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첫번째 왕조는

상(商)나라 입니다.

은허유적, 갑골문 발견으로 유명한 나라죠

흔히 은나라 라고 부르는 것은

마지막 수도가 이름이

은殷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은상(殷商)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은허가 도시 이름이 아닙니다

은허(殷墟)란 은(殷)땅의 유적(墟)이란 뜻이죠 


​(은허 유적)



(상나라 궁전 복원)


원래는 신화일뿐 역사로 인정 받지 못했는데

지금의 중국 화북지방에 있는 안양시에서

상나라 도성 유적인 은허殷墟가 발견되면서

그 실체가 증명되었고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마지막 수도인 '은' 이 유명하지만

그것만 수도가 아니었죠

중남미의 마야, 아즈텍 처럼

수도를 여러 번 이전 한 왕조입니다.

위치가 비정되어 아는건 위와 같이 

대략 8개 정도를 추정을 합니다

상나라는 성읍국가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제국이나 왕조의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먼 국가체제입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아열대 기후의 정글지대였고

사용한 도구는 청동기였기 때문에

당시 인간의 능력으로는

큰 나무를 벌목할 수 없었죠

농업이라고 해봐야 원시농경으로 기껏해야

정글에서 화전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이를 '상나라 농업분전(焚田)설'이라 합니다.


상나라의 수도가 자주 이전 된 이유를

화전농법과 농업생산력의 쇠락에서

그 원인을 찾는 주장입니다.


그 밖에 무슨 권력다툼설이니

귀족세력 성장이니 주장도 있지만

중국의 국뽕에 이성을 잃은 학자들이

상나라가 그만큼 정치가 고도화 되었다

그딴 뻥튀기 하며 설을 주장한 것 뿐이고

이 정 도 수준의 국가단위에

그딴게 있단게 말이 안되죠


황하유역의 범람설도 있지만

이전 한 수도 역시 황하유역으로

심지어 다음 수도 위치가

강과 더 가까운 경우도 있음으로

기각되었고


화전농법에 의한 수도 이전 설이

현재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죠


그런 방식의 원시적인 농업은

지력을 금방 쇠하게 하기에

생산력이 떨어지게 되면

다른 지역으로 수도를 이전해야 했습니다.

이는 남미지역의 국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 현상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국가라는 개념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국가처럼

무슨 통치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도에 나온 상나라의 세력권이라는

보라 점과 색깔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곳에 관리를 파견하여 백성을 보호하고

통치하며 세금을 걷는다는 것이 아니라

상나라의 약탈. 사냥 범위를 말합니다.

평화롭게 살던 주변의 이민족? 들

그러니까 오손 도손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쳐들어가서 약탈하고 사냥해서

강제로 붙잡아 와서 노예로 삼곤 했죠

그냥 노예로 삼은게 아니라

죽여서 제물로 썼습니다



백성을 나타내는 한자

민(民)자의 원형은


눈알을 뽑아서 눈을 멀게 한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엔 백성을 잡아와서

눈을 뽑아서 눈을 멀게한 뒤

뒤로 손을 묶어 꿇어 앉힌 후

제물로 죽였거든요


상나라 백성들의 생활과 복지수준을  

알수 있는 글자이기도 하죠.


갑골문에 보면 다양한

인신공양의 기록이 나옵니다

사람을 토박내서 제물로 바치고

그 뼈는 도구로 사용했죠.

실제 톱질을 한 인골이 다수 발견됩니다.


(인신공양으로 죽은 상나라 유적의 인골)


사람인지 도구인지 헷갈리는데

남미 마야, 아즈텍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다만 남미 대륙의 경우 사람을 사냥한 이유가

잡아 먹기 위함 즉 단백질 보충의 이유도 있었죠

남미 대륙에는 라마를 빼고는

가축으로 삼을 동물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만성 단백질 공급 부족에 시달렸고

