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읽으시다가 화가 나거나 욕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본문 읽기 귀찮으신분은 진한글씨의 사건 개요만 보시면 됩니다.


사상자나 피해규모가 큰 나온 사건 위주로 작성하였고 당시 기사와 참고 자료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1.죽령터널 열차 사고 - 1949년 8월18일


승객 380명중 사망 48명/부상 101명


서울에서 출발한 중앙선 증기기관차 505호+ 객차 6량이 단양 죽령터널에서 원인불명으로 이유로 인해 급정차.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전진+후진을 반복하다 열차 후부 객차 3량이 급기야 떨어져나가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열차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버림.


터널내부에 석탄으로 인한 매연이 가득 차면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현장이 통제불능상태에 빠져버림.


설상가상으로 구조대가 사건발생이후 3시간만에 도착하였고 더딘 구조작업 속도 때문에 사망자가 다수 발생.


사망자 대부분의 사망원인이 질식사였으며 광복 이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재난방지시스템때문에 생긴 대참사.



2. 모산역 건널목 참사, 원주 터널 열차 충돌사고


1970년10월14일, 1970년 10월17일


모산역 건널목 참사 사망 45명/부상 30명, 원주 터널 열차 사고 사망 14명/50명 부상.


<모산역 건널목 참사 위령비>


(모산역은 후에 이전하여 배방역이 되었고 구 모산역는 철거하여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게됨.)


현충사로 수학여행을 왔다가 귀경길에 오른 서울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 76명을 태운 버스가


철도건널목에서 지켜야 할 일단정지 수칙을 무시하고 진입했다가 통일호 특급열차와 충돌한 사건.


이 과정에서 버스가 약 100m 가까이 밀려났으며 연료통이 폭발해 화재가 발생.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됨.


(수학여행 관련 사망사고에서 한동안 사망자 1위사건이었으나 44년후 2014년 모두 잘 아시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안 좋은 기록이 깨지고 맙니다)


게다가 사건 조사 과정에서 온갖 병폐가 드러나게 됨...


1. 45인승 버스에 76명이라는 인원을 과다 탑승


2. 운전사의 운전기본수칙 무시


3. 신속하지 못했던 화재진압


4. 사고버스에 선탑하여 학생들을 인솔해야 했을 교사의 미탑승


5. 사건이 나고 뒷짐만 지고 구경하다 도망가버린 교사들


 정작 사고 수습은 의용소방대를 포함한 구조대와 인근 주민들이 다 함.


6. 박통의 현충사 정화사업으로 인해 현충사에 유동인구가 늘어났음에도


예산안만 잡아두고 건널목에 기본적인 안전시설이나 인원조차 갖추지 않은 철도청.



여러가지 문제가 겹쳐서 일이 커져버린 꼴이 되었고 화재 진압이 1시간가까이 걸리면서 사망자 유해가 새카맣게 타버리고


뒤엉켜버리는 일까지 발생하여 유가족들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리기까지 함.(당시에는 DNA 감식 그런 거 없었음)


결국 나라가 뒤집어졌고 문교부장관, 교통부장관,서울시 교육감이 사표 제출, 교장 교감 해당 교사 전원 직위해제당함.


그리고 1970년 10월 17일 이 사건이후 3일만에 또 다른 열차사고로 학생들이 희생되면서 전국이 충격에 빠지게됨.




원주 터널(구 삼광터널) 사고 관련 기사 <중앙일보>


서울 인창고,보인상고(현 보인고),보성여고 서울시내 3개 학교 학생과 교사를 태운 청량리행 제천역 착 열차가


제천역발 청량리행 화물열차와 정면 충돌하는 사건이 모산역 사건이 발생한지 3일만에 발생, 전국을 경악하게 만듦.


1~3호차에 나눠 탑승했던 인창고교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 역시 신호체계작동부주의로 벌어진 인재.


수학여행을 다녀오던 어린 학생들이 연달아 사고로 희생되면서 한동안 수학여행 금지령이 내려졌고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신호 사령장, 조정자 2명의 철도 공무원이 구속당함.



