 하도록 자극을 주는 교훈으로 삼기로 했다.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팀을 찾고 있다. 지난 경력을 들먹거리면서 특별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양 행동할 생각은 없다. 지금 프로판에 있어서 내 위치가 어떤지 잘 모르겠다. 공식 경기에 출전한 지도 오래 되었으니까.하지만 나는 내가 과거보다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요즘 서브힐러보다는 아나나 메르시가 들어간 메인힐러가 내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메인힐러로 포지션도 다시 바꿨다. 다시 스크림을 본격적으로 뛰게 되면 정말 빠르게 성장할 자신이 있다. 서울, 인천, 북미, 유럽 어디던 갈 생각이다. 난 그저 출전하고 싶을 뿐이다.

오버워치로 돌아왔다. 지난 폼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고 팀을 구하고 있다. 다음 기회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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