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를 보면

대한제국의 황실과 황족들이 마치 독립운동을 한 것 마냥

묘사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 역사는 그러지 않았죠.

대부분의 황족이 일본이 주는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고분고분한 친일파로 일본에 협력하며 살았고


그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황족들의 행태에 크게 실망하여

대한제국의 부활을 일찌감치 포기했을 정도입니다.  


때문에 대한제국이 망한지 고작 9년만에

탄생한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아예 입헌군주제를 폐기하고

헌법으로 민주주의 공화국을 선언했습니다

(참고로 당시 임시정부가 제정한 헌법은

헌법에 민주공화국을 '명문화' 한 세계최초의 헌법입니다)


  이런 막장 대한제국의 황족들 중에

정말 특이한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인

(다섯번째 아들인데 순종을 제외 한 형 3명은 일찍 죽었죠)

의친왕 이강입니다



 

그야 말로 영화와 같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은 인물입니다.


대략적인 삶을 보면



1. 출생과 힘든 유년시절


의친왕의 생모는 명성황후 민씨가 아니라

귀인 장씨입니다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에게 미움을 받았기에

의친왕을 낳고 박해를 받아 곧 궁궐 밖으로 쫒겨났습니다.

의친왕 혼자 궁궐에서 무섭고 외롭게 눈치밥 먹으며 자랐던 것이죠


필운학당에서 공부를 했는데

이때 같이 공부한 동창생들이 나중에 독립운동가가 되는

이종훈 권동진 등입니다




 



2. 다양한 외국경험 및 미국 유학생활  


의친왕은 황족들 중에 특이하게

국제적 경험이 많고 외국어가 능숙한 인물입니다.

외국물 좀 먹은 사람이죠 

 

일본에 보빙사로 파견 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6개국 특파대사로 임명되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트리아를 돌아 다녔으며

 

귀국해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한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가

미국 버지니아주 로노크 대학교와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미국 유학생활 중에 메샤츄세츠에서 열린 학생대회에도 참가를 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활동중인 김규식을 비롯해 안창호 등과도 친분을 쌓아

LA에 있던 안창호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게

이때 부터입니다.


젊어서 유럽 각지를 돌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탓에

국제적 감각이 매우 뛰어났고 영어도 유창했음은 당연하죠

파티를 즐겨했고 자동차 드라이브와 레이싱이 취미였다고 합니다.

네 인싸였죠.


 



3. 귀국 이후 독립운동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 되자

유학을 접고 본국으로 귀국하여

공식 황금수저의 신분에 맞게

대한제국 육군 부장 및 적십자 총재직을 역임합니다


고종황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 당하고

순종황제가 즉위를 했지만

순종은 후사를 볼수 없었기에 형제들 중에

황태제를 세우게 됩니다


이때 가장 1순위가 당연 의친왕이었죠

하지만 국권피탈을 목적으로 후계자를 세워야 하는

일본과 이완용의 입장에서 반골기질이 강한 의친왕이 아닌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듣는 이복동생 영친왕을 밀어서

의친왕이 아닌 10살 어린이 영친왕이 황태제가 됩니다


바로 이 시절 의친왕과 독립운동가 손병희를 만나게 되었는데

일화가 있습니다


의친왕의 행차를 보자 손병희가 내려 예를 표했는데

시종이 의친왕에게 익숙한 영어로 지들끼리 소근 소근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를 재수없어 한 손병희가 대노하여 일갈하기를


"내 나라 왕을 모시는 자가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아뢰다니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된것이다!"


이 패기 넘치는 장면을 본 의친왕이 깊은 인상을 받았고

"손병희 선생의 말이 옳다" 다독이며

이후 손병희와 통교를 하며 교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1907년 일본의 강압으로 대한제국군이 해산되게 되자

대한제국 육군부장으로 있던 의친왕은

장병들에게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으로 봉기해 항전할 것을 지시합니다

 

1909년 의친왕 본인이 직접 경남 거창으로 내려가 의병본거지를 확보하고 병력을 모으고자

1개월간 머무르며 의병과 연통하며 땅을 매입하였으나

얼마 안가 곧 일본에 적발 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감시를 받게 됩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서울에서 손병희와 비밀리에 회동하여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 우의동에 땅을 매입하여 봉황각을 세웁니다

바로 이 봉황각이 3.1 운동의 발상지입니다


 


4. 고종황제 해외 망명 시도  


1910년 대한제국의 숨통이 끊어지고 병탄되자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의친왕은 꾸준히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이때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건이 고종황제 탈출 시도입니다


1915년 독립운동가 이상설, 박은식 등이 결성한 신한혁명당원 들과 함께

의친왕은 고종황제를 중국으로 탈출 시키려하였고

결국 또 실패를 하게 됩니다.


