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저 - 시크릿 (네이버 지식인- 계급 바람신)


첫째는 역사 기록 자체에 대한 의문입니다. 우선 역사 기록 자체가 왜곡되고 편향될 가능성이 크다라는 것인데요. 이는 일제강점하 우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종 순종 실록이 그 예죠. 춘추관에서 조선인들에 의해 편찬된 것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에서 일본인 그리고 친일파들에 의해 작성되었기 때문에 매우 편향적이고 왜곡된 기록이 많다가 그 이유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도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문벌귀족, 김부식이 신라중심 사대적 보수적 입장에서 역사가 서술되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백제나 고구려 입장에선 그 정보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질문입니다. 이런 역사적 기록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판별해 낼 수 있는건가요? 지금 초중고등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 더 나아가서 대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진실에 가깝다고 확언할 수 있는건가요?


째는 일제 식민사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 식민사관의 영향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나요?


진지한 질문 감사드립니다. 첫째와 셋째에 대한 일부 답변입니다.


결국 해방이후에 식민지 유산을 극복했는가의 문제입니다.


식민지 유산 Colonial Legacy

식민지 정부는 전통적 사회 정치 제도를 파괴하고 그들의 제도를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정신도 또한 파괴했다. 고대사와 관련된 이상주의를 연구할 때는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중국과 일본은 역사 문서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중요 역사가들도 한국의 중국 지배와 아시아 역사에 관해 역사적 사실과 내용을 왜곡하였다.

20세기 식민지 시절에 한국사의 파괴와 왜곡은 중국과 일본 정부 및 학자들에 의해 각각의 국가적 영광과 국익을 위해 자행되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한국 역사가 중국과 일본 역사보다 오래되었음을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일본과 중국은 계속 실제 역사를 왜곡하였다. 출처 : 아시아 이상주의 (이홍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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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범 오바마 정부  명예장관 (키친캐비넷) ,아시아이상주의 저자


Dr Hong beom Rhee speak about Korea history (10분) → https://youtu.be/6u8-trfOyrM


식민지 유산 무엇이 있을까요?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  배웠던 동요들이 있습니다.


1) 일본 동요와 일본식 동요

'학교종이 땡땡땡/어서 모이자’
'숨바꼭질 할 사람/여기 붙어라’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잠잔다/잠꾸러기’
'쎄쎄쎄 아침 바람 찬 바람에/울고 가는 저 기러기~’
'또옥똑, 누구십니까’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께 새집다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똑똑 누구십니까?’,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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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 아는 노래들 많으시죠? 일본 음계 혹은 일본 노래 개사곡임을 모르고 부르는 동요들입니다. 지금도 배우고 있는 노래들도 있다고 하네요


[특강] 한국인의 음악감성과 전통세계 노동은(중앙대 국악대학 교수) https://youtu.be/Cbw7bpXbkZM 17분 ~ 5분 정도 보시면 <요나누키 음계> 나옵니다.


2) 남대문은 왜 국보 1호가 되었나?


숭례문을 조선 보물 1호로 지정한 것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4년 조선총독부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가 숭례문을 통해 한양에 출입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고 합니다. 이 주장은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 성곽 정책을 연구,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 가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제기됐습니다.


오타 히데하루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 정책〉에 의하면, 1904년 9월 이후 1908년 12월까지 조선군 사령관으로 근무한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 1850~1924]가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을 헐어 버리려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요미우리신문 주필을 거쳐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1864~1924)는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출입한 문입니다. 조선 출병(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남대문 외에 두세 개밖에 없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라며 설득했고, 하세가와 사령관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보존된 것이라고 합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 지정 번호를 그대로 답습하여 숭례문을 ‘국보 1호’로 다시 지정했습니다.

국보의 번호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1호의 의미는 남다른거 아닐까요? 우리가 얼마나 일제의 잔재를 청산했을까요?


