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월 동안, 아니 그 전부터, 지속적으로 감사ㆍ검사ㆍ조사ㆍ점검 등 얼마나 많은 직원이 힘들었나. 참으로 고생 많았다.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죄송하다. 기죽지 말길 바란다” 20일 하재주(61)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이 끝내 사퇴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적극적이지 못해 자진 사퇴 압박을 받아왔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치러진 ‘의혹 속’ 이임식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인 지난 3월 취임한 하 원장은 임기인 36개월을 다 채우지 못한 채 1년 8개월 만에 자리에서 내려왔다. 





하 원장은 이임사를 통해 직원들을 독려하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그는 “새 정부가 출범해 에너지 전환정책이라는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원자력연구원의 정체성과 원자력 기술의 가치에 대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며 “10여년 전 있었던 해체 폐기물 문제 등 과오를 털기 위해 자진 신고제를 운용하고 지방자치단체와 안전협약도 맺었지만, 그 계획의 이행은 제 몫이 아닌가 보다”고 밝혔다. 이임사 중에도 그는 자주 목이 메는 듯 물을 마셨고, 숨을 고르며 말을 멈추기도 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기보다, 과학적 사실에 입각한 비판으로 잘못된 일을 바로잡되 과학기술자의 자긍심은 지켜달라.” 이임사가 끝나자 중간중간 탄식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했다. 1992년 원자력연구원에 입사해 평생을 원자력 기술개발에 바친 연구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자 안타까움이 담긴 박수였다. 





원자력연구원 관계자에 따르면 그간 하 원장에게 쏟아진 압박의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21년 전인 1997년~2008년까지 원자력연구원은 11년간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3’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납 등 금속 폐기물을 무단으로 폐기ㆍ거래해 물의를 일으켰다. 14년 전인 2004년~2011년에도 자체 원자로 연구시설을 해체하면서 나온 폐기물을 무단으로 처분했다. 올해 1월에는 가연성 폐기물 처리시설에서 겨울철 동파 방지를 위해 수도관에 설치한 열선이 과열돼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문제는 사건의 발생 시기를 고려할 때 1월 화재 외에는 하 원장이 직접적으로 책임질만한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장인순 원자력연구원 고문은 “기관장의 잘못이라면 파문하면 되지만, 잘못이 없으면 임기를 보장하는 게 원칙”이라며 “하 원장의 사퇴는 책임을 인정한 것이 아닌 압박에 이기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