3.이리역 폭발사고 1977년 11월11일


사망 59명/부상 1158명/주택 675채 완파/1288채 반파/이재민 7800여명 발생/익산군청 건물 전체 피해

열차 117량 파괴/철로 약 1600m파괴


<사건 직후 이리역 상공에서 촬영된 사진, 폭 약30m 깊이 약10m 정도의 구덩이가 생김>


이 사건에 대해서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 벌어진 대참사.


항간에 떠도는 북한이 그런거다 같은 카더라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철저한 인재.


1. 한국화약(현 한화그룹의 전신)의 화물열차가 다이너마이트와 전기뇌관,화약,관련 자재40톤 가량을 싣고


 이리역에 정차.


- 만약을 대비하여 폭약과 뇌관은 같이 운반할수 없으나 원칙을 무시.


2. 철도역의 화물차 배정 직원이 급행료 즉 뇌물 받아먹으려고 이리역에 무려 40시간여를 강제 정차.


-당시 철도법에도 위험물은 역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통과시켜야 한다는 법을 무시하고 뇌물 받아먹으려고 정차시킴.


3. 40시간여를 붙잡혀 있다보니 빡친 호송원이 술쳐먹고 화물칸에 들어감.


- 호송원이라 할지라도 화물차에 함부로 들어갈수 없다는 규칙도 무시한데다 음주까지 함.


4. 호송원이 침낭펴놓고 자면서 춥다고 화약이 잔뜩 실린 화물차 안에서 촛불까지 피움.


5. 촛불이 화물차안에 옮겨붙었으나 화물차 안에 소화기나 불을 끌만한 도구가 없어 호송담당이 침낭으로 진화시도.


결국 역부족으로 호송담당 도주.


6. 화재가 점점 커지는데도 역내에도 제대로 된 소화 장비가 없어서 역내 직원들이 방화사,물을 끼얹어 진화를시도했으나


역부족.


7. 화재가 점점 더 번지다 결국 폭발


<이리역 폭발사고를 대서특필한 기사,경향신문>


철도역 직원의 도덕적해이, 각종 안전수칙 및 관련법 위반, 재난방지시스템 미비같은 온갖 병폐가 더해져서


만든 유사 이래 최악의 철도관련사고.


인근 논산,군산,김제에서까지 폭발음이 관찰되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었고 피해복구에만


약 200억원이 투입됨.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면 사고 직전 이리역에는 유조 열차도 정차 중 이었는데 화재소식을 전해들은 해당 열차의


기관사가 황급히 달려와 유조열차를 상행선 황등역으로 대피시켜 대재앙급으로 번질 뻔할 사태를 방지하였고


원래는 사고시간에 이리역으로 진입했어야 할 상행선 열차가 기관사의 통표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3453&cid=40942&categoryId=32185) 실수로 부용역에서

지연된 덕분에 추가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었음.


(황등역<->이리역<->부용역)


사고 이후 한국화약 회장 김종희(현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의 부친)는  대국민사과 및 재산 90억원


(당시 12인치 TV가 약 7만원)을 피해복구에 내놓았으며 이 사건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호송원은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를 적용하여 징역을 살다가 1987년 출소.


<폭발로 폐허가 된 이리시 삼남극장 당시 전경>


코미디언 故 이주일씨가 사고 당시 폐허가 된 삼남극장에서 당시 최고 인기가수 하춘화씨를 후두부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출하여 후일 대스타로 도약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함.



5.경산 열차 추돌 사고 1981년 5월14일


사망 55명 부상 254명


<사고 현장 사진,중앙일보>


<당시 사고 보도영상>


경산시 고모역 근방 매호건널목 상행선에서 부산발 서울행 열차가 오토바이를 들이받고 사고수습을 위해


서행 후진하던것을 부산발 동대구행 열차가 후미에서 추돌한 사건. 


이 사건도 역시나 명백한 인재.


1. 매호건널목의 신호기를 무시하고 무단횡단을 시도하다 열차가 접근하자 도주해버린 오토바이 운전자와 동승자 .