우리나라 흑우( 현재, 일본 와규라는(검은소)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칡소를 제외하곤 여러종류의 생존했던 소들은 일제강점기 때 없어 진듯하다. 그리고 후반쯤에 일제가 조선의 소는 황색 소로 일축 한다라고 정한걸 강점기떄 그당시 체계를 우리나라 70년대 후반에 정부가 그대로 사용하는걸 볼 수 있다. 거기에 사라진 조선의 흑돼지도 있다. 지금 유전자 복원으로 살려 냈지만, 그당시의 완벽한 조선의 흑돼지는 아니다. 유전자를 선별하고 또 선별해서 그당시와 비슷한 흑돼지를 복원 하였다. 토종 개들도 마찬가지다  


남대문과 동대문은 일제의 전승기념문 https://youtu.be/X76kuygQo_A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 역사


이런 것이 바로 청산해야할 식민지 유산입니다. 역사는 어떨까요? 정말 안타깝게도 해방은 되었으나 우리 역사는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1910년부터 한국 고대사를 말살하기 위해 수십만권의 사료를 수거해 폐기해버리고, 38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35책 2만4천쪽에 이르는 <조선사>를 새로 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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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의 조선사 편수회 조직 (1분) https://www.youtube.com/watch?v=GSv0gyHZmqI


‘조선사’ 의 발간 목적은 고조선부터 역사책에서 지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보다 앞서는 한국사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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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밑에 많은 사학자들이 배출됐는데 그중 한분이



쓰다 소키치,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 스에마쓰 야스카즈 등 일본 사학계 주류를 형성한 식민사관 창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학문적·인격적 스승으로 떠받들었고 있는 우리 학자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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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 등재된 이병도. 왼쪽은 수사관보 시절의 이병도, 오른쪽은 촉탁 시절의 이병도


식민사관 창도자들과 연줄을 통해 도제관계로 엮인 한국사학계의 태두인 서울대 인맥의 이병도와 고려대 인맥의 신석호, 동국대 인맥의 이기동, 서강대 인맥의 이기백 등 주류 사학계의 내로라하는 '사단'은 여전히 스승들에 대한 의리를 굳건히 지키며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밑에서 편수관 보좌를 하여 식민사학자가 된 이병도(李丙燾)는 광복 후 서울대학 교수가 되어, 조선사 35권을 중심으로 국사대관(國史大觀)을 편찬하여 대한민국 국민을 가르쳤습니다.


또 한명이 있습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수관으로 한국사 말살에 참여했던 신석호가 광복 후 1946~1949년까지 3년간 국사관의 초대 관장을 맡았고 1949~1965년까지는 문교부 장관 겸직으로 관장에 재직했습니다. 일본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편수관 출신이 거의 20년 동안 대한민국 국사관의 초대 관장을 맡아 한국사 연구의 초석을 놓았으니 한국사가 식민사관의 연장선상이 되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광복 70년이 되었는데도 한국사 교과서가 일제 식민사관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장으로 국정교과서 편찬을 주도하고 있는 김정배는 신석호 제자입니다.  노태돈은 이병도의 제자입니다.  조선사편수회 출신 신석호와 이병도의 인맥이 현재 국사편찬위의 위원으로 포진해 있습니다. 과연 국정교과서에도 지금과 같은 인적구성이면 바뀔 수 있을까요? 지난 70년 동안 이병도, 신석호 계열의 조선사편수회 학파가 국사편찬위의 주도권을 장악해왔습니다. 그러니 바꿀려고 해도 바꿀수가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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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세금 50억 꿀꺽... 본색 들킨 식민사학 (2015.4.17 국회) https://youtu.be/n5jKjRw3t8k


또한 그 사람들이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니 동북아역사재단도 내놓은 결과물이 모두 동북공정에 기여하고 일본 극우 침략사관에 기여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영상]


1) 글로벌 한국사 복원(이덕일 강연 2015년 5월) : 조선총독부 사관의 극복 https://www.youtube.com/watch?v=86kSHll1N6Y


2)  길거리 역사 특강 이덕일 11월 1일 : 현재 교과서와 학계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https://youtu.be/XOUclZGepU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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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한국사 교과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조선총독부 사관의 프레임이 그대로 남아있는 우리 한국사 교과서


식민사관의 핵심 이론은 한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는 두 가지 관점으로 귀결됩니다. 일제는 한국사 시간을 축소하기 위해서 단군 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을 한반도 북부로 가둬 놓았습니다.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허위로 몰아서 한국사를 1500여 년의 짧은 역사로 축소시켰습니다. 일제는 한반도 북부가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한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강변함으로써 식민지는 너희 한국인의 운명이니 받아들여라는 메시지를 주입하여 독립의지를 말살시키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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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식민사관의 핵심 논리를 좀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단군신화


"단군조선은 학술용어가 아니니 재단은 단군조선 용어를 쓰지 말라“
 "동아시아 문화지도를 제시하여 고조선의 특별성을 약화시키자" (2011년 7월 '한국고대역사지리 7차 토론회 동북아역사재단 편찬위원)


2015년 현재에도 주류사학계 교수들은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오늘 사퇴한 최몽룡 교수의 기사를 보시면 아시겟지만 이병도의 후예입니다. 그는 고조선은 나라가 아니라는 깜짝 발언을 JTBC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했습니다. 그의 최근 논문을보면 단군왕검이 아니라 위만조선부터가 실제 우리나라 첫나라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주류사학의 사관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다른 학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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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우리의 역사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데 우리는 왜 지키려 하지 않는가?


