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낙태를 두고 '아이를 지운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굉장히 기만적인 표현임.

단어만 놓고 보면 마치 하드에서 데이터 지우듯이, 임신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 수 있는것같쟎아?

양심의 가책을 피해가기 위한 단어선정인진 모르겠는데 굉장히 현실에서 동떨어진 용어임.


일단 보통 임신사실을 알게 되는게 생리가 멈췄을때임.

근데 생리라는게 사실 칼같이 규칙적인 사람은 얼마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병원을 굉장히 일찍 찾는 사람도 다음 주기, 그러니까 한달이 더 지나고 나서 방문하게 됨.

근데 2~3개월이면 이미 수정란에서 배아(embryo)기를 거쳐 인간의 형상을 갖춘 태아(fetus)가 된다.

3개월쯤 가면 심장소리도 잡히고, 초음파 찍으면 태내에서 조금씩 움직임.

정말 그야말로 임신을 미리부터 걱정해서 아주 빛의 속도로 낙태를 진행한다 해도,

이미 사람의 형태와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장기를 다 갖추고 움직이는 존재를 죽이게 된다는 얘기임.

그나마 이때까지는 자궁벽을 긁어내고 석션으로 빨아내는, 그나마 덜 고어한 방법이긴 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월경불순이겠거니 하고 한두 주기정도 더 기다리면?

그럼 이제 태아가 외부 자극에 반응을 하기 시작한다. 큰 소리가 들리면 놀라고,

엄마가 어르고 달래면 다시 얌전해지기도 하지.

그리고 그냥 긁어서 꺼내기에는 태아의 크기도 지나치게 커진다.

그래서 낙태를 진행할 경우 머리를 박살내고 내용물(뇌)을 제거하는 decompression,

혹은 영상자료를 통해 익히들 보았을 오체분시를 시전한다.

참고로 이 시기 전후에 뇌에서 통각을 담당하는 뉴런들의 접속이 이루어짐.

이게 의미하는 바는 뭐 알거라고 생각하고.


6개월이 되면 또 의미있는 변화가 있는데, 이때부턴 몸 밖으로 나와도 살아만 있다면 '유산'이 아닌 '조산'임.

인큐베이터에 넣으면 살릴 수 있다는 얘기지.

즉 이 시기 이후의 낙태라는건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영아를 찢어죽이는것과 마찬가지.

공간상의 차이(태내에 있느냐 체외에 있느냐)가 존재할 뿐임.


흔히 낙태 찬성론자들이 '태아는 자아가 없으니 죽여도 된다'고 하는 소리 많이들 들었을건데,

여기서 중요한건 '자아가 없다'는 상태의 정의임.

기본적으로 인간이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을 확립했을 때 '자아를 지닌다'고 표현하는데,

이게 이루어지는 시기는 대체로 돌 전후임.

즉 '자아가 없으니 죽여도 된다'는 주장은 '돌 이전의 영아는 죽여도 된다'는 주장이 됨.

실제로 첫 trimester 이후의 낙태에 찬성하는 윤리학자들은 1세 미만의 영아살해도 살인으로 보지 않음.

이 분야의 거장 중 하나인 모 교수는 이 논리에 입각해 중증장애아는 태어난 후에 안락사시켜도 OK라는 입장임.


결론적으로 낙태란 일개 세포덩어리가 아닌 인간의 형상과 장기를 지닌, 살아움직이는 것을 죽이는 행위이며,

아주 초반에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자극에 반응하고 고통을 느끼는 '태아'를 잔혹하게 죽이는 시술임.

그래서 서구의 낙태 찬성론자들도 감성팔이 거르고 실제 논리 싸움으로 들어가게 되면,

위에서 언급한 '자아의 확립시기'에 입각해 1세 미만 영아까지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태아가 태내에 존재하는 것을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무단침입, 일종의 battery로 간주해

그에 대한 여성의 '퇴거권'을 인정하는 논리를 내세우는게 일반적임.

물론 태아와 모체의 관계를 집주인과 가택침입범의 관계로 보는건, 과거 메갈의 태아는 기생충'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