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 경무관 (1920~1958)


10대의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황푸군관학교 졸업.


졸업 이후 조선의용군에 합류하여 광복 직전까지 항일투쟁.


다수의 조선의용군 출신이 북한을 선택한것과는 달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리나라를 선택하여 귀국.


한국 전쟁 초기 특별임관 형태로 육군 대위로 임관하였으나 부상으로 조기 전역.


그러나 부상회복 후 경찰연대장으로 보임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되는데...


51년 1월 13일 빨치산 2000여명에게 포위되었던 칠보수력발전소를 경찰병력 75명으로 탈환,


빨치산 2000여명을 쫓아내고 고립되었던 아군 병력 및 주민들을 구출하게 됨.


(칠보수력발전소 전투or 탈환전)


그리고 51년 5월.


상부 : 지리산 일대의 사찰이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위험이 있으니 모조리 다 소각하시오!


화엄사 근처에 있던 차일혁 경무관은 이런 명령을 하달받게 되었고, 고심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은...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라는 명언을 남기고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대웅전의 문짝만을 뜯어서 소각.



"명령을 받았으니 어길 순 없다. 문짝을 태우는 것으로 그 명령을 이행한다"


이런 과정 덕분에 국보,보물급 문화재가 가득한 화엄사가 한 줌의 재로 변하는 대참사를 피했으며

인근의 선운사 쌍계사 천은사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화를 면하게 됨.

그러나 이 행동이 상부에 명령불복종으로 찍혀 감봉 징계를 당하게 됨.


그리고 53년 9월 휴전협정 이후에도 지속적인 위협이 되었던 빨치산 거물 이현상을 사살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게됨.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우리 정부에서도 이현상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차에 올린 전과였으나

차일혁은 빨치산들에게 최대한 귀순을 유도하고 온정을 보여주었으며 죽은 이현상을 화장하여 장례를 치뤄줬다는 이유로

소속 부대에 태극무공훈장이 3개나 내려왔음에도 수여대상에서 제외.


상기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의용군 출신 + 상습 명령불복종 + 빨치산에게 온정을 보임 등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상부에 제대로 미운 털이 박혀 충주 ,진해 ,공주 등등 지방경찰서장을 전전하게 됨.


특히 진해경찰서 서장 시절에는 좌익세력으로 찍혀서 조사까지 받은 일까지 있었는데 워낙 전공이 뚜렷하다보니


유야무야 넘어가게 됨. 


그러다 1958년 공주경찰서 서장으로 재직 중 금강으로 물놀이 갔다가 심장마비로 인하여 39세로 갑작스럽게 타계.


워낙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자살설까지 나오기도 함.



업적이 굉장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1998년에 화엄사 차일혁 공덕비가 세워진것을 시작으로


2008년 경찰로는 최초로 문화재수호의 공로를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 수여 및 문화재청 감사장 수여.


2009년 아산경찰교육원 강당을 차일혁 홀로 명명.


2011년 총경=>경무관 1계급 특진 및 추서.


몇십년이 지나서야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게 됨.