웅녀와 웅씨녀의 차이

초디 환웅천황이 동방 백두산으로 문명을 개창할 무렵, 백두산에서 송화강에 걸친 만주 일대에는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어렵 생활을 하며 굴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범을 토템으로 하는 호족은 남권男權 중심의 부족으로 사나우면서 약탈에 능했고, 곰을 토템으로 하는 웅족은 여권女權중심의 부족으로 어리석고 고집이 세었습니다.


당시 환족이 발달된 문물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던 웅족과 호족은 자신들도 밝은 백성[桓族]이 될 수 있기를 환웅께 간절히 청하였다. 이에 환웅은 신교의 가르침으로 두 부족을 포용하고자 그들에게 햇빛을 보지 말고 100일을 기원하면 인간답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내려주었습니다.

환웅이 내려주신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달래 스무 개를 먹으며 웅호 두 족속은 수도생활에 들어갔는데, 호족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고 웅족 여인은 굶주림과 추위를 참고 계율을 지킴으로써 '21일(三 · 七日)'만에 삼신의 광명의 도를 깨우쳐 마침내 참된 인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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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환웅이 동방문명 개척단과 웅 · 호족의 결합에 관한 고대역사가, 외래 종교에 찌들어 있던 고려의 승려 일연에 의해 곰과 호랑이의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한 기도 운동'이라는 유치한 신화로 윤색되어 버렸다. 그 뒤,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더욱 근본이 부정되고 엉뚱하게 해석되어 '한민족의 뿌리사'가 지금까지 왜곡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단군신화는 일제시대 일본이 만든 용어입니다. 단군신화라는 말로써 단군은 신화속 인물이 되고 고조선은 상상의 나라가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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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를 없애버린 조선사 편수회 발간 조선사의 비중.현재 교과서에서 고조선이 2쪽도 되지 않는 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


20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존속했던 나라가 고조선인데 얼마나 강력했던 나라겟습니까? 어떻게 통치를 하길래 이천년을 가겟습니까? 그걸 못믿겠다고 고조선은 멸망하기 직전에 국가체계를 갖추었다고 하는데 지금 학계의 얘기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은 유물유적이 나오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위만조선의 문제


위만은 연나라 사람입니다.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조선(정확히는 번조선)의 준왕에게 투항하였다가 1년뒤에 세력을 키워 준왕을 친 ...어떻게 보면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중국 사람인데 준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투항합니다. 이 위만이 철기를 들고와서 우리나라 철기가 발전했다는 논리가 우리 교과서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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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 조선이 철기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중앙 정치조직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록을 교과서는 기술하고 있을까요?


위만정권에 대한 평가
- [사기]에서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안정복(1712~ 1791) 동사강목에서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다'
-  임시정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1858~1932)은  '한명의 강도에 불과하다'
- 단재 신채호 선생 '(위만조선은) 우리의 변강 침략사로 다루어야


종래 우리 국사학계에서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동일한 지역(한반도 북부)에서 차례로 교체된것으로 가르쳐왔으나 위만조선은 한낱 '변방침략'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만이 있어야 한사군이 있습니다.
위만조선이 존재해야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는 역사기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위만을 꼭 넣는겁니다. 위만과 위만의 수도였던 왕험성은 평양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한사군 한반도설이 성립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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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위만정권의 위치입니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을까?
우리 교과서는 한사군 한반도설을 한번도 놏친적이 없습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는데 한반도 북부에 설치했다는 겁니다. 그중 핵심인 낙랑군은 평양땅에 대동강유역에 설치했다는 겁니다. 이걸 확고히 하기 위해서 낙랑유물발굴단을 일제가 만듭니다. 그리고 가까 유물을 넣었다가 파내기를 반복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점제현 신사비입니다. 낙랑군에는 25개 현이 있습니다. 이걸 입증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낙랑군 점제현이라고 적힌 신사비를 조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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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아래에서 비석을 떼어다가 배에 싣고 와서 대동강유역에 비석을 세우고 지나가는 아이를 불러다가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선 거기가 점제현이라고 널리 알리는 겁니다. 70년대까지 국사교과서에 점제현 신사비가 실렸습니다. 낙랑군이 거기에 있었음을 알리는 지표가 되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요? 그게 사기라는 것이 북한학계를 통해서 밝혀지고 우리나라 연세대 손보기 교수도 우리나라에서 나는 재료가 아닌 비석에 의문을 품고 거짓임을 밝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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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학계는 위조 여부를 조사하거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냥 묻어가느 겁니다. 침묵하면서 점제현신사비를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2015년 4월 17일 국회 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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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비에 대해서 그 진위여부가 현재 연구가 진행되지는 않고 있다는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위원의 답변. 학계는 위조 여부를 조사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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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저 국사 교과서 (일조각 1970년대)

