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는 공손연의 양평성을 함락 한 뒤 성에 들어가

장군 필성을 비롯한 공손연이 임명한 공경 이하

관원들 모두를 붙잡아 2천명을 처형했으며  

성안에 15세 이상 남자 7천명을 잡아 모두 죽이고는


경관(京觀)을 쌓았다.


-진(晉)서 선제기-



사마의가 세웠다는 경관(京觀)이란 것은

해골탑을 말합니다.



동아시아에 독특한 전승기념물 중에 하나인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춘추좌전>에 나옵니다

춘추시대 초(楚)나라 장왕이 진(晉)나라 군대를

필 땅에서 무참히 깨트리고 대승을 거두자

신하가 건의하기를 죽은 진나라 병사들로

경관'京觀'을 쌓자고 말하죠

이에 초장왕이 자고로 경관(京觀)이란

죄를 지은 이들을 토벌하여 세우는 것인데

나라에 충성하며 싸운 이들의 수급으로   

어찌 경관을 세울수가 있느냐며 이를 반대를 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 갱살(坑殺)이란게 있습니다

보통 역사책에서 생매장해 죽였다라고

번역되어 소개가 되는 용어죠


<한서漢書>에 따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왕망이 제위를 찬탈 할 때 그에 반대했던

신하들과 그 일족을 모두 "坑殺갱살" 했다"


근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게 흥미롭죠


"왕망은 이들을 주살한 뒤 그 시체를 쌓으라 했는데

방육장, 고육척(육장의 너비와 6척의 높이)로 쌓았고

그 위에는 6척 높이의 깃발을 달아

"반노역적경예(反虜逆賊鯨)"라 적었다.<한서>"

*'경예'란 고래가 아니라 역적 수괴를 말함


" 후진이 고장성을 오랫동안 공격하니 식량이 떨어졌다

이에 백성들이 살고자 도망치려 했는데 여륭은

백성들이 도망치는 것을 금하고 모두 "갱坑"하여

성벽 길가에 쌓아 두었다.<진서>"


이를 통해 알수 있는 것은 소위 갱살坑殺이라는 것도

경관과 똑같이 시체를 쌓아서 탑으로 만들었단 뜻입니다



이런식으로 말이죠.


좌전의 기록과 한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전쟁에서 전투 과정에서 죽인 적을 쌓으면

그걸 경관京觀이라 하였고

전투가 아닌 포로로 잡아 죽인 적을 쌓으면

그걸 갱살坑殺이라 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한나라 京觀경관 유적 황보숭이 황건적을 죽이고

쌓은 경관 유적이라고 합니다

경관, 갱살의 경우 죽여서 탑을 쌓고

그 주변을 흙으로 덮어 만든 것이니

흙산 처럼 보이는듯 합니다.)


이후 이런 기록은 무수하게 많습니다


일단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했을 때

갱유坑儒 라는 말이 단지 유교 선비들을

생매장만 한게 아님을 알 수 있죠


'관도에서 조조군이 승리를 하였는데

이때 투항한 원소군 병사들을 갱坑 하였다.'


'진시황이 조나라 한단을 점령하였을 때

명을 내려 과거 진왕 일가를 괴롭혔던 이들을

모두 붙잡아 갱坑하였다 '


이런 갱坑은 너무도 많아서 셀수가 없습니다

거의 모든 왕조의 역사적 사건 마다 등장하죠


또한 이런 경관(京觀)을 쌓는 경우는

 무슨 먼 과거인 고대에 벌어진 일도 아닙니다

이런 전통은 무려 명나라 시절까지 이어졌죠


'명나라 장군 장보는 베트남으로 진격하여

베트남 군대를 격파한 후 그 수급 2000여기로

"경관(京觀)"을 쌓았다.'


(아즈텍의 해골탑,

이 동네는 사람이 식량이자 곧 건축 재료였던

좀 쩌는 동네라 같은 사례는 물론 아닙니다.)



그럼 중국인들만 이런 전승기념 문화를 가졌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흉노족 혁련발발이 남량을 공격하자

그 수급이 산처럼 쌓였다

장안성 밖에서 동진(東晉)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이들 수급을 모아 탑을 쌓았으니 고루대(骷髏臺)

즉 '뼈로 만든 누각' 이라 불렀다'


'거란족 요나라는 석경당을 도와 후당을 멸망 시켰다

후당의 황실인원과 후당 장병들을 모두 죽여

분하의 강변에 뭍었는데 "경관을 만들었다" '


그리고 이런 경관(京觀)은

한국 역사에도 등장합니다.


바로 고구려입니다


 당나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수나라 말에

고구려에서 죽은 병사들을 매장했다.

살수, 요동에서 수 많은 수나라 병사들이 죽었다

이에 당나라는 광주사마 장손사를 고구려에 보내어

당시에 고구려가 세운 경관(京觀)을 헐어버리고는  

병사들을 매장해 주고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영류왕 14년-


당나라가 고구려에 방문하였을 때

요하 강변을 따라 세워져 있는

수나라의 병사들의 경관을 보고는

느끼는 바가 많았나 봅니다.

아마도 고구려 그대로 두면 큰 위협임을

그것을 보고 바로 깨달았겠죠


이후 당나라가 강성해지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바로 그 경관을 헐어버리는 것이었고


이는 고구려에서 큰 반발을 가져와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런 경관을 만드는 기괴한 풍습은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하면서

청나라는 그냥 시체를 전부 매장해 주었고

이후 경관의 풍습은 소멸하게 됩니다.


경관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