이때 본국에 잠입한 신한혁명당 외교부장 신락형을 비롯해

의친왕의 장인어른 김사준을 비롯한 관련자 전원이

투옥되게 됩니다


의친왕은 황족의 지위로 처벌을 면했지만

대신 1급 감시대상으로 통제를 받게 됩니다

처소인 궁궐 주변에 감시 보초가 24시간 붙고

담당 부서가 만들어져 수시로 감시했다고 하죠 


근데도 기여이 의친왕은 대한 독립의군부와 연통하고

손병희와 연통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습니다


1919년  3.1 운동으로 손병희가 투옥이 되고

국내에서의 평화적인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탄압을 받게 되자

의친왕은 이때의 경험으로

독립운동은 무장병력에 의한 무력투장이 중요하다 여기게 되었고

최진동 장군과 연통하며 군무도독부를 결성하게 됩니다

이 군무도독부와 최진동 장군이

 

봉오동 전투의 주역입니다.



 


 



5. 의친왕의 상해임시정부 망명 시도


3.1 운동으로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이 되고

미국에 있던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감으로 임명되었는데


신생정부의 정통성 확보가 중요하던 시기

미국 시절 부터 안창호와 친분이 있던 의친왕의 임시정부 망명을 계획하게 됩니다.


이때 의친왕은 임시정부에 친서를 직접 보내며


의친왕은 자신이

임시정부로 망명이 성공하게 되면

기존에 있던 황족으로써의 모든 지위나 예우를 포기하고

임시정부 공화국에서 한명의 시민으로 독립운동에 봉사하겠다고 전합니다







문제는 의친왕이 1급 주의 대상으로

일본의 감시가 이미 예전부터 담당 부서까지 있을정로 극심했단 것이죠


대동단의 전엽 최익환 등과 연락하여

변장을 하고 처소인 사동궁을 기적적으로 탈출 했을 때  

이를 알아챈 일제가 남겨진 의친왕비를 집요하게 추궁하였고

의친왕비는 이때 최대한 일본의 주의를 끌고 시간을 벌고자

고군 분투했다고 합니다.


의친왕은 고종황제가 독립자금으로 남긴 150만원의 채권을 찾아

어렵게 어렵게 만주 안동까지 도착을 했지만


합류 지점인 임시정부의 비밀 아지트이자 교통국인 이륭양행을

고작 2km 앞두고 의친왕의 얼굴을 알아 본

일본 요시마네 경무에게 체포되게 됩니다.


이후 의친왕은 사실상 완전 가택연금 상태로 전락하게 되죠


이때 상해임시정부는 탈출 실패소식을 듣고 안타까워 하며 다음과 같은 기사를 냅니다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


1919년 11월 20일 독립신문


 이후 일본의 감시속에 여행의 자유를 잃고 연금 당하며 일제시대를 보내게 되었는데


이후 알려진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1921년 미국 워싱턴에 보내는 대한독립 청원서에 황족 대표로 서명

(이때 일본의 감시를 받던 중이라 임시정부와 연통하는건 불가능하고

실제는 본인이 한 서명이 아니라 임시정부가 대신 한 것으로 봅니다)


-1930년 일본으로 부터 받은 공작위를 비롯한 모든 예우 포기

-일본에 의한 창씨개명 거부

-경주 최부자집이 독립운동 자금 지원등으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되자

비밀리에 이를 지원하여 부채를 해결 해줌.


의친왕은 일본 작위를 모두 거부하였기에

그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았는데



 



그가 의친왕의 장남인 이건입니다

의친왕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한 아들이죠.  