낙랑이 420년간 이땅에 존속하였다는 글의 느낌을 보십시오. 식민지가 되어서 우리가 계몽되니 좋다는 느낌을갖게 하는 글입니다. 점제현 신사비를 통해서 낙랑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고 사진까지 실었습니다.



또한 나왔던 유물들의 조작가능성을  발표한 방송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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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SBS 스페셜 '역사전쟁-금지된 장난, 일제 낙랑군 유물조작' https://www.youtube.com/watch?v=1L1QYO1g27Y

** 다시 올린 주소네요. 어디선가 SBS채널의 내용을 블라인드 쳐버렸네요.


낙랑군의 25개현이 있는데 그 지명은 단 하나의 지명도 한반도에 위치하게 나타난 문헌이 없습니다. 오히려 중국 요동지방 요서지방 낙하 북경 등으로 나타나는 지명이 수두룩 합니다.


*『漢書』「薛宣 열전」‘師古曰:「樂浪屬幽州」
(『한서』「설선 열전」, 사고가 말하기를 “낙랑은 유주에 속해있다.)
*『後漢書』「崔駰 열전」, 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 .
(『후한서』「최인 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後漢書』 「光武帝 本紀」 ‘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후한서』「광무제본기」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요동에 있다.)
☆『史記』 「夏 本紀 太康地理志」,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사기』「하 본기 태강지리지」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晉書』「地理志」樂浪郡조-遂城:秦築長城之所起
*『明史』 「地理志」 永平府 : 昌黎-西北有碣石山.東南有溟海)(『명사』 「지리지」 영평부 조, 창려 서북에는 갈석산이 있고 동남에는 어두운 바다가 있다)


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사서 하나도 없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72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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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한다면 위와 같은 지도가 성립합니다. 현재 한나라(han dynasty)를 검색하면 이런 지도들이 수두룩 나옵니다. 이 지도로 동북공정은 성공한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것을 우리가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8개의 검인정 교과서가 있지만 대부분 비슷한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태조왕(재위 53∼146년), 백제는 고이왕(〃 234∼286년), 신라는 내물왕(〃 356∼402년) 때 고대국가가 형성된 것을 내용으로 하는 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교과서가 거의 비슷합니다. 국정교과서일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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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국조는 나오지 않고 100년에서 300년이 지난후의 왕들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고구려는 1세기쯤 태조왕 때 이르러 한 단계 높은 국가 발전을 이루었다”,
“3세기 (백제의) 고이왕은…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적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4세기 후반 (신라의) 내물왕은 밖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이고 … 김씨의 왕위 세습권을 확립하였다”


 삼국에 대한 설명은 건국의 시기(고구려, 백제, 신라 각 기원전 37년, 18년, 57년)와 시조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고대국가의 본격적인 발전 시점을 늦춰 잡음으로써 고구려는 건국 후 약 90년, 백제는 약 250년, 신라는 약 400년 정도가 ‘암흑기’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입니다.


여기에는 학계의 정설처럼 되어 있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불신론은 쓰다 소키치 등 일본의 학자들이 일제강점기에 정립한 이론입니다.  한마디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 삼국의 기록은 허구이며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불신론은 4세기 중·후반 한반도 남부를 고대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한 일제학자들의 ‘창작물’입니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는 강력한 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고 우겨야 임나일본부의 존재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해방이후라 임나일본부설을 우리 교과서에 넣지는 못하지만 임나일본부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장치인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불신론은 여전히 우리 교과서 속에 남아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그리고 낙랑국을 물리친 대무신왕도 배워야 합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정복군주였으면 무신왕도 아니고 대무신왕이라고 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왕들은 태조왕 (6대)이전이기 때문에 다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를  다시한번  정리해보겟습니다.