주변의 이민족들은 훌륭한 고기가 되었거든요


다행이? 상나라는 이와 다르게 

인육을 즐겨 먹진 않은듯 합니다

물론 출토되는 청동기 솥에서

삶아진 사람 머리가 나오기도 하여

조용히 발굴하던 학자들 기절시키곤 하지만


대부분 제사의례를 위한 것이고

기록에 의하면 인육을 제공한 묘사가

주문왕의 고사를 보듯

상대방을 모욕하는 행위였음을

짐작하건데 즐겨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대륙에는 원래

가축으로 삼을 동물이 많았고

당시 주변에도 이런 동물이 많았을테니

사람 고기가 꼭 필요하진 않았을 것이라

제발 추측해 봅니다

그럼에도 인싱공양의 방법은

매우 잔인했는데

갑골문에 거의 주기적으로 

이런 인신공양과 고문의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보는

상나라 마지막 폭군 주왕이 했다는

포락지형이니 사람을 잡아 죽는 등

잔인한 형벌에 대한 기록은

사실은 상나라 왕조 전 기간에 벌어진

상나라의 끔찍한 만행을 압축하여

마지막 왕의 이야기에 넣은 것이라

추정하는게 가능하죠

더불어 상나라의 경우

건축 기술이 매우 낙후했습니다

일단 기와를 발명하지 못하여

짚으로 지붕을 만들었고

건축 구조가 매우 불안정하여

쉽게 무너지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갑골문에 보면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제사를 지내며 기원하는 기록이

다수 발견이 됩니다.


아하.. 건물 무너지지 말라고

또 그놈의 제사를 드리네요

그럼 뭐가 필요할까요


네 사람이죠



상나라는 건물을 건축 할 때

무너지지 말라는 기원의 의미로

사람을 잡아서 그 밑에 뭍었습니다


때문에 상나라 건물지 유적이나

건물로 추정되는 땅에는

다수의 인골이 무더기로 발견이 됩니다


상나라의 또 다른 특징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청동기입니다



(상당히 쩔어주죠 하나 하나 국보급입니다)


상나라때 만들어진 청동기는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죠

심지어 후대에 발견되는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가 더 단순하고 기교가 적습니다


보통 고고학 유물의 경우

한 국가, 한 지역의 특징을 알 수 있는

공동된 양식이나 문양을 공유하기에

지표 유물로 삼아 구분하고는 합니다

많이 만들다 보니 공유하는

특정 양식이란게 생기는 것이죠

 

하지만 상나라 청동기는

그 특정 양식을 확인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개성과 취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게 다른의미로 무슨 말인가 하면

상나라의 청동기는

그것이 대량으로 만들어진게

아니란 것입니다.


역사책에는 상나라 이전에

하나라(夏)나라가 있었다고 하지만

구라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중국 정부랑 중국 국뽕학자들은

이리두니 하가점이니 하며

열심히 발굴하고 하왕조의 증거를 찾았다고

유물을 역순으로 붙여가며 주작질까지 하지만

대부분은 역사로 여기지 않습니다.

상나라 조차 저런 수준의 도시국가인데

일단 그 보다 이전 하나라의 존재가

정상적인 국가나 왕조일리가 없겠죠


(갑골문)


*처음 갑골문은 그 정체를 몰라

발견하면 한약방에서 용의 뼈라고

약재로 고아서 사람들이 홍삼처럼 먹던 것을

청나라 금석학자 '왕의영'이 우연히

글자가 써있는 것을 보고

으엉? 시붕 이게 뭐여! 하며

찾아보니 은허 유적을 발견했단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사실 과거에는 상나라도 그 존재가 부정되었죠

 하지만 갑골문의 발견으로

놀랍게도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아름다운 전례가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라의 존재를 찾는 사람들은

봐라!! 갑골문의 사례처럼

하왕조도 유물을 통해 증명 될 수 있다고

예상했고 그러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夏)왕조가 부정 된

결정적인 이유는 갑골문 때문입니다


일단 갑골문에는

하(夏)라는 글자가 없었습니다


상나라 시절에는

지금 처럼 봄,여름,가을,겨울

춘하추동 春夏秋冬으로 계절을 나눈게 아니라

그냥 춘추(春秋) 봄,가을 이라고만 했죠

위에 처음 언급했듯

상나라 시절에는 아열대 기후였거든요

(*때문에 춘추(春秋)라는 말은

그 자체가 1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역사라는 뜻이 되며

우리가 나이를 물을 때 춘추를 묻는것은

그 사람의 일생의 역사를 물어보는

지극히 높히는 존칭이 됩니다.)


그럼 하(夏)나라가 아니라

혹시 다른 이름이나 명칭을 쓴건 아니냐?


상나라의 경우 왕의 이름을

갑을병정~~ 이렇게

갑자 순서로 정해서 나아 가기에

그 순서를 파악하기 매우 쉽습니다


역시 갑골문을 통해 확인하니 

하나라를 멸망 시키고 상나라를 건국했다는

상나라 시조? '탕'임금은 시조가 아닙니다.

