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정자로 인공수정해 태어난 자녀를, 인공수정에 동의한 남편의 친자식으로 추정할 수 있는지를 두고 치열한 법정공방이 벌어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2일 대법정에서 A씨가 자녀들을 상대로 낸 친생자관계부존재 확인 소송 상고심 사건의 공개변론을 열고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공개변론의 쟁점은 다른 사람의 정자로 임신·출산했다는 사실이 인정된 경우에도 민법상 '친생자 추정 원칙'을 고수해야 하는지였다. 현재 판례는 부부가 동거하지 않았을 때 생긴 자녀만이 친생자 추정 원칙의 예외로 인정되는데, 재판에서는 이 예외사유를 확대할 필요가 있는지를 집중 심리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83년 판결에서 '부부가 동거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 명백한 외관상 사정이 존재한 경우에만 친생자 추정이 깨질 수 있다'며 예외사유를 좁게 인정한 바 있다. 유전자 확인기술이 발달한 사정을 고려할 때 이 같은 36년 전의 판례를 바꿀 필요가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사건이 회부됐다.








공개변론에는 원·피고 측 대리인과 법학자 등 전문가들이 참여해 판례변경 필요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원고 측 대리인은 "우리 민법은 친자관계에 대해 '혈연 진실주의'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며 "혈연적 친자관계와 사회적 친자관계를 구별한 입법 취지에 따라 혈연관계가 아님이 확인된 인공수정 자녀에 대해서는 친생자 추정의 예외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고 측 대리인은 "아이를 낳기 위해 인공수정에 동의한 남편은 민법상 친생자 관계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동의한 것"이라며 "아내가 낳은 아이를 친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남편에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권한을 주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대법원의 초청으로 공개변론에 나온 전문가들의 의견도 팽팽하게 맞섰다. 피고 측 참고인으로 출석한 현소혜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제삼자 정자 인공수정'을 동의한 부모가 출생한 자녀에 대해 친생 부인(否認)이나 친생자관계존부확인 소송을 내는 것은 '선행된 발언에 모순되는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금반언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며 "오히려 친생추정의 예외를 인정하는 현행 판결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원고 측 참고인인 차선자 전남대 로스쿨 교수는 "부(父)의 친생 부인 기회를 상실시키는 것은 자식이 혈연부(父)에 대한 알 권리와 진실된 친자관계를 형성할 기회까지 단절시킨다"며 "친자관계부존재 확인 소송을 통해 친생 부인을 인정하는 유연한 대처를 하는 것이 자식의 복리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A씨 부부는 A씨의 무정자증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자 1993년 다른 사람의 정자를 사용해 인공수정으로 첫째 아이를 낳은 뒤 두 사람의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했다. 이후 1997년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무정자증이 치유된 것으로 착각한 A씨가 이번에도 부부의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마쳤다. 2014년 가정불화로 아내와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둘째 아이가 혼외 관계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A씨는 두 자녀를 상대로 친자식이 아니라며 소송을 냈다. 법원이 시행한 유전자 검사결과 두 자녀 모두 A씨와 유전학적으로 친자관계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1·2심이 기존 판례에 따라 "친생추정 예외사유에 해당하는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고, A씨는 상고했다. 대법원은 공개변론에서 논의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올 하반기에 판례변경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