- 고조선 역사는 인정못한다.
- 단군은 신화다.
- 위만조선이 정통성을 이었다. 한나라에 멸망당했다. 
- 한사군 한반도설 :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을 한반도내에 설치했다.
- 임나일본부 : 4세기에서 6세기 2백년간 한반도 남부는 왜가 점령했다.

->일본역사보다 한국사가 짧다. 고대로부터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의 연속이었다.


첨부 이미지 최근 몇년새에  발간된 식민사관 관련 책들입니다. 얼마나 식민사관이 청산이 안되었으면 이런 책들이 나와야 하는  것일까요?


 이 중에 먼저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면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덕일) - 엉터리사학자 가짜고대사(김상태) -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황순종) 정도를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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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한민족 고유 사서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둘째는 역사 기록의 존재성에 대한 의문입니다. 제가 가장 궁금한 점은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고려왕조실록이나 신라 역사서 <국사> 백제 역사서 <서기> 등 고대 중대에 관한 책들의 보관 위치가 명시된 자료가 하나도 없는건가요? 왜 현존하지 않다고 단정짓고 지금 발견된 역사서만 가지고 나머지 퍼즐조각을 유추하는 건가요? 세간에 떠도는 말을 보면 중국, 일본이 자국에 불리한 진술이 담긴 역사서는 감춰두고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클까요 거짓일 가능성이 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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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우리 역사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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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문입니다. 2면과 3면은 다 긁어버렸죠? 저기에 사실 광개토태왕이 일본 본토까지 정벌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저기는 한두글자로 조작할 수 없어서 완전히 긁어버린 것입니다. 현재 2015년 일본의 교과서에는 광개토태왕비문을 집어넣서 임나일본부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는것처럼 활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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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니시류라는 일본의 식민사학자가 석유환국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석류환인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조작한흔적이 완연하니다. 삼국유사는 석유환국이라고 쓰여 있는 판본과 석유환인으로 쓰여진 판본이 공존했는데 환국이라고 쓰여지면 국가가 있었다는 것이 됨으로 그런 본을 아예 싹을 없애버릴려고 한것입니다.


일본의 조작은 이렇듯 비열하기 짝이 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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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우리 사서 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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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권을 가져갔습니다. 불태우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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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박문이 조선총독부를 은퇴하고 일본으로 올 때, 조선왕실의 기증이라며 규장각 사서를 몇 수레나 일본으로 가져왔다. 일본 전역에 5만여권의 한국 고대사서가…
<한국사 레이타쿠대 후지모토 유키오교수>


최근 다큐입니다. 일본학자가 얘기하길 약 3천종이 일본에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왕실도서관에 우리 사서들이 보관되어있다는 얘기가 있지요. 그리고 일본 고서점에도 어느정도 있다고 합니다.


조선사 편수회 차입 사료 약 5천종
조선사편수회에서는 1923년 부터 1937년까지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이라고 1938년 발행된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대마도 섬 하나에서만 고문서류 6만  6천 매 3천 오백권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 탐방하여
한국과 관계가 있는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고기록류 3천 576책,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했다 (일본학자 하라타 사카에루 '역사와 현재 1981년 4월 25일)


섬하나에서만 이정도입니다. 일제가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서 얼마나 많은 책을 가지고 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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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우치 총독도 지혼자 이렇게 많은 책을 약탈해 갔습니다.


한민족 고유사서들의 소실 과정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지금 그 자취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시대판 국정교과서 사건 ?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릴 수 있는 사서들을 수거하라

유학,유교와는 다른 사서들을 수거라라


유학자들은 역사교육이 다양한 관점으로 시행될 경우에는 자신들이 사회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담은 획일적 역사교육이 시행되어야만 자신들이 사회를 통제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 정부를 압박했고 유교주의 역사교육을 획일적으로 시행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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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은 세조 3년 5월 26일자(양력 1457년 6월 17일자) <세조실록>과 예종 1년 9월 18일자(1469년 10월 22일자) <예종실록> 등에서 확인됩니다.


이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고조선비사><삼성기><삼성밀기>를 포함한 다수의 서적을 금서로 지정하고 이 책들을 몰수했습니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금서를 숨긴 자는 참수형에까지 처했습니다. 금서를 불태우고 지식인들을 구덩이에 매장한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유사한 일이 조선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금서가 된 책들은 거의 다 고조선과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바룬 사서들과 신선교(도교,선교,신교)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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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책들이 사라지게 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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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전에 수서령을 말씀드렸습니다. 세조부터 성종까지 우리민족의 뿌리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서들을 모두 거두어들입니다. 숨기는 자는 참형에 처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들이 왕실 도서관에 모여있었겟지요.