친일파였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모르지만  


의친왕이 다른 아들의 경우 마중을 나가고 걱정해도

유독 장남은 생까며 미워했다고 합니다


이건이 회고하기를

"한국의 황족들은 자신을 미워했고 차갑게 대했지만

오직 일본 황족들만이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실제 그는 일본왕실의 귀족과 결혼했고

광복 이후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이름도 모모야마 겐이치로 개명합니다

때문에 한국의 전주이씨는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다고 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 신분이 그래도 일본 황족과 혈연이 있기에

일본 다카히토 친왕이 애도를 표했다고 합니다



6. 광복 이후의 삶

 

1945년 드디어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되었으나

노인이 된 의친왕은 어떤 정치적 행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여

김구, 김규식 등이 곧 의친왕과 면담을 가졌으나

김구를 따라 대한독립당의 고문 역할을 잠시 했을 뿐  

좌파 우파로 나뉘어진 해방 정국에서

의친왕은 어떤 정파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죠


곧 등장한 이승만 정부에 의해 황실이 견제를 받으며

대한제국 황실 재산이 모두 몰수 당하게 되자

정치적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외면 받고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의친왕은 고종황제의 자식들 중에

유일하게 한국전쟁을 경험한 인물입니다


의친왕은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을 탈출하는데 실패하여 서울에서 피죽만 먹으며

말 그대로 영양실조 상태에서 죽을 위기에 직면했으나

그의 딸 이해경이 목숨을 걸고 먹을걸 구해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얻은 영양실조와 건강악화로 각종 질명에 시달리다

1955년 사망하게 됩니다



7. 의친왕의 여자들 그리고 자손들




 



의친왕이 세상에 유명한 것은

바로 엄청난 여성편력입니다.


어려서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닮았다 평가를 받은

호방하고 호탕한 기질을 가진 남자로

 

말 그대로 핵인싸였던 인물이죠  

 평소 파티를 좋아하고 권총 사격도 잘해

파티장에서 상들리에를 권통으로 쏘며 놀기도 하고

여자를 차에 태우고 스피드를 내는 걸 즐겼던 인물이죠


14살에 시집 온 정실부인 의친왕비 연안김씨 김덕수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의친왕이 탕아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만난 여성들에게

얻은 공식적인 자식들만 12남 9녀


이게 공식적인 자식인 것이고

실제 알려지지 않은 자식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여자를 얼마나 좋아 했는지 일화를 보면


미국 유학생활 당시 미국에서 만난 애인 때문에

대한제국 황족이고 뭐고 다 포기한다고

선언까지해서 황실을 비롯해 정부가 발칵 뒤집어 진적도 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의친왕이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을 하던 때

의친왕비는 궁에서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저지하며 따돌리고

임시정부 요원들도 목숨을 걸고 의친왕을 단동의 임시정부 비밀기지로 이송하던

그 급박한 순간

일본 경감에게 틀키게 된 결정적 이유가

함께 탈출하려고 한 애인이 늦게 도착하여 이를 기다리다

시간을 지체해서 잡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ㅡㅡ;;


이게 맞다면....

의친왕에게


여자 >>>>조국의 독립 이란 뜻이니

믿을지 말지는 신중히 봐야겠죠..


그가 얼마나 여자를 좋아한 정력가였는지

그의 자손을 보면 단박에 이해가 됩니다.


의친왕이 1955년에 7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의 마지막 자손이 태어난 해가.....


1950년 1953년입니다


그래요 한국전쟁 기간 피죽도 제대로 못 먹어서 영양실조 걸리고

그토록 힘겨워 하던 노인이

그 와중에 또 여자를 만나서 애를 낳은거임


죽기 2년 전...


이 정도면 가히 레전드라 할 노익장의 정력가가 아닐 수 없죠.


이런 의친왕의 일대기는 워낙 유명해서

최인호의 소설 '길없는 길'이 써졌을 정도죠

공식적으로 알려진 자녀가 아닌

비공식 자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이야기입니다....



8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인물

살아 있는 부처 마누라 의친왕비 김덕수


 


그리고 잠시 잊었던 한 여자

이 모든 것을 감내 한 의친왕비 김덕수입니다.