2. 통제실에 알리지 않고 임의로 서행 후진을 감행한 부산발 서울행 열차 기관사.


3. 자동폐색신호기(ABS)의 경고 신호를 보지 않고 그대로 내달린 부산발 동대구행 열차 기관사.


결국 사고 책임 및 원인 제공이 모두에게 있는것으로 밝혀져 기관사 2명, 여객전무, 오토바이 운전자 구속 및 실형.


황해중 철도청장이 사임.




부산 구포역 무궁화호 전복 및 탈선 참사 1993년 3월 28일


78명 사망/198명 부상



물금역에서 구포역으로 향하던 무궁화호 열차가 '갑자기' 무너내린 노반을 감지하여 급제동을 시도하였으나


제동거리가 부족하여 무너져 내린 노반으로 열차가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대량의 사상자가 나온 사건.


기관사가 생존하여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증언이 가능했고 사고 후 얼마 안되서 밝혀진 사고의 원인은


매우 황당한것이었음.



당시 삼성종합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한국전력에게 도급받아 지하 전선관 매설작업을 진행중이었는데


선로 밑 지하 30m 지점에서 사고 전일까지 발파작업을 감행한 것.


철도청과 합의되지 않은 불법 작업이었고 실제 발파는 삼성종합건설의 하청을 받은 한진건설(현 한진중공업)이 시행


했지만 명백히 책임소지는 불법작업을 지시한 삼성종합건설과 한진건설 및 한전 관련 책임자에게 있는100% 인재.


결국 이 사건으로 삼성종합건설+한진건설+한국전력 관련 책임자 16명이 구속되었으나 대법원에서


이들의 과실치사상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뇌물공여 혐의 일부만 인정하는 솜방망이 처벌로 관련자 처벌 종결.


해당 사건의 주범인 삼성종합건설은 6개월 영업정지+과징금 2550만원+약 30억원 구상권청구 조치를 당하게 됨.


아이러니하게도 삼성종합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현재 국내 부동의 1위건설사로


성장한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함. 그 과정을 살펴보자면


1. 이 사건 이전에는 현대건설 동아건설이 1,2위 놓고 다투는 상황이었고 삼성종합건설은 상대도 안되는 형세.


2. 이 사건으로 삼성종합건설 국내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삼성건설로 개명 이후 삼성물산 건설부문으로 합병.


3. 국내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평판때문에 어려움을 겪자 싱가폴/동남아시아로 진출.


4. 동아건설이 성수대교 붕괴 사건의 주범으로 확정된것을 시작으로 연이어 터진 악재에 IMF까지 겹쳐서 쇠퇴


5. 현대건설이 중동 공사대금 미수금 문제로 인한 악성부채 증가, IMF까지 겹쳐 골골대다


2000년 약3조가량의 당기순손실을 내고 부도=> 워크아웃 절차.


6. 이런 와중에 삼성물산은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타워, 타이베이 101 공동 수주등으로 IMF여파도 피해가고 승승장구.


7.아랍에미리트 부르즈 할리파 공동 수주 등등으로 정점을 찍고 2014년부터 국내 건설사 도급 부동의 1위까지 차지.




대구 지하철 참사 2003년 2월 18일


사망 192명(신원불상 6명)/부상 151명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를 대서특필한 기사,동아일보>


대한민국에서 철도관련으로 가장 큰 인명피해를 기록한 대참사.



<당시 사고 현장 묘사>



신변비관으로 자살하려던 방화범 김대한이 대구 지하철 중앙로 역에서 지하철에 불을 낸것을 시작으로


통제실과 기관사들의 후속 조치 미흡+판단미스까지 더해져 돌이킬 수 없는 대참사를 불러오게 되었다.


게다가 대구지하철 측에서는 녹취록을 조작하다 걸리고 대구광역시 측은 사고 당일 현장을 물청소 해버리는 등


각종 병신짓까지 저질러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씻을수 없는 상처까지 입힘.



<희생자들이 남긴 마지막 문자>


수많은 사고로 희생된 분들의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