그런데 이 책들이 모인 곳을 볼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분이 있습니다. 일십당 이맥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이 이 책을 보고서 한권의 책으로 모으게  됩니다. 요즘 말로 데이타베이스화한 것입니다. 그책이 바로 태백일사라는 책이고 .. 이 태백일사는 1911년에 발간된 환단고기라는 책의 60퍼센트를 차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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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관변사학자 이마니시류(금서룡今西龍)도 자신의 저서인 <朝鮮古史の硏究>의 <단군고檀君考>에서 <이조李朝 태종太宗 왕조실록王朝實錄 12년 條에 열기列記된 신비집 神秘集*고조선비사 古朝鮮秘詞*대변설 大辯說*조대기 朝代記*주남일사기 周南逸士記*지공기 誌公記*표훈천사 表訓天詞*삼성밀기 三聖密記*안함로 원동중 삼성기 安含老 元董仲 三聖記*도증기 道證記*지이성모 智異聖母*하사량훈 河沙良訓*문태산 왕거인 설업 등 삼인기록 文泰山 王居仁 薛業 등 三人記錄*수찬기소 일백여권 修撰企所 一百餘卷*동천록 動天錄*마슬록 磨虱錄*통천록 通天錄*호중록 壺中錄*지화록 地華錄*도선한도참기 道詵漢都讖記 등의 서적들이 왕씨고려시대王氏高麗時代에 서운관書雲觀을 중심으로 하여 많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서적들이 고려시대로부터 이조李朝 初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연유하여 도가(道家-선가仙家)에 의하여 저술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스스로 피력하고 있다(동서同書 53p) 


이 책들에 관해서는 이마니시류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 책들을 어떻게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일본왕실도서관으로 실어날랐을 가능성이 높고 어느정도는 불태웠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통해서 <일본인을 위한 조선사>를 만들어서 조선을 영원히 통치하려 했는데 일본보다 오래된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드러내는 사서들을 가만둘 리가 없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책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일제강점기가 된 바로 다음에 1911년 운초 계연수 선생이 다섯권의 책을 모아서 한권의 책 환단고기로 30권을 발간합니다.


환단고기를 편찬한 운초 계연수 선생


운초 계연수 선생은 1864년에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만큼 기억력이 뛰어났습니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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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습니다. 1897년 (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천부경요해』등을 간행하였습니다. 이 중 『단군세기』와 『참전계경』,『태백일사』는 1911년에 간행한 『환단고기』에 다시 수록되었습니다.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해 5월 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심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그 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두 달 후에 이기 선생이 돌아가시자, 계연수 선생이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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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은  이기 선생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

에 범례凡例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습니다.  서문(凡例)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진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1943)와 오동진(1865~1930)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 에서 『환단고기』30부를 간행 하였습니다.


환단고기 저자와 전수과정(2분) →  https://youtu.be/Osv4qvdBifA


1911년 환단고기의 간행
“『환단고기』가 편찬, 간행된 것은 조선이 일본에 망한 후 1년이 지난 1911년입니다.   범례에 ‘기궐剞劂’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목판에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환단고기』가 이유립이라는 인물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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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 선생은 1907년생으로서 해학 이기의 제자이자 계연수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13세 때 삭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계연수를 위시하여 최시흥, 오동진 등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특히 교육운동에 뜻이 있어 33세 때에는 신풍학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1948년 남한으로 월남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남북한 간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아 북한을 두어 차례 더 왕래하였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내려올 때 『환단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때 사용했던 교재가 『환단고기』였던 것입니다. 이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종현梁宗鉉 씨가 필자에게 직접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양씨는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유립 선생에게 사사했던 분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은 1976년경에 분실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유립은 월간 『자유』지를 운영하고 있던 박창암 장군(1923-2003)의 도움을 받아 의정부에 살고 있었는데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걸로 착각하고 집세 대신에 이유립 선생의 책들을 모조리 팔아버린 겁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환단고기』 원본이 사라지는 바람에 『환단고기』 위서론이 나오게 된 것이죠.”


물론 원본이 사라진 때문만은 아닙니다. 위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지금 학계는 해방이전의 조선총독부 사관을 고수하고 있기때문에 ....그와는 완전히 다른 역사서가 나오게 되니 위서로 몰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환단고기를 공부해보면 환단고기가 진서이고 사료가치가 대단히 높은  역사서임을 단번에 알수있습니다.