기록은 그냥 현명하고 덕이 많고 자애로우며

인내심이 많은 왕비였다는데


행적을 보면 단순히  왕비의 모범을 떠나

 이세상에 존재하는게 가능한지 의문인

그런 마누라가 뭔지 알려주는 여자죠


14살에 의친왕에게 시집와서 처음 한 일이

고종황제와 이완용에게 메달려 애걸복걸 울면서

의친왕을 꼭두각시 황태제로 만들지 말아달라 한 사람입니다.


실제 순종황제는 독살설이 나돌고

황태제가 된 영친왕은 일제시대 볼모로

끌려가 인형처럼 살아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의친왕의 인생을 구원해준 구원자이기도 합니다


그 뿐임?


의친왕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시아버지인 고종황제를 중국으로 탈출 시키려다가

실패했을 때


의친왕비의 친정 집안은 아예 박살이 났습니다

의친왕의 장인 즉 아버지를 비롯 형제들이 의친왕을 돕다가 

전부 투옥되어 고문받았으니 말이죠

정작 의친왕은 황족이라며 처벌을 면했는데 말이죠.... 


그럼 의친왕은 집에 붙어 있냐?

기여이 감시망을 피해 여기저기 돌아댕기며

여자들 만나고 애를 낳아 집에 델꾸 옵니다


의친왕비는 그런 의친왕의 사생아들과

데려온 여자 첩들을 전부 챙겨주고 키워줬습니다



 



의친왕의 자손들 중에 친모가 직접 못 키우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애를 낳고 재혼한 경우도 허다했는데


의친왕비는 이런 의친왕의 자손들을 모두 자기 자식으로 여기며 키웠습니다


의친왕의 자손들이 한결 같이 모두 회고하기를

의친왕비님은 현명하시어 맹자를 줄줄 외웠고

서예와 학문에도 밝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자애롭고 따듯하며 친엄마 처럼 우릴 사랑했다고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 말 다한거죠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의친왕이 데려온 사생아 7남 이해청의 경우

동경대학에서 유학을 하던 중

일본군에 강제징집을 당하게 되었는데

황족의 자존심을 지킨다며 일본군복을 입을 수 없다고 버티다

결국 함경도의 철광으로 강제징용을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심한 고생을 하여 신경쇠약에 걸려 돌어오자

의친왕비는 이해청을 데리고 요양병원에 직접 데려가

함께 기거하며 헌신적으로 치료해주고 요양을 도왔다고 합니다


의친왕은 또 그런 의친왕비를 버리고 집을 나가죠 

다른 애인과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하러 가고

그 와중에도 의친왕비는 일본 정부가 의친왕이 궁에 있는지 확인하러

알현을 청하면 각종 핑계로 시간을 끌며 버티고

결국 발각이 되었을 때 추궁을 당하는 치욕에서도

다시 또 따돌리고 버티며 홀로 일본에 맞서 탈출하기를 도왔다고 합니다.


의친왕은 죽기 전까지 다른 여자를 만나며 자손을 보았고

의친왕비는 그런 남편을 돌보다 의친왕을 보내고

1964년 85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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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의 일대기는 생각해 보면 그냥 영화 한편입니다.


가장 큰 의문이 이 사람을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왜 아직 없는가? 싶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죠.


의친왕이란 이름은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들어 봄 이름이고

대신 대한제국을 소재로 한 가상 역사물의 경우

전부 의친왕을 후계로 상정해 스토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드라마 '궁' , '황후의 품격' 모두 의친왕이 이어받았다는 배경이죠


참고로

실제 고종황제의 자손 중에

순종황제는 후사가 없었고

황태제가 된 영친왕의 경우 회은황세손을 끝으로

그 가계가 끊어져 단절되었기에

현재 남겨진 이른바 황족? 이란 사람들은

전부 의친왕이 낳은 자손들입니다.


문제는 의친왕의 자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고

본인이 이런거와 연관되어 있는지도 모르는게 태반이란 것이죠

현재 황사손으로 지명되어 종묘제사등 문화재를 이끄는 사람도

본인이 의친왕의 자손인지도 모르다가

어느날 졸지에 지명되어 강제로 종통이 된 사례입니다 ㅡㅡ;;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