저 멀리 제곡까지 올라가며 탕왕은 그냥 중흥군주죠

그럼 탕임금은 제위를 하며 무슨  

특정 왕조를 정벌한 기록이란건 있냐?

그런 기록도 아예 없습니다


네. 하(夏)나라는 없었던 것이죠.

아마도 주나라 건국 이후

주왕조의 정통성을 미화하는 과정에서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설령 비스무리한게 있었다 해도

암사 선사유적지 수준의

촌락 정도 규모였을 것이니

그걸 왕조라고 볼수 없죠

앞서 중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발굴하는

하(夏)왕조의 유적이라는 이리두 유적이


신석기 시대 유적이거든요...


후기에 발견된다는 이리두의 번영을 말한다는

청동기 유적은 상나라 시기와 겹치고

상나라 수도 박과 인접하여

이게 상나라 유적이 아니냐? 논쟁중입니다.


(상나라를 멸망 시킨 주나라, 목야전투)

 

이런 상나라를 멸망 시킨 나라가 

주나라입니다. 상왕조의 멸망은 기록은 물론

출토 유물로 그 연도까지 확인이 될 정도니

당시 대단한 사건이었음이 틀림없죠.

기원전 11세기의 일입니다

(기원전 1027 또는 1046으로 논쟁이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 사냥해 죽이는

상나라의 폭정에 주변의 국가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난게 아닌가 합니다


이후 주나라는 정복한 상나라 영토를

같은 성씨를 가진 가족들에게 분봉하여

봉건제를 실시하였고 나라를 세우게 했죠


상나라 망국의 유민들은 차별과 핍박을 

받으며 나라들 여기저기를 떠돌았고 

마치 오늘날의 유태인처럼 장사에 종사하며 

생업을 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장사치를 가르키는

'상인'이란 단어 '상업'이란 단어에 쓰는  

상(商)이란 글자가

바로 상나라 사람이란 뜻에서 유래합니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유민들을 모아서

봉토를 주어 살게 해주었고

나라 이름을 송(宋)나라 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상나라 유민들은

다른 제후국에 비해 멸시를 받았죠


우리가 현재 배우고 익히는

춘추시대에 나온 수 많은 고사성어 중에


멍청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우스꽝 스런 사람을 지칭하는 이야기는

전부 그 주인공이 상(商)나라 유민

즉 송(宋)나라 사람입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가만히 토끼가 와서
죽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 일화

비올때 신발장수 아들,
맑을 때 우산장수 아들을
걱정하는 송나라 아낙 일화

벼가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해
모를 다 뽑아 버려서
결국  작물을 죽인
멍청한 송나라 농부 일화

 문신을 하고 머리를 미는
월나라에 모자를 팔러가는
멍청한 송나라 상인 일화


 


심지어 송나라 군주는 송양지인이란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배우죠.


전부 망국의 유민과 그 잔존 국가를

비웃었던 당시의 문화가 아닌가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국 통일 왕조의 국가명칭은

당나라가 망하고 들어서는 

5대10국의 혼란기 속

중원의 정통왕조 교체 과정에서

그 역순으로 재탕되는


재미 난 현상이 벌어집니다. 


당나라를 후량이 멸망 시킨 후

다시 후당(後唐)이 건국되었고

후당(後唐)이 멸망한 후

다시 후진(後晉)이 건국되었고

후진이(後晉) 멸망한 후

다시 후한(後漢)이 건국되었고

후한(後漢)이 멸망한 후

다시 후주(後周)가 건국되었고

후주(後周)가 멸망한 후

마지막에 송(宋)나라가 건국되었죠


중국사 통일왕조가


상(商) -주(周) - 한(漢) - 진(晉) - 당(唐)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당(唐) -진(晉)-한(漢)-주(周)-상(商)

그 역순으로 진시황의 진(秦)나라를 빼고

올라 가면서 국명을 정한 사례입니다.


상(商)나라 다른 명칭

송(宋)나라


그 마지막이 고려시대에

 중국에 있던

우리가 아는 바로 포청천의

송(宋)나라 입니다.


상나라 이전에는 더이상 중국 왕조가 없듯

진짜로 송宋나라는 몽골족의 침공을 받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왕조가 사라지며

완전 소멸되어 멸망했습니다.


이후 건국한 명(明)나라는

그 국명을 보면 알듯 과거의 중국 전통 국명을

탈피한 새로운 이름을 썼고

현대 중국도 (中)이라는 글자를 쓰죠



중국 왕조사 첫번째

상나라 이야기였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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