환단고기 원본의 분실과 보존

 

환단고기』가 분실되기 전 이유립 선생의 제자 가운데 오형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형기는 이유립 선생보다 10년 정도 연배가 젊은 사람이었는데 이유립 선생이 오형기의 형과 친한 터라 그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양종현 씨가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오형기가 이유립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를 빌려가 필사를 하게 됩니다. 오형기 말로는 이유립 선생이 자신에게 『환단고기』 정서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양종현 씨 증언으로는 오형기가 그 책을 필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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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자 이유립 선생이 허락하여 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형기도 그 책이 대단한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권 소장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요.

 오형기 이분 덕에 『환단고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어요. 1979년에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환단고기』는 바로 오형기가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을 간행한 것입니다. 출판을 했던 사람은 이유립 선생의 문하에 있던 조병윤으로 스승의 허락도 없이 간행한 터라 이유립 선생이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가 필사본에 쓴 발문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이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아 1983년에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한 『환단고기』를 다시 간행했습니다. 배달의숙본이 나오기 바로 전해에는 가지마 노보루(鹿島昇)라는 일본인 변호사가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는데 이 일본어본이 역으로 국내에 수입되어 한국사학계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조병윤이 간행한 광오이해사본과 이유립 선생이 간행한 배달의숙본 모두 한문 원문만 실려 있는데 이후 여러 출판사들에 의해 『환단고기』 번역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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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환단고기가 출간되게 된 과정은 아주 명확합니다.


왜  우리 역사 교과서에 언급조차 없나.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서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습니다. 이 두 사서가 중요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편 사서 집필에 있어 사대주의적 관점이나 신라중심의 서술 등의 문제점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삼국사기의 사대주의

-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불손하여, 임금께서 장차 토벌하려고 했다.
- [삼국사기,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기록 중]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650년 진덕여왕 4년] . 김부식은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격하시켜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는 기존의 사서와는 다른 파격적인 내용과 상세한 기술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내용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고조선의 성립 기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라든가 47대에 이른 단군의 명칭과 재위년도 등은 고조선을 지금으로부터 겨우 2,700년 전에 건국된 청동기 시대 부족국가로 보는 식민사학의 논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역사학계에서 볼 때 『환단고기』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 가치를 폄하하고, 『환단고기』의 허점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고 침소봉대하여 『환단고기』 전체를 근세에 지어낸 책이거나 조작된 책으로 낙인찍으려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위서로 판명났다는 등으로 치부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위서론의 주장들
강단사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환단고기』 위서론’이라고 부릅니다. 위서론이라고 하면 무언가 학술적인 이론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논리적 관점이나 학술적 논증이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해 온 『환단고기』 역주본 작업을 마무리 지으면서 지금까지 학계에서 발표한『환단고기』 진위 논쟁에 대한 세미나 자료와 논문, 서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체계적으로 점검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위서라는 주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환단고기』의 소중한 가치가 정말 부당하게 흠집이 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주류 강단사학계가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위서론자들은 책 제목인 『환단고기』의 뜻조차 모르고 있으며, 『환단고기』를 단 한 번도 깊이 있게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불선 경전을 비롯한 동북아의 고전과 인류의 시원 종교인 신교의 우주론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위서론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환단고기』는 조작된 책이라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범례에서도 나오듯이 이 책은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입니다. 『환단고기』를 이유립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 발문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유립의 제자 양종현은 원본 책을 직접 본 사람인데, 책의 제목이 ‘『환단고기』’라고 분명히 증언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 방대한 역사적 내용들을 시기적으로 정합할 수 있도록 창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둘째,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환단고기』에 근대 술어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국가·문화·평등·자유·헌법·인류·세계만방·산업 같은 근대용어가 쓰였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는 최근세에 쓰인 책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서에 현대에서만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면 당연히 그 저술 연대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근대술어라는 것이 고대에도 사용된 전거들이 무수히 발견됩니다. ‘문화’나 ‘인류’는 최소한 1,600년 전부터 고전에서 사용되었으며, 구마라습鳩摩羅什의『금강경』에는 ‘평등’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주역』에서는 ‘국가’, 전국시대 역사서인 『국어』에서는 ‘헌법’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을 돌이켜보면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와 다소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시원 역사,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韓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계연수가 처음 펴낸 후 70년이 지나 이유립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환단고기』를 다시 펴낼 때 가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도적인 조작과 첨삭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꼭 이뤄져야 할 보정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보정도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아주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넷째, 후대의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사서들을 표절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는 자명한 것입니다.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還至 17세손世孫’에 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 특히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구려 900년 설’의 진실은 오직 『환단고기』와 대조,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섯째,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라는 『세조실록』의 기록은 보지 않고 그보다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합니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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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만 지적하더라도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양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태도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꼬투리를 잡다보니 ‘잠청배’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잠청배는 원래 이암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인데 원나라 간섭기 때 고려 인물로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과 류청신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위서론자들은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하여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 지식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낸 주장입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입니다.”

