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전쟁 전후처리를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는 자리 그러나 한국은 공식 초대받지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일배상요구서 까지 준비했고 당시 일본돈 310억엔에 달했다.  
그리고 장면대사를 미국에 파견해 한국의 참가는 당연한 권리라 주장했고 
미국무장관 덜레스 역시 지지의 뜻을 강력히 밝혔다. 

그런데 강화회의 5개월전 요시다 수상과 비밀회담후 덜레스의 태도가 180도 달라진다. 
 한국참여 불가론이 요시다의 주장이었다. " 



" 결국 우리나라는 국제법적으로 전쟁배상을 받을 자격조차  얻지못하고 참석도 하지못했다. 
태평양전쟁당시 전쟁당사국이 아니었다는 이유였다. "    



" 독도역시 일본반발에 의해서 협정서류에서 제외된다.  
강화조약 초안은 미국이 작성했는데, 1차 초안부터 5차 초안까지 독도를 한국영토에 포함시켰다.

 이를 알게 된 일본이 미국인 고문을 내세워 독도를 미공군 레이더기지와 기상관측소로 제공하겠다고 
엄청난 뇌물을 제공하고 맹렬한 로비를 하여, 6차 초안에는 독도를 한국영토에서 빼내어 일본영토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영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다른 연합국이 6차 미국초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7차~9차 미국 초안에는  아예 ‘독도’ 이름 자체를 빼버렸다.  

최종 조인된「샌프란시스코조약」 제2조에서"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하여 ‘독도’의 명칭이 빠지게 되었다. 

일본측은 이것을 갖고 연합국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인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출처- KBS 파노라마 전쟁과 일본 4편 

 "속죄하는 나라, 망각하는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