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덥다..."

여름 아침의 출근길은 정말 싫다. 덥고, 피곤하다. 밤에는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는데다, 아침엔 일찍 일어나 아이들과 남편 밥차려주느라 정신이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아이들 유치원 데려다 주기는 남편이 해주니 망정이지... 버스정류장 시간에 맞춰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저 앞에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역시 러쉬아워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정류장의 그늘에 발을 들여놓는다. 버스가 올때까진 10분정도 남아있다. 잠시 그늘에서 땀을 식히는 도중, 낯익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누구더라. 그 사람이 전화기들 들어올린다.

"여보세요. 어, 여보. 무슨일이야?"

기억났다. 이도강. 예전 연인이다. 정장을 입은 모습이 왠지 어색하게 보인다. 예전에 볼때는 캐쥬얼한 복장에 약간은 치기어린 모습이었는데... 말이라도 걸어볼까.

"알았어! 물론이지. 응. 나도 사랑해!"

그만두자. 그나, 나나 이젠 둘다 결혼한 몸이다. 그래...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소문으로 얼핏 들었지. 살짝 한숨을 내쉰다. 그때의 여름에 느꼈던 감정들, 그 추억들이 가슴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예전의 난 꽤 드센 여자였다. 여장부란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어지간한 남자들은 내 기에 눌려서 말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그 탓인지, 내 주변에 다가오려는 남자는 별로 없었다. 아니- 그냥 없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가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줬었지.

"저... 전화번호좀 알려주실래요?"

혼자 영화를 보러 갔을때였지. 그때 꽤 많이 놀랬지. 약간은 겁먹은 얼굴.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겁먹었다기 보단 거절당하는걸 무서워했던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스운 이야기다. 어쨋든, 그와의 만남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서서히 그와 난 가까워졌고, 둘도 없는 연인이 되었지. 눈 앞에, 그때의 나날들이 펼쳐진다.

"해인아. 그거 들었어? 같은 혈액형의 연인은 끝이 안좋대."

"에이, 그게 뭐야! 그런 미신 안믿어 난.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도 우리 둘은 예외인거 같은데!"

"아하하하. 그래! 우리 둘은 예외지! 암."

나와 그는 해변을 거닐며 조잘대었다. 행복한 미소가 가득한 그의 얼굴. 내 얼굴도 그렇게 행복했을까. 해변을 거닐고, 하이힐도 벗어버린채 파도를 맞으며 서로에게 물을 뿌리고 장난치고...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석양이 주황빛을 바다위로 흩뿌리는 시간이 되었다. 나와 그는 해변가에 앉아있었지.

"해인아. 그때 기억나?"

"언제?"

"우리가 처음 만났을때."

"아하하하. 그때를 어떻게 잊겠어. 영화관이었지?"

"응. 솔직히 그때 나 좀 겁먹었었다?"

"왜?"

그는 잠시 뜸을 들였었지.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는 고민이었던걸까.

"솔직히... 그때 너 좀 드셌거든. 그런 오라가 풀풀 풍겼었어. 뭐라고 하나, 거친 야생의 늑대소녀? 뭐 그런 분위기같은거."

"...그건 좀 아니지 않아?"

"뭐, 좀 과장이 있긴하지. 근데 말이야, 지금 보니까 너 굉장히 부드러워졌어."

"후후후. 누구누구의 사랑의 레슨때문 아닐까."

"그게 뭐야! 하하하하!"

그때만 해도 처음 만났을때의 마음과 변함이 없다고 여겼었는데... 다음 해 여름에도 도강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다. 뭐, 결국 안되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때 도강이 말했던 말, 그러니 같은 혈액형 운운하던 이야기가 맞는거 같다. 그리 깔끔한 이별은 아니었으니.

그때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난걸까. 그때는 나도 어렸고, 그도 어렸다. 열정에 가득차서, 하루하루 사랑과 행복으로 충만한 나날을 보냈었지. 지금은 서로 가족이 생겼고, 정장을 입고 정신없이 출근, 일, 퇴근...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는데 말이야.

그가 버스에 탔다. 나와는 다른 버스. 그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져간다.

"잘 가요. 잘 있어요.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변치 말아주세요."

가족과 통화를 하며 웃는 모습. 그래. 내가 그에게 반했던건 그 웃는 모습때문이었을거야. 정말 해맑고, 멋진 웃음이었어. 너무나도 순수한 빛이 나는, 그런 멋진 뭇음. 정말 좋아했었는데.

그하고 헤어지고 나선 정말 한동안 밥도 제대로 못먹고 슬퍼했었다. 핸드폰을 옆에 두고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었지. 핸드폰의 벨이 울리면 혹시나 그가 다시 전화한걸까, 기대를 하며 핸드폰을 열었지. 하지만 끝끝내 연락은 오지 않았지. 그때 이후로 한번도 연락도, 보지도 못했었는데. 어느새 우리들, 이렇게 자라고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생겼다.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여름날의 내 모습,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 화장도 하지 않은 나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던 그의 모습. 해변의 파도가 한번한번 칠때마다 나와 그의 모습은 반짝이는 빛의 가루로 변해서 허공으로 사라져간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나와 그의 모습은 어느덧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퇴근하면 그와 찍은 사진이라도 찾아봐야겠다. 후후. 남편은 좀 질투하려나. 그래도, 소중한 추억이니 말이지...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아. 버스가 왔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버스에 올라섰다. 창밖을 내다보며, 작은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부디 건강히 지내길 빌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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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일상, 추억 등으로 단편집 써보려고 하거든.


일상, 추억등은 뭔가 할 수 있을 듯도 한데 로맨스에 대해선 감이 안잡혀.

뭐라고 할까, 내가 느끼질 못하겠으니, 현실성. 즉 독자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못만들겠다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