환단고기 진서론

진서론이란 말이 어폐가 있는데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정통 역사서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체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 뿐입니다.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굳이 증명하라고 한다면 중국, 일본, 중동 등지의 고대사 역사 현장을 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곳을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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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보면 『환단고기』는 진실이 가득 찬 역사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과 인류의 잃어버린 태고 역사를 되찾아 줄 유일한 역사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최근 중국 정부에서도 인정한,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문명이자 동북아 창세시대의 문명인 홍산문화(일명 ‘발해연안문명’) 유적지에 가본다면 『환단고기』의 내용이 유물과 유적으로 증명됨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위서론자들이 그곳에 가봤는지 물어보고 싶네요.

물론 위서론이 하도 판을 치니까 여러 학자들이 그에 맞서 『환단고기』의 내용을 검토하여 진서임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를 진서론으로 부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몇 가지 주장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먼저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을 지금의 과학을 통해 증명한 것입니다. 천문학자인 박창범, 나대일 두 교수는 천문현상기록을 근거로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입증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시대에 일어난 천문현상에 관련된 기록만도 12회나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기록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BCE 2333년까지 역추적하여 실제 일어난 자연현상과 사서에 나타난 기록을 과학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사서의 기록이 진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한 예가 BCE 1733년 흘달屹達단제 50년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기록입니다. 오성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5개 행성들이고, 루는 24수 중의 하나로 그 주성主星은 양자리의 베타별(β Aries)입니다. 그 두 과학자들이 검증한 결과 BCE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태양으로부터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 등이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 장관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고, 또 한 번은 1953년 2월 25일 새벽에 한 번 있었다고 합니다. 행성결집현상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인데 이를 감안해 볼 때 단군조선 때의 기록은 1년 차이지만 주목할 만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 29세 단군 마휴 9년(BCE 935)에 “남해의 조수가 석자나 물러났다[南海潮水退三尺].”이라는 기록이나 일식기록에 대한 기록도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검토는 『환단고기』가 최근에 저술된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명백한 반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그 내용이 유물로 입증된 사례도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장수왕의 연호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이 1915년에 발견된 불상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서 입증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건흥 연호가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역사기록의 진실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를 과학적 용어로 검증이라고 합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밝혀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됩니다.

천남생묘지 비문도 그러한 예가 될 것입니다. 천남생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의 큰 아들입니다. 그의 묘비명이 1923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 할아버지 태조, 증조부 자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태백일사』가 『조대기』를 인용하여 밝힌 기록과 일치합니다. 이 책은 여기에 남생의 고조부, 즉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 17세손’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환단고기』를 보면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됩니다. 『환단고기』에는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제1세 해모수(BCE 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추모(고주몽, 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몽의 선조는 해모수이며 그로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7세가 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도 광개토대왕비도 모두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환단고기』가 해명해준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환단고기』가 후대의 창작이 아닌 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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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알려주는 여러 증거들이 『환단고기』 자체 내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그 증거들을 일일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왜 자세히 연구하고 검토하지 않고 굳이 위서라고 낙인찍는가 하는 것입니다. 『환단고기』 연구는 완전히 새로 출발해야 합니다. 민족사학자이건, 역사학계의 주류 사학자이건 누구라도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우선 『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열린 태도와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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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디서 왔고, 누구였으며, 무엇이었는지, 지금의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이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 알렉스 헤일리,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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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산천을 어찌 잊어요.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어찌 잊어요. 내가 고향산천에 할말은 없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자존심이 있어요.” - 극진가라데 명인 최배달 ( 이름을 배달민족의 배달로 바꾼 최영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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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조선시대 강탈해간 수백 만권의(?) 고서들 가져가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사죄해도 모자를 만행인데...


삼국사 편찬한 고려시대의 김부식...이 인물사 읽어보면 왜 조선이 사대주의로 일방통행 했는지 이해가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