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 본토에서도, 영국에 건너 가서도 늘 극단적이고 근본주의적 교리로 주변과 충돌이 많았죠. 물론 그런 극단성 때문에 초기 확장도 쉬운 장점도 있지만 결국 주변과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는거죠.

 

때문에 유럽본토에선 칼뱅(장로교 교주)이 공포정치를 펼치다 망하고

영국에 가서는 아래 본문 참고

한국에 와서는 우리가 보는 현재의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죠 (그게 다 근본주의 성향의 극단적 교리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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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장로교의 교주이며 모토인 칼뱅주의는 한때 유럽을 휩쓴다. 네델란드등 북유럽은 물론이고 스위스, 프랑스, 영국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지금은 신교지역도 전부 루터교회만 남아 있다.(물론 극히 일부분에 장로교등이 남아 있긴 하지만)

 

왜 그런일이 벌어졌느냐? 왜 칼뱅주의는 유럽에서 소멸했는가? 그건 청교도라는 이름으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집단망명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교과서에서 종교적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 갔다고만 알려주던 청교도의 진실. 그 배후의 진실을 알아보자. (이하 네이버백과 인용)

 

크롬웰이라는 이름은 다들 들어 봤을 것이다. 간단히 이야기 하면 크롬웰 당시, 영국은 왕당파와 의회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진행된 많은 사업으로 잉글랜드의 재정은 방만해져 있었는데, 따라서 왕이 새로운 징세를 자주 추진하자 대헌장에 따라 징세 동의권을 갖고 있었던 의회와는 충돌이 잦아졌다. 장로교회가 지배적이던 스코틀랜드에서도 불만이 누적되다가 다음 왕인 찰스 1세 때 반란으로 불거져 나온다.

 

마침내 1642년, 의회파와 왕당파는 제각기 병력을 소집하고 상대방에게 무기를 겨눈다. 휴전과 개전을 거듭하며 165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나게 될 영국 내전의 시작이었다. (중략) 내전은 처음에 왕당파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중략)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에 잉글랜드 동부의 헌팅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젠트리(영국의 토착 유력자층으로, 귀족과 평민의 중간적 존재)였으며 독실한 청교도이기도 했다.

 

청교도인 크롬웰은 병사들에게 “찰스 왕은 사탄의 부하이며 왕당파를 타도하는 것은 신이 내린 명령이다” “세상의 끝이 다가왔다. 곧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며,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등의 광신적 믿음을 주입 시켰다. 그런 종교적 광신은 군인들의 사기를 올리는데 기여했다.


초기 열세이던 의회파는 크롬웰이 활약한 내전 중기부터 승세를 확실히 잡았지만, 자신들이 시작한 이 내전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의견이 엇갈렸다. 이대로 내전을 계속 하다가는 외국의 침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주장, 찰스 1세를 타도하고 나면 대안이 무엇이냐는 주장 등이 적당한 선에서 국왕과 타협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이루어 강경파와 대립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크롬웰은 마침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1648년 12월, 그의 병사들은 의회를 기습하여 온건파 의원 약 2백 명을 내쫓거나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크롬웰을 지지하는 삼분의 일 정도의 의원만이 남아서 의회를 운영했는데, 이를 ‘잔부(殘部) 의회’라고 부른다. 잔부 의회는 크롬웰의 꼭두각시로서 포로로 잡아놓고 있던 찰스 1세의 재판을 추진했다. 말이 재판이지 왕을 처형하기 위한 요식행위

 

일설에 따르면 처형이 끝나고 군중들이 흩어졌을 때, 얼굴을 숨긴 크롬웰이 몰래 찰스 1세의 시체에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안하오. 하지만 우리의 이상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소."

 

크롬웰은 내란 종식과 왕의 처형 후에도 반란을 멈추지 않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누비며 그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오랜만에 브리튼 전역에 평화를 가져왔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잔인무도한 짓을 했다고 한다. 가령 1649년 8월에는 아일랜드의 드로이다를 점령하고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2천 명을 학살해 버렸다. 갓난아이도 살려 두지 않았으며, 당시 주민들이 교회로 대피하자 크롬웰은 교회의 문을 잠그고 불태워 버리게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를 피에 굶주린 광신적인 학살자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아무튼 5년 동안 철권통치를 하며, 한때 하늘을 찔렀던 크롬웰의 인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암살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독재자” “반역자” “악마” 등의 욕지거리가 런던의 뒷골목마다 넘쳐흘렀다. 아일랜드에서는 그를 자기 민족을 무참히 학살한 원수로 여겼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자신들의 왕(찰스 1세)을 죄 없이 죽인 악당으로 취급했다. 자신이 정성 들여 키운 군대 말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크롬웰은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결국 말라리아에 걸려 59세로 숨을 거둔다.

 

1658년 9월 3일이었다. 그가 죽은 후 호국경의 지위는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에게 이어졌으나 그에게는 이미 민심의 이반을 막을 힘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기댔던 군부조차도 파벌로 갈라져서 서로 다투었다. 결국 1660년 5월, 프랑스에 망명해 있었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여 왕위에 앉았다. 크롬웰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헤쳐져 토막났다.

 

프랑스 혁명과는 달리, 청교도 혁명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 시민혁명이 아니었다고 보기도 한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결을 부추긴 것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이념보다는 종교 문제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수십 년 전 유럽 대륙에서 벌어졌던 종교 전쟁의 마지막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크롬웰 사후, 왕정시대가 다시 열리자, 영국의 장로교도들(청교도)은 크롬웰시절의 학살과 압제에 시달리던 다른종파 사람들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단체 망명하기에 이른다.

 

그후 이 장로교들이 미국에서 잠시 번성하다가 이윽고 그 장로교 특유의 극렬함과 극단성 때문에 미국내 다른 종파들과도 마찰을 빚다가 결국 보다 온건한 침례교등에 밀려 지금은 300만명 정도의 소수종파에 머무르고 있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 장로교에서 파견한 선교사는 한국에 상륙해 대한민국 개신교의 70%를 장로교로 만드는 크롬웰시절의 유럽과 같은 상황이 현대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난, 그런 역사의 반복, 칼뱅주의에 기반을 둔 이 장로교도들이 벌이는 극렬 이상행동이 두렵다. 그들의 교리는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